李 “무협지 화법으로 난 ‘만독불침’의 경지”
화전민의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재명
선생님에게 맞은 27대의 뺨…반항심으로 무장한 ‘깡’
1976년 초등 졸업 후 아버지 살던 성남으로 이사
이름 없는 소년공, 그리고 세 번의 자살 기도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7·30교육개혁’과 ‘전두환 장학금’의 수혜자
李 공적 삶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에 기반
이재명 대통령이 글러브와 장갑을 만드는 경기 성남의 대양실업 공장에서 소년공으로 일하던 당시 모습. 더불어민주당
신문·유튜브 같은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을 택해 무조건 찬양하거나 무조건 비난해야 장사가 잘된다. 독자는 중립이나 공정을 원하는 게 아니다. ‘본능의 경제학’의 저자인 비키 쿤켈에 따르면, 독자의 심리는 이런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지 마라. 그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들을 더 많이 보여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 견해를 읽으며 계속해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를 결집시킬 내용을 달라. 우리가 환호할 수 있는 사람을 달라!”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다. 시장에선 열세를 면치 못할망정 한 인물의 명암(明暗)을 있는 그대로 동시에 보면서 공정에 근접하려는 전통 저널리즘의 정신에 충실하고 싶다. 그래서 이미 이재명에 관한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내가 할 일, 아니 해야 할 일이 있겠다 싶었다. 나는 오늘의 이재명을 만든 그의 ‘만독불침(萬毒不侵)’의 역사를 탐구하는 글을 ‘신동아’에 연재하고 싶다.
화전민의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재명
“무협지 화법으로 말하자면 난 ‘만독불침’의 경지다. 포지티브가 아니라 네거티브 환경에서 성장했다. 적진에서 날아온 탄환과 포탄을 모아 부자가 되고 이긴 사람이다.” 이재명이 2018년 11월 한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가. 무협지에 나오는 만독불침은 어떠한 독에도 당하지 않는 갑옷이라는데, 이재명에게 그런 기능을 해온 갑옷은 한마디로 말해서 ‘깡’이었다.오죽하면 문재인 정권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릴 정도의 ‘깡’을 보여준 윤석열마저 2021년 9월 SBS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나와 “이재명의 ‘깡’을 배우고 싶다”고 했겠는가(‘깡’이 있는 줄 알았던 윤석열이 3년 후 12·3계엄을 저지르면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멘털이 약하고 비굴한 사람이라는 게 들통나긴 했지만 말이다). 이재명의 개략적인 전기(傳記) 형식을 취하면서 이재명 만독불침의 명암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재명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촌동이라는 깡촌 산골짜기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을 알 수는 없다.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했던 나머지 어머니는 그의 생일을 챙길 겨를도 없었고, 학교 등록을 위해 생년월일이 필요하자 그제야 점쟁이를 찾아가 생일 날짜를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록상의 생년월일은 1964년 12월 22일이지만, 출생신고가 1년 늦어 실제로는 1963년생이라고 한다.
이재명은 원래는 5남 4녀 중 일곱째였으나, 누나 둘이 어릴 때 병으로 죽어 다섯째가 됐다. 부친 이경희는 경북 영양군 출신으로 대구 청구대를 중퇴하고 순경·교사 등을 하다 노름에 빠졌고, 이후 탄광관리자 등을 전전하다가 안동군 예안면에 정착해 산에 불을 지펴 들풀과 잡목을 태운 뒤 그곳에다 농사를 짓는 화전(火田) 농업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재명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전히 도박 습벽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집문서, 땅문서까지 잡히면서 결국 없는 재산마저 거덜을 내고 말았다. 어머니가 봄에 밭을 갈려고 갔더니 다른 사람이 쟁기질을 하고 있길래 왜 남의 땅에 쟁기를 대느냐고 물으니 이제는 자기 땅이라고 하더라나. 겨우내 화투를 하다가 남은 땅마저 남의 손에 넘겨버린 것을 어머니는 농사철이 돼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30대 변호사 시절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모습. 더불어민주당
이재명은 ‘이재명은 합니다: 무엇을 시작하든 끝장을 보는 사람, 이재명 첫 자전적 에세이’(2017)에서 “혼자서 7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힘겨울 때마다 이 모든 시련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저주의 감정마저 들었다.”
선생님에게 맞은 27대의 뺨
오늘날엔 믿기지 않는 말로 들리겠지만, 당시 농촌 지역의 학교는 수시로 학생들에게 보리 한 되, 벼 한 되 등 곡물을 요구했다. 명목상으로는 추수한 밭에 가 이삭줍기를 하라며 목표량으로 정해 준 것이었지만, 사실상 집의 곡식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재명은 2006년 야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힘겨운 농사로도 많은 식구가 먹고살기 힘들어 동네 남정네들에게 막걸리 데우고 라면 끓여 팔며, 약까지 팔아 힘겨운 삶의 무게를 술과 담배의 힘으로 견뎌가던 어머니에게 나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누구도 싫어하는 똥푸기로 벌을 대신 했다”고 썼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미술 도구란 거의 가져본 일이 없고, 돈이 드는 학용품은 최소한의 것 외에는 가져보지 않았다. 이런 것들도 곧바로 벌로 이어져 다른 아이들의 특별활동 시간은 나의 특별활동, 똥 푸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똥을 푸면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 똥 냄새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약하지만 한참이 지나면 계란노른자 냄새 비슷한 것이 별로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 옷이나 손에 불가피하게 그것이 묻어도 씻으면 그만이었다.”
뚱푸기 벌만 선 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맞기도 많이 맞았던가 보다. 물론 가난이 죄였다. 언젠간 어머니의 일을 돕느라 미화 작업에 빠졌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27대의 뺨을 맞은 적도 있다. 작가 김현정과 김민정은 이재명의 일기 6권 전체를 제공받고, 이재명과 세 번 인터뷰한 끝에 완성한 책 ‘인간 이재명’(2021)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스물일곱 대! 뺨 맞은 숫자는 같은 반이었던 팔촌 이재완이 세어줘서 알았다. 터진 코피로 칠갑을 한 어린 이재명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도 뺨을 후려치는 선생님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너 맷집 끝내준다. 스물일곱 대를 맞고 어떻게 고개를 안 숙이냐?’ 팔촌인 이재완은 뺨을 맞을 때 보여준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원망에 차서 선생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고 했다.”
이재명은 “나이가 든 뒤에도 팔촌은 스물일곱 대 뺨을 맞을 때의 내 눈빛을 잊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필시 반항기 가득한 얼굴이었을 게다”라고 말했다. 끝내준 건 맷집이라기보다는 반항심으로 무장한 ‘깡’이었을 게다. 훗날(2012년 7월 1일) 이재명은 트위터(지금의 ‘X’)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내가 세상에서 가졌던 첫꿈은 시골 초딩 때 가졌던 ‘선생님’이었다. 왜 선생님이 되고 싶었냐구요? 기막히겠지만 선생님한테 너무 많이 맞아서 나도 선생님 돼서 애들 때려보겠다고. 복수감정? 꿈은 세월따라 변하더군요.^^”
1970년대의 성남은 어떤 곳이었던가
이재명은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나간 아버지가 살고 있던 성남시로 이사를 갔다. 당시 성남은 어떤 곳이었던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발목 잡는 판자촌은 박정희 정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서울시는 판자촌과 도시빈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도시(광주)를 개발해 빈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서울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1969년 5월부터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시켰다.그렇게 해서 모인 빈민의 수는 14만5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울시는 쓰레기 내버리듯 그들을 광주에 내팽개쳤을 뿐 아무런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광주대단지는 문자 그대로 황무지였다. 도로도 없고 배수시설도 없었다. 빈민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더욱 큰 문제는 그들에게 일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굶을 수밖에.
땅은 어느 곳에서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개발 소식이 전해지면서 광주 대단지 황무지에도 투기꾼이 몰려들어 그곳마저 땅값이 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가 당초 약속을 어기고 광주 대단지의 토지 유상 불하 및 가옥 취득세 부과를 발표했다. 주민들이 술렁거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 집 내 땅을 가지려는 희망 하나로 그간 쓰레기처럼 버려진 삶을 간신히 지탱해 왔는데, 그것마저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30대 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그날 이른 아침부터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대열에’라는 제목의 전단이 집집마다 뿌려졌다. “배가 고파 못 살겠다” “토지불하가격을 인하해 달라” “일자리를 달라” “백원에 산 땅 만원에 파는 폭리를 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힌 피켓, 플래카드 3만여 개를 준비했다. 그들의 가슴에는 “허울좋은 선전 말고 실업군중 구제하라”고 쓰인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당황한 서울시는 시장 양택식과의 직접 면담을 오전 11시에 주선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오전 10시경 5만여 명의 주민은 성남출장소 뒷산에 모여 양택식을 빗속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11시 40분이 돼도 양택식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주민들은 폭발하고 말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파출소와 경찰차에 방화하고 관공서 건물과 차량을 파괴·탈취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심지어 “굶주리다 못해 말하기조차 끔찍하게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까지 떠돌 정도로” 그들의 굶주림은 그만큼 심각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장이 주민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발표한 것이 오후 5시경이었다. 이로써 6시간의 비극적 드라마가 끝나게 됐다. 이 사건의 내용을 보고받은 박정희의 답은 너무도 간단명료했다. “주동자를 엄단에 처하라.”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부상했고 주민 23명이 구속됐다. 이 사건은 “학생이 아닌 일반인 시위로는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사건”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광주대단지의 비참한 실상이 사회에 알려지게 됐고, 이후 각종 민원성 소요가 폭발했다. 광주대단지는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됐지만, 판자촌 빈민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이후 내내 일어나게 된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세 번의 자살 기도
이 ‘광주대단지 사건’에 놀란 정부는 일터 제공을 위해 서둘러 성남에 산업 공단을 조성했다. 1974년 1·2공단, 1976년 3공단을 준공했다. 세 공단에 서울 성수동에 있던 공장이 대거 이전했다. 오늘날에야 성남시 분당구는 부동산 시장에선 ‘서울 강남권’으로 분류될 정도의 부자 동네가 됐지만, 1970년대의 사정은 전혀 딴판이었다.이재명의 아버지는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시장통에서 청소부 일을 했고, 어머니는 시장통 공중변소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요금 받는 일을 했다. 이재명은 중학교에 진학조차 하지 못한 채 상대원 공단의 공장에서 소년공으로 일해야 했다. 그는 공장 일 대신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공장에서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이 공부는 무슨 공부!”
이재명은 겨우 14세에 조그마한 가내수공업 목걸이 공장 노동자로 사회 첫발을 뗐다.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 남의 이름을 빌려서 일할 수밖에 없는 ‘이름 없는 소년공’이었다. 공장 생활 6년 동안 4년을 남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그 공장에서 무엇을 얻었던가. 이재명은 자서전 ‘이재명의 굽은 팔’(2017)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첫 번째 공장에서는 납과 염산을 들이마셨다. 두 번째 공장에서는 붕산이, 세 번째 공장에서는 고무가 내 손가락에 박혔다. 옅은 청색 고무가루는 아직 내 몸에서 살고 있다. 네 번째 공장에서는 날카로운 함석들이 내 몸뚱이 곳곳에 자상과 흉터를 남겼다. 다섯 번째 공장에서는 팔목 뼈가 부러지면서 성장판을 잃고 이윽고 팔은 굽어버렸다. 여섯 번째 공장에서는 벤졸과 아세톤이 내 후각을 훔쳐갔다. 그리하여 나는 냄새 못 맡는 사내가 되었다.”
이재명의 소년 시절은 1970년대 후반의 ‘소년 노동 잔혹사’의 압축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인간의 몸이 기계가 아닐진대, 너무도 힘겨운 삶이었다. 이재명은 우울증과 장애로 너무 힘든 나머지 17세 때 자살을 시도했다. 첫 연탄가스 자살 시도 때는 연탄불이 저절로 꺼졌고, 두 번째 때는 둘째 형인 이재영이 구해줬으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마지막 시도 땐 다량의 수면제를 구하러 갔다가 눈치챈 의사가 소화제를 대신 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이재명에게 정신적 상처도 주었겠지만, 오늘의 이재명을 만든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재명은 ‘이재명은 합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두 번의 자살 기도가 실패로 끝난 뒤부터였다. 그 사건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셈이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고, 어떤 일이 닥치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긍정과 희망이 나의 무기가 되었다. 나에게 긍정과 희망은 선택 항목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 요소였다. 긍정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희망이 없으면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이재명은 ‘두 번’이라고 했지만, ‘세 번’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아버지에게도 대든 이재명의 ‘깡’
이재명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학교엔 못 가더라도 검정고시가 있지 않은가.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정미는 ‘이재명의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의 일기를 조정미가 읽고 쓰다’(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것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1979년부터 쓰기 시작한 소년 이재명의 일기 곳곳에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고통스러움이 묻어나 있습니다. 청소부 아버지는 새벽 3시에도, 새벽 4시 반에도 열여섯 살 아들을 깨웁니다. 쓰레기를 치우러 가자는 것입니다.”그런 최악의 여건에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재명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증을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보였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수고했다’ ‘잘했다’는 말 따위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고개 정도는 끄덕여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공단 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울분을 삭였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방바닥에 합격증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받은 합격증인데…’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렇게 켜켜이 쌓여갔다.” - ‘이재명은 합니다’ 중에서 발췌.
그래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매우 심했으며, 아버지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하지만 이재명에겐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독보적 특성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깡’이었다. ‘27대의 뺨’ 사건도 바로 그런 ‘깡’의 발현이었을 게다. 둘째 형 이재영은 “어려서부터 우리 형제 중에 아버지한테 말대꾸한 건 재명이뿐이에요. 우린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무조건 따랐다는데 재명이는 자기 할 말 했어요. 그러다가 맞기도 했지만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 맞으면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죠”라고 회고했다.
이재명은 2021년 어버이날을 맞아 페이스북에 자신의 젊은 날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필사적으로 좌충우돌하는 날”이었다고 적었다. 또 “돌아보면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며 “그 강렬한 원망이 나를 단련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마음의 어둠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가난보다 아버지를 더 증오했다고 밝혔다.
‘7·30교육개혁’과 ‘전두환 장학금’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무자비하게 총칼만 휘두른 건 아니었다.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 민심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는 시도도 병행했다. 과외 금지 및 대학의 졸업정원제를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7·30교육개혁안’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론 그런 취지에서 단행된 것이었다.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을 발표했다. 언론은 ‘해방 후 최대의 교육개혁’ ‘망국 과외 철폐’ 등으로 이 내용을 대서특필했는데, ‘7·30교육개혁’은 8월 1일부터 과외 교습을 전면 금지하면서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다. 교육정책으로는 대학입시에 고교 내신성적 반영, 대입 본고사 폐지, 고교 교육과정 축소, 대학 졸업정원제 도입, 대학 입학 정원 확대, 교육방송 실시 등을 제시했다. 사회정책으로는 불필요한 학력 제한 철폐와 학력 간 임금격차의 점차적 축소 등과 같은 산업체 고용정책의 개선 등을 제시했다.
교육학자와 교육평론가들은 7·30교육조치를 ‘교육쿠데타’ 혹은 ‘교육테러’라고 혹평했지만, 과외비 부담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정이 많아 과외 폐지 조치는 국민들로부터는 호응을 얻었다. 과외 열기로 인해 어린 학생들의 육체적·정신적 피폐가 극심한 것도 문제였지만, 막대한 돈이 과외에 사용돼 저축이 줄고 생산 부문 투자가 줄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생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했던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시원한 뉴스였다”며 “과외 폐지 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환호하는 사람 중엔 이재명도 있었다.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 입학 자격을 얻은 이재명은 ‘7·30교육개혁’ 덕분에 1982년 중앙대 법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7·30교육개혁’은 본고사를 아예 없애고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학생들을 뽑게 했으며, 대학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특별장학금 제도를 도입하게끔 했다. 게다가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이재명에겐 본고사보다는 학력고사 시험 방식이 훨씬 유리했으니, 이재명이 재미로 붙인 작명에 따르자면 ‘전두환 장학금’이라고 부를 만했다.
중앙대 입학식에서 어머니와 기념 촬영을 한 이재명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법대생에 이어 변호사가 된 소년공
이재명은 우수한 학력고사 성적으로 중앙대로부터 입학금, 3년간 등록금 면제는 물론 매월 20만 원가량 학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20만 원은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당시 공장 월급이 8만 원 정도였는데, 공장에서 받았던 마지막 월급의 세 배가 넘는 돈이었으니 말이다. 법대 동기 111명 중에서 88명이 그와 같은 특대(特待) 장학생이었다.이재명은 자신이 걸은 길을 당시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셋째 형 이재선에게 권했다. 중앙대에서 매달 주는 용돈을 쪼개 주겠다고 설득한 것이다. 이재선은 동생의 도움을 받아 검정고시를 거쳐 4년 등록금과 생활보조금을 받는 건국대 경영학과로 진학해 나중에 공인회계사가 됐다.
이렇듯 아름답고 감동적인 형제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나중에 모두 크게 성공한 후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악연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성공이 문제였을까. 이재명은 싸움의 근본 원인을 자신에 대한 형의 ‘열등감’에서 찾았지만,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 ‘팩트’들이 존재하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 성공했기에 벌어진 일이었을 게다.
2021년 10월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경기 성남 수정구 신흥동 2457번지 성남 제1공단 근린공원 조성 공사 현장을 둘러보며 참석한 의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은 1987년 사법연수원생 시절 변호사 노무현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 인권변호사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학생운동권 출신 동기(18기)들이 이재명을 눈여겨본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 의원 문병호·최원식과 현 의원으로 법무부 장관이 된 정성호가 그들이다.
정성호는 “이재명은 개성이 강하고 명석했지만 대학에서 공부만 한 전형적인 고시반 출신이었다”고 회고했다. “똘똘한 이재명이 공안검사가 되는 걸 막으려고 ‘의식화’를 했다”는 우스개도 있다. 동기 20여 명이 “판·검사를 하지 말고 변호사가 돼 사회변혁 운동에 뛰어들자”며 ‘도원결의’를 했다는 것인데, 나중에 이재명은 “판·검사 발령 안 받고 그런 용기를 얻게 된 것도 동기들 덕이었다”고 회고했다.
늘 그런 건 아닐망정 때때로 이재명의 경솔할 정도로 솔직한 성격은 여기저기 떠도는, 미화된 이야기를 스스로 부정하곤 했다. 훗날(2021년 5월)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노무현 추모전 ‘2021 사람 사는 세상전(展)’ 개막식에서 이재명은 노무현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으니 말이다.
“저는 사실 개인적인 인연은 없다. 사법연수원에서 26세 나이로 현장 개업하는 게 무서워서, 돈도 없고 경력도 없고 먹고살 수 있을까 고민할 때 노 대통령이 강연 와서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는 명확한 지침을 주시는 바람에 변호사를 개업해 작게나마 시민운동을 해봤다.”
이재명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
이재명의 삶에서 여기까지는 이렇다 할 논란이 없다. 논란은 이재명이 변호사로서 지역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등 사실상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면서부터 벌어진다. 그의 활동은 격렬한 투쟁이었다. 논란은 주로 그의 ‘투쟁 방법론’ 때문에 벌어진다. 공익을 표방한 투쟁일지라도 그것이 공격적 인정투쟁의 성격을 갖게 되면 사실상 사익을 위한 투쟁과 같은 게 많아진다. 특히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염두에 둔 투쟁이라면 더욱 그렇다.나는 지난 7월호에 쓴 글에서 “이재명은 성남시장 시절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험주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위험한 일을 많이 벌였던 인물이다”며 “중요한 건 그의 ‘유능’을 ‘위험’과 분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이어 “이재명이 처음부터 대통령직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결코 하지 않을 ‘모험’이었겠지만, 그가 대선후보로 부각된 건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라고 하는 특수한 사건의 와중에서 잃을 게 없는 언더독으로서 과격한, 때론 무모한 선동을 구사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했다.
이재명은 과거에 했던 위험한 일들의 업보로 인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사법리스크’ 부담을 지게 됐지만, 이재명과 그의 지지자들은 모든 걸 ‘검찰의 조작’ 탓으로 돌렸다. 이에 대해 새삼 논쟁이 필요할 것 같진 않다. 윤석열이 자폭함으로써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이 된 현 상황에선 논쟁 자체가 싱거운 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재명의 공적 삶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운이 뒤따르긴 했을망정 이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와 관련된 ‘만독불침(萬毒不侵)’의 역사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