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바이킹과 비슷한 동아시아 왜구
日, 네덜란드 통해 근대화 기초 마련
일본의 은(銀), 동아시아와 유럽 연결
조선이 버린 기술, 일본 도약 이끌다
1517년 포르투갈은 중국 마카오를 점령했다. 그림은 ‘마카오 예수회 수도원’이라는 제목의 세인트 폴 교회의 전경. Gettyimage
하지만 유럽 상인들이 동아시아에 대거 등장한 것은 근세 이후 포르투갈이 처음이었다. 15세기 말 동인도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은 1505년 인도 남서부 도시 고아에 총독부를 뒀고, 1517년에는 중국 마카오를 점령하고 상관(商館)을 설치했다. 중국 명나라(1368~1644)가 포르투갈에 마카오를 할양해 준 것은 당시 골칫거리였던 왜구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은 왜구 소탕을 돕는 대가로 마카오를 넘겨받고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에서 무역을 했다. 이를 남만(南蠻)무역이라 한다.
동아시아 해안에서 활동한 일본 해적, 왜구
오랜 기간 동북아 정세에 영향을 주었던 왜구는 대체 어떤 집단일까. 왜구는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동아시아 해안에서 활동한 일본 해적으로, 약탈과 동시에 무역 활동을 했다. 중세 유럽의 바이킹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 당시 합법적 무역이 조공무역 형식으로 이뤄졌으니 왜구의 무역은 불법 밀무역이라는 것이 문제였다.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중국의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합법적 무역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은과 지역 상품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증가해 밀무역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왜구는 복건성, 절강성 등 명나라 해안 지역 상인들과 연계해 은, 비단, 도자기 등을 밀수했다. 16세기에 이르면 중국인과 조선인도 왜구에 합류하면서 왜구가 다국적 집단이 됐다. 명나라는 그동안 이들에게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했으나 이들이 점차 중국 해안 깊숙이 진출하면서 대규모 노략질을 일삼았고, 명나라는 결국 포르투갈을 끌어들여 왜구를 소탕하고자 했다. 득세하던 왜구는 16세기 후반 세력이 약해지다가 16세기 말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점차 자취를 감춘다.
포르투갈은 일본에도 진출한다. 일본 전국시대(1467~1573)인 1543년 일본 규슈 남단에 있는 다네가시마 해안에 한 척의 배가 표류한다. 이 배에는 100명이 넘는 중국인과 함께 포르투갈인이 타고 있었다. 다네가시마의 영주 도키타카는 포르투갈인이 가져온 길쭉한 막대 무기에 관심을 보였고, 두 자루를 은 2000냥에 사들였다. 200명의 군대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조총이라고 불린 이 무기는 개머리판이 있었고, 불을 붙이는 화탄을 화승이나 금속 용품으로 대체해 방아쇠를 당겨 점화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그렇게 일본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일본이 포르투갈과 그들의 종교인 가톨릭(천주교)을 받아들인 것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 교황청은 개신교의 출현으로 신도의 숫자가 대폭 감소하면서 십일조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줄어들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새 신도를 확보하기 위한 포교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교황청은 인도, 일본, 중국 등 동방 국가의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 명나라의 왜구 소탕으로 해외 무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러한 어려움을 포르투갈의 남만무역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남만선은 가톨릭 포교를 허가하는 항구를 골라서 입항했으므로 교역이 필요했던 일본의 다이묘들은 포르투갈에 가톨릭 포교를 허가했다. 여기에는 가톨릭 선교사들의 조력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 다이묘들에게 화승총과 대포 등 진귀한 물건을 선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압박하면서 가톨릭 포교를 허가해 줄 것을 종용했다. 교역과 선물을 가톨릭 포교와 맞바꾼 것이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일본에 진출했고, 16세기 후반에는 일본인 가톨릭 신자가 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천주교가 성행했다.
그러던 중 16세기 말 동북아 정세를 뒤흔든 큰 사건이 일어난다. 임진왜란(1592~1598)이다. 일본을 통일하면서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재래식 무기가 주축인 조선군이 조총 등 화약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대규모의 조총 부대를 중심으로 군대를 편제하고 집중 사격 방식을 고안한 것은 유럽의 군사 혁신에 못지않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전까지 섬나라 오랑캐 취급을 받던 일본이 동북아의 강국으로 부상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이 일본의 패퇴로 끝 났지만, 결론적으로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명나라는 50년이 지나 만주족에게 멸망했고, 조선은 전쟁을 수습하기도 전에 병자호란을 겪은 후 내리막을 걷다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됐으니 말이다.
네덜란드를 새 무역 파트너로 삼은 에도 막부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고 에도막부를 연다. 이때 이에야스는 유럽의 교역 파트너를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바꾼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사건 때문이었다. 마카오에서 일본 선박과 포르투갈 데우스호(號)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서 일본 측 선원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이묘인 하루노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가사키에 입항한 데우스호를 격침한다. 막부 관리인 다이하치는 이를 상부에 보고해 포상받게 해주겠다면서 하루노부에게 거액의 뇌물을 받고는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하루노부와 다이하치는 둘 다 가톨릭 신자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이에야스는 다이하치를 처형하고 이날부터 가톨릭을 금지한다.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박을 묘사한 일본화. Gettyimage
세계 제2의 은(銀) 생산국, 일본
16~17세기 일본의 국제 교역에 가장 중요한 상품은 은과 도자기였다. 일본은 이미 왜구 활동 등을 통해 은과 도자기의 국제적 가치를 알고 있었고, 이후 질 좋은 은과 도자기를 생산해 수출함으로써 유럽의 교역 파트너로 자리매김했고, 세계경제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상품 모두가 조선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먼저 일본의 은(銀)에 대해 알아보자. 16세기 말 일본의 은 생산은 전 세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연 200t에 달했다.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정부는 은 광산 개발을 장려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배경에도 은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부(富)가 있었다. 은이 이렇게 부국강병의 효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때문이었다. 중국은 명나라 후반기인 1560년대에 은본위제인 일조편법(一條鞭法)를 시행하면서 은 수요가 급증했다. 중국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차 등을 수입해야 했던 유럽도 은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16세기 이후 엄청난 규모로 생산된 일본의 은은 신대륙(멕시코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상품이자 국제 거래의 결제수단으로 떠올랐다. 임진왜란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직접 교역은 끊겼지만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마카오 등을 통해 일본의 은을 중국으로 수출했다. 일본의 은이 동아시아와 유럽 경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16세기 들어서면서 일본이 은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미와 사도 광산이 개발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라는 제련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은 다른 금속과 달리 제련 방법이 까다로웠다. 그 무렵 유럽이 사용하던 수은아말감 공법은 수은을 사용해 은을 정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건강에 치명적인 수은을 사용하지 않고 불에 녹는 온도차를 이용해 납과 은을 분리하는 기술을 이용해서 은을 생산했다.
연은분리법은 연산군 때 양인 김검불과 노비 김검동이 개발한 조선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중종반정(1506)으로 정권을 잡은 반정 공신들은 은이 많아지면 사치 풍조가 만연한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은광을 폐쇄했다. 이에 연은분리법은 조선에서 사장되고 16세기 중반 일본으로 전수됐다. 이렇게 조선이 버린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가 발현돼 일본의 도약을 이끈 것이다.
유럽을 흥분시킨 일본 도자기
은 다음으로 일본 발전에 효자 노릇을 한 상품은 도자기였다. 도자기는 원래 중국에서 생산된 상품이었다. 중국 도자기는 8세기부터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여러 지역에 수출됐다. 하지만 무겁고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수출량이 많지는 않았다. 유럽도 1000℃ 안팎에서 구워지는 도기(pottery)는 생산할 수 있었지만, 1300℃ 이상에서 구워지는 자기(porcelain)는 생산하지 못했다. 도기는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가 나고 물에 젖는 데 비해, 자기는 정제된 고급 점토에 유약을 발라 구웠기 때문에 두드리면 맑은 금속 소리가 나고 물도 흡수하지 않아 품질 면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중국산 도자기는 당시 유럽 상류층 사회에서 부를 상징하는 보물 같은 것이었다. 특히 청화백자는 유럽인에게 인기가 높았다. 원나라 때 이슬람 상인들이 중국에 들여온 페르시아의 코발트는 푸른색 염료로, 회청(回靑) 또는 회회청이라 불렸다. 중국인들이 페르시아를 ‘회회’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 염료가 백자와 결합하면서 ‘청화백자’라는 도자기가 탄생했다. 1300℃ 이상의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염료는 코발트뿐이었다. 그 당시 청화백자는 너무 귀해서 그 가격이 같은 무게의 금값과 비슷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명·청 교체기에는 유럽이 중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었다. 청화백자 생산지인 징더전(景德鎭)은 오삼계의 난으로 파괴됐고, 상선의 연안 정박을 금지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상선 무역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은 그 당시 임진왜란 때 붙잡아 온 조선의 도공을 통해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전수해 수준 높은 도자기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의 도공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도자기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정유재란이 터졌을 때 일본에 끌려갔던 도공들이 조선에 다시 와서 “일본에 가면 노비를 면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며 수많은 도공을 다시 데리고 갔다. 이삼평(李參平)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중 한 명이었다.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有田)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하고 가마를 설치해 도자기를 구웠다. 이는 일본 도자기 역사상 가장 획기적 사건이었다.
아리타 자기는 인근의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 이마리 자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현재에도 아리타시에는 많은 도자기 회사가 있으며, 아리타시는 이삼평이 가마를 연 300주년인 1916년 비를 세우고 1917년부터 도조제(陶祖祭)를 열고 있다고 한다. 기술을 알아보고 기술자를 우대하는 의식이 일본을 최고의 도자기 생산국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기술로 유럽과 무역으로 연결돼 후일 근대화의 토양을 구축하게 된다.
네덜란드와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
17세기에 들어서면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무역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17세기 중국은 명·청 교체기였다.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유럽인들과 직접 교역을 원치 않았지만, 실용주의 신교도들인 네덜란드 상인들은 청나라 순치황제에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을 마다하지 않고 중국과 무역을 열었다.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된 수입품은 향신료, 도자기, 견직물과 더불어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이었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귀금속 거래가 오히려 상품 거래보다 많아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60년에서 1720년 사이에 아시아에 판 상품의 87%가 은이었다.
서양은 수메르 문명 이후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대략 1대 12였다. 이는 수메르 천문학에 기초한 양력과 음력의 비율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면서 로마 시대에도, 그리고 17세기에도 교환 비율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중국은 금과 은 교환 비율이 1대 6으로, 유럽보다 은이 두 배나 비쌌다. 중국에서 은이 비쌌던 이유는 1560년대에 일조편법을 시행한 이후 모든 조세 수입을 은으로 거둔 데 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랄까, 때마침 에스파냐가 개척한 신대륙에서 은광이 발견됐고, 일본에서도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세계가 은으로 하나가 되는 새로운 글로벌 경제 시대가 열렸다.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책 ‘하멜표류기’
화폐와 환전에 능한 유대인들이 포진해 있던 동인도회사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유럽이나 일본에서 은을 사들여 중국에 가서 팔면 그것만으로 100%의 이익이 실현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당시 중국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금지돼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상품 교역을 하면서 동시에 유럽과 일본의 은을 중국에 가져가서 금으로 교환하고, 다시 그 금을 유럽과 일본에 갖고 가서 은으로 교환하는 일을 반복했다. 금과 은의 국가 간 시세차익, 즉 환차익 실현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자체였다. 17세기 중엽부터는 중국과 유럽 간에 금과 은의 교환 비율 차가 줄었지만 그래도 그만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장사가 없었다.일본의 도자기를 수입해 유럽 시장에 내다 판 것도 네덜란드 상인들이었다. 당시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중국 차와 도자기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명·청 교체기에 중국 도자기를 대체할 새로운 도자기를 찾아 나섰을 때 조선도 고려 대상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거센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은 동인도회사로부터 수입한 무명과 후추 등을 조선에 팔아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기에 조선의 개방이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도 네덜란드와 접촉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헨드릭 하멜 일행이 타고 가던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 대정현에 표류한 것이다. 이 선박은 인도네시아 바타비아를 출발해 대만 총독으로 취임하는 레세르를 대만에 내려주고 나가사키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효종의 명으로 하멜은 한양으로 압송된다. 이때 통역을 맡은 사람이 같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해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던 박연, 네덜란드 이름으로는 얀 반스 벨테브레였다. 하멜 일행은 귀국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한양, 남원, 순천 등으로 보내지면서 조선에 억류당했던 하멜 일행은 1666년 몰래 어선을 타고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한다. 이들은 일본 관리에게 심문받은 후 1년간을 체류하다가 1668년 바타비아를 거쳐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하멜은 조선에 억류되느라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1653년 바티비아발(發) 나가사키행(行)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 일지’라는 긴 제목의 보고서를 동인도회사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멜표류기’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의 지리·문화·정치·군사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고,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큰 책이다.
하멜표류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멜 일행을 대한 조선의 인식과 태도는 너무나 큰 아쉬움을 남긴다. 효종은 하멜 일행에게 항해의 목적조차 묻지 않았다. 그들의 배에 대포·조총·모래시계·천리경 등 선진 문물이 가득 실려 있었고, 선원들 역시 항해와 무기 전문가였지만 아무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상하는 소(小)중화사상에 갇혀 스스로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이었을까. 당파 간 권력 다툼에 빠져 다른 것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까.
세계가 확장돼 하나로 연결되던 16~17세기 격변기에 일본은 시야를 세계로 넓히고 세상의 변화를 읽으려고 했다. 포르투갈 선원에게 조총을 사들이고 조선인에게 도자기 기술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세계 교역망에 지국을 편입시켰다. 기술을 중시하는 자세와 진취적 세계관, 여기에서 비롯된 차이가 후일 일본과 다른 동양의 국가들을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갈랐다. 이후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20세기 초반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한다.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행정고시 제35회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前 한국은행 감사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저서 : ‘역사는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