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공생하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로 진화해야”

[특집 | 한국 정치, 어디로 가야 하나] 정신분석학으로 본 韓 정치인 ‘호모 푸그난스’(투쟁하는 인간)

  • 강도형 청정신건강의학과 원장·前 서울대 정신과 교수

    입력2025-09-25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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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승자독식 공화국” 바꿔야 할 판

    • 상대 깎아내리고 조롱하는 ‘타나토스’의 지배…무의식적 쾌감

    • 6·25전쟁과 민주화운동 트라우마 가진 한국 사회

    • 집단무의식서 작동하는 상처와 고통

    • SNS, 현대적 부족주의 강화·혐오 확산

    • 내적 불안을 ‘나쁜 대상’에 투사…일시적 안정감

    • 공공선 정치 회복하려면 ‘공생의 기술’ 배워야

    오늘날 정치판은 하이에나 떼가 먹잇감을 둘러싸고 서로 물어뜯으며 쾌감을 얻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Gettyimage

    오늘날 정치판은 하이에나 떼가 먹잇감을 둘러싸고 서로 물어뜯으며 쾌감을 얻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Gettyimage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본 가치다. 개인으로 치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근간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군사독재와 권위주의를 넘어선 직선제 개헌, 권력분립을 제도화한 헌법 체계, 비교적 공정한 선거제도의 정착이라는 피와 땀이 서린 장애물을 아주 어렵게 넘어왔다. 

    민주주의는 기계적인 다수결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공화정은 단순히 군주가 없는 정치 형태가 아닌, 권력이 공공선(公共善)에 봉사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정치가 국민 전체를 위한 협력과 경쟁의 장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때 민주공화정의 본질은 훼손된다. 지금 한국 사회의 정치 현장을 바라보라! 타협과 양보는 자취를 감추고 날 선 갈등과 혐오만이 비열한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정치 양극화와 진영 논리, 자본과 권력의 결탁,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으로 인해 민주공화국이라는 훈장을 반납할 위기에 직면한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정치적 대립은 이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인 풍경이 됐고, 언론과 대중은 그러한 장면을 소비하며 더 큰 자극을 갈망한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판은 마치 하이에나 떼가 먹잇감을 둘러싸고 서로 물어뜯으며 쾌감을 얻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집단의 일원을 ‘적폐’로 규정하고, 그 적을 향해 공격성을 쏟아내면서 묘한 소속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정치가 협상의 기술이 아닌, 승자독식을 위한 집단적 투쟁의 무대가 된 것이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헌법 1조 1항을 “대한민국은 승자독식 공화국이다”로 바꿔야 할 판이다. 

    광장에 재현된 원시 부족 전쟁

    우리 정치판은 왜 언어와 이성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가 점점 사라져 갈까. 상대방을 악마화해 투쟁하려는 공격성이 난무하는 ‘호모 푸그난스(Homo Pugnans)’의 홈그라운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리비도(Libido)와 타나토스(Thanatos)라는 두 가지 충동에 지배를 받는다고 봤다. 리비도가 삶의 본능, 즉 사랑과 건설을 지향한다면,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 파괴와 공격성을 추구한다. 현재 우리 정치판은 타나토스의 지배를 받는 듯 보인다. 상대를 깎아내리고, 무너뜨리고, 조롱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인 쾌감을 얻는다. 이는 승리라는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중독적인 자극이 된다. 생존이 목적이 아닌, 쾌락을 얻기 위한 끝없는 승자 없는 도돌이표가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원시사회의 부족 전쟁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낭자하는 선혈이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광장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시 부족 간의 전쟁도 단순한 외적 충돌이 아니라, 인간 무의식의 심리적 역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가장 중요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이 집단 동일시와 외집단 혐오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집단과 동일시하며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본다. 집단 내부의 결속은 외집단에 대한 배제를 통해 강화된다. 영국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의 개념으로 보자면, 집단은 외집단을 ‘나쁜 대상’으로 분열해 내고 공격성을 투사한다. 부족 간 전쟁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 위에서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부족 간 전쟁은 생존 자원을 둘러싼 현실적 경쟁과 이러한 공격성의 발현이 맞물린 결과다. 외부 집단은 두려움과 동시에 공격의 대상으로 설정되며, 이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 장치가 된다. 오늘날에도 부족 간 전쟁의 심리는 그대로 재현된다.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 종교 집단 간의 갈등, 국가 간 무역전쟁과 지정학적 대립은 모두 현대적 형태의 부족주의라 할 수 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러한 부족주의를 더욱 강화하며, 집단적 혐오와 대립을 확산한다. 갈등이 일상화하는 정치인들은 타협과 협의를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대신, 상대를 물어뜯고 싸우는 과정에서 쾌락과 소속감을 얻는 듯 보인다. 싸움에서 오는 극도의 흥분은 마치 도파민이 분비되는 중독과 같다. 더 큰 자극, 더 심한 갈등을 찾아 헤매게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성적 판단은 마비되고, 오직 ‘우리 편’이라는 소속감만이 중요해진다. 상대방이 더는 토론의 파트너가 아니라, 단순히 파괴해야 할 대상이 된다.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국무총리(한덕수) 탄핵소추안 의결정족수와 관련해 국민의힘 의원들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국무총리(한덕수) 탄핵소추안 의결정족수와 관련해 국민의힘 의원들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대한민국 규정하는 무의식적 트라우마의 충돌

    대한민국 현대사는 두 개의 거대한 사건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하나는 민족 전체를 폐허로 몰아넣은 6·25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를 넘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리며 싸운 민주화운동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보자면, 전쟁과 민주화운동은 집단적 트라우마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형성했다. 공격성, 불신, 분열은 한국 정치 문화의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재현된다. 전쟁의 상처는 분열을, 민주화운동의 상처는 희생의 기억을 강조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정치적 갈등, 사회적 분열, 세대 간 대립은 이러한 트라우마가 무대 뒤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력일 수 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충돌은 상처 입은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외부로 투사하면서 생겨나는, 하나의 무의식적 강박 반복(compulsion to repeat)이기도 하다. 충돌은 트라우마의 발현이다. 억압된 상처는 종종 공격성과 혐오로 전환돼 타인에게 투사된다. 개인 차원에서는 학대 경험이 분노로 치환돼 대인관계 갈등으로 이어지고, 사회 차원에서는 전쟁과 억압의 상처가 정치적 분열로 반복된다.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불안을 ‘나쁜 대상’에 투사함으로써 일시적 안정감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투사는 충돌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한국 사회를 예로 들면, 6·25전쟁의 상처와 권위주의 체제가 남긴 고통이 아직도 집단무의식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분단은 적대적 정치 문화를 낳았고, 민주화 과정의 폭력은 세대와 이념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충돌은 단순히 이해관계의 대립이 아니라, 집단적 트라우마가 재현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단순히 과거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규정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상처 입은 기억은 억압되지만,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꿈, 행동, 대인관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한 사회가 겪은 전쟁, 독재, 차별은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 세대를 건너 전승된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낳은 99대 1 사회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사회 흐름은 바로 극단적인 불평등이다. 부와 권력, 기회의 분배에서 소수의 상위 1%가 압도적 몫을 차지하고, 나머지 99%는 상대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가는 현상이 전 지구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99대 1 사회’라 불리는 이 구조는 단순한 경제적 격차를 넘어,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며 새로운 갈등과 불안을 낳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낳은 이 불균형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구조적 위기다. 

    정신분석적 시각에서 보자면, 99대 1 사회는 대중의 무의식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다수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분노와 좌절을 경험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충동은 사회적 파괴 욕구로 전환되어, 때로는 폭력적 집단행동이나 혐오 정서로 나타난다. 

    반대로 상위 1%는 ‘과잉 동일시’ 속에서 자신들의 성공을 정당화하며,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다. 이처럼 불평등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심리적 구조를 왜곡하는 문제다. 99대 1 사회는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극명한 현실이다. 그 속에서 정치와 사회, 문화와 심리는 모두 불평등의 그림자를 지니게 됐다. 

    코로나19 이후 대한민국 생명력 저하 가속화

    우리 사회의 불안과 갈등을 심화한 요인으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도 빼놓을 수 없다. 팬데믹은 인류의 일상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그중에서도 자살률과 출생률의 변화는 팬데믹이 사회적·심리적 차원에 끼친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많은 나라에서 자살률은 불안정하게 요동쳤고, 출생률은 뚜렷한 하락세를 보였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청년층과 여성,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의 자살 위험은 현저히 상승했다. 한국의 경우 이미 높은 자살률을 기록해 왔기에, 팬데믹은 기존의 위기를 더욱 심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출생률은 팬데믹 동안 전 세계적으로 뚜렷하게 감소했다. 한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합계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는 이 추세를 더욱 가속화했다. 

    자살률과 출생률은 사회의 ‘생명력’을 측정하는 지표다. 자살률 증가는 개인의 고통이 사회안전망에 의해 충분히 흡수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출생률 감소는 사회적 재생산 구조가 약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현상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곧 사회 전체가 ‘소멸 위험’에 직면하고 있음을 뜻한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자살률 증가는 타나토스(죽음 충동)가 사회 차원에서 강화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립과 불안은 개인을 자기파괴적 충동으로 몰아넣는다. 반대로 출생률 감소는 에로스(생명 충동)의 약화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에 대한 욕망이 사회 불안과 부담에 의해 억제된 것이다. 다시 말해, 팬데믹은 인류의 무의식에 깊은 균열을 남겼고, 그 균열이 자살률과 출생률이라는 지표로 드러난 것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자살률과 출산율이 동시에 빨간불이 켜진 특수한 상황에 직면해 ‘생명력이 약해지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9월 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여야 지도부 오찬 회동에 앞서 정청래(왼쪽)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악수하는 모습을 보며 밝게 웃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9월 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여야 지도부 오찬 회동에 앞서 정청래(왼쪽)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악수하는 모습을 보며 밝게 웃고 있다. 뉴시스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진화하라!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는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캐슬린 콜먼 하버드대 고전학과 교수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인간의 새로운 학명이다. 그는 라틴어로 ‘슬기로운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보다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적 갈등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호모 심비우스 즉 ‘공생(共生)하는 인간’으로 거듭날 것을 권유했다. 우리는 현재 호모 사피엔스 진화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기술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신속’ ‘정확’ ‘절제’ ‘효율’로 대표되는 이성의 최고봉에 선 AI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지만,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정치판에선 슬기로움을 잃은 인간들의 승자독식 투쟁만이 가속화하고 있다. 다른 종족과 벌이는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인간의 생존 기술이 이제는 서로를 죽이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공공선이 중추를 이루는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공생의 기술’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잠언까지는 못 지키더라고 적어도 숨을 돌리고 하늘을 보며 자연에게 한없이 겸손해지는 연습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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