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픽쳐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한 지역에서 창작된 음악이 스타일에서 개성과 세련미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 꾸준히 생산되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보편성을 얻는다. 하지만 모든 장르의 음악이 보편성을 얻고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클래식 장르에도 세련되고 아름답지만 결국 국경을 넘지 못한 음악 스타일이 많다. 루이 13세 때 프랑스 궁정에서 유행한 궁정 아리아가 그렇고, 슈베르트의 독일 낭만주의 가곡도 그의 생전엔 빛을 보지 못했다. 특정 언어로 불리는 성악곡이 기악곡에 비해 불리했고, 프랑스의 궁정처럼 폐쇄적 공간과 문화에 특화된 음악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어려웠다.
언어 장벽과 국경 한꺼번에 넘은 이탈리아 오페라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언어의 장벽과 국경을 한꺼번에 넘은 흔치 않은 음악 장르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시기에 활약한 이탈리아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1567~1643)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1660~1725)와 토마소 조반니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1671~1751)를 거쳐 비발디(Vivaldi·1678~1741)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게 된다. 우리에게는 오보에 협주곡으로 유명한 알비노니도 50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비발디도 50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몬테베르디와 알비노니, 비발디는 모두 베네치아에서 활약한 작곡가들이다. 정교한 무대장치를 설치하고 화려한 의상을 준비해야 하는 오페라는 부유한 도시만 감당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유럽의 귀족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이 근사한 무대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이탈리아어로 부르는 오페라는 프랑스 파리와 오스트리아의 빈,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독일 지역의 드레스덴과 뮌헨, 함부르크 같은 부유한 음악 도시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각 도시로 초빙됐고, 이탈리아의 가수와 연주자들도 여러 도시를 오가며 연주 활동을 펼쳤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러시아어를 쓰는 도시에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인기를 얻은 것에는 거의 모든 단어가 아-에-이-오-우로 끝나는 이탈리아어의 모음 체계가 큰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어의 모음은 오페라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극 중 인물들 간의 대화와 독백인 레치타티보(Recitativo·오페라에서 대사를 노래하듯이 말하는 것)마저 음악적으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배워온 많은 가수가 우리나라 가곡을 부를 때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의’나 ‘는’처럼 애매한 모음이나 자음으로 끝나는 단어가 많은 우리나라 가곡을 부를 때 애써 배워온 이탈리아의 발성법을 마음껏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각 나라 언어로 부르는 유사 오페라의 등장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Gettyimage
흥미롭게도 스페인이나 프랑스, 독일 지역같이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자국어로 된 오페라와 유사 오페라가 비교적 일찍 발달했다. 그에 비해 와인이 나지 않는 영국의 런던과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선 19세기에 들어서야 자국어로 된 오페라가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영국의 헨리 퍼셀(Henry Purcel·l1659~1695)이 17세기 말에 ‘디도와 에네아스’(Dido and Aeneas·1689) 같은 뛰어난 영어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그가 사망한 이후 영어 오페라는 오랫동안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신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익힌 헨델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작곡해 공연했다.
문명 교체기, 헨델에게 이어진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수
비발디가 활약한 시기에 정점을 찍은 이탈리아 오페라는 헨델에게로 이어졌다.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로 잘 알려진 비발디의 오페라와 교회음악을 우리나라에서 들을 기회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 ‘일 파르나체(IL FARNACE)’ 2막에 등장하는 ‘파르나체(FARNACE)’의 절규하는 아리아 ‘GELIDO IN OGNI VENA(내 모든 혈관에 차가운 피가 흐르는 걸 느끼네)’, 교회음악인 ‘시편 126편 RV.608 NISI DOMINUS’에 흐르는 ‘CUM DEDERIT(주께서 주시는도다)’ 같은 성악곡을 들어보면 세련되면서도 감각적인 선율과 도발적인 리듬에 깜짝 놀라게 된다. 비발디가 활약한 시기에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가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나온 이탈리아 오페라 가운데 비발디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많이 발굴되고 녹음된 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이때가 몬테베르디 이후 전성기를 구가해 온 지중해 중심의 문명이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려는 영국 중심의 대서양 문명으로 교체되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에서 흔하게 반복되는 일인데, 한 문명이 질 때 음악과 예술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해 질 녘 노을이 길고 아름다운 것과 같다.헨델. Gettyimage
헨델의 오페라는 산업혁명을 앞두고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다지던 영국의 귀족과 상류 계층의 문화적 자존심을 형성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가 만든 수많은 오페라 세리아는 신화와 고대 왕국의 이야기를 진지하고 장중한 음악으로 그려내면서, 당시 영국 사회가 필요로 하던 도덕성과 이상, 지도자의 품격을 무대 위에 구현했다. 패배한 장군의 아내가 부르는 절절한 아리아는 장차 제국으로 발전하게 될 영국에서 귀족들의 애국심과 책임감을 고취했고, 국가가 추구해야 할 정치적 이상을 음악으로 공유할 수 있게 했다.
보편성 획득한 세련된 음악이 마주하는 운명
영국에서 절정을 맞이한 헨델의 오페라세리아와 미국에서 제작돼 넷플릭스에서 성공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사운드트랙은 모두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은 음악이다. 둘 다 타국에서 성공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헨델은 독일 태생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배웠고, 런던에서 오페라세리아의 황금기를 열었다. 헨델은 런던에서 자본가들과 귀족 후원자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성악가와 오케스트라를 고용하고 극장 경영에도 직접 참여하는 프로듀서형 작곡가였다. 그가 운영한 로열 아카데미 오브 뮤직(Royal Academy of Music)은 귀족과 사업가들의 투자금으로 오페라를 제작하는 가장 혁신적 문화 자본 프로젝트였다. 이 투자금으로 헨델은 이탈리아 출신 가수와 연주자들을 런던으로 초청했고, 런던을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지로 만들었다.헨델 오페라 ‘크세르크세스(Xerxes)’ 중 ‘라르고(Largo)’의 악보. Gettyimage
정교한 무대장치를 설치하고 화려한 의상을 준비해야 하는 오페라는 부유한 도시만 감당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Gettyimage
클래식 위상 근접한 재즈처럼, 지속 가능한 장르 되려면
실제로 디스코나 레게, 일본의 J-팝(J-POP) 같은 음악 장르가 한때 지금의 K-팝같이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이 음악을 주제로 수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고, 스타들이 탄생했다. 장국영이나 유덕화의 홍콩영화와 노래가 아시아를 지배하던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많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를 따지기보다는 어떤 음악이 살아남아 아직도 영향력을 유지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20세기 이후 생긴 수많은 음악 장르 가운데 재즈가 클래식 음악이 가진 지위에 가장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국에서 태어나 전 세계적 인기를 얻은 재즈는 최근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고, 각 나라의 전통음악과 융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플랫폼이 되고 있다.재즈가 클래식 음악의 위상에 근접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자. 우선 재즈를 가르치는 정규 음악교육 시스템이 있다. 미국에는 버클리나 줄리아드 같은 명문 대학에서 재즈를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유럽에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독일의 쾰른 음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음악원,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예술대학 같은 재즈 교육기관이 있다. 전문 교육기관이 있다는 것은 재즈의 리듬과 화성, 연주법을 다루는 이론적 기초가 수립돼 있다는 뜻이다. 둘째, 재즈에는 표준곡(Standard)이 있다. 빅밴드와 비밥, 쿨재즈와 모던 재즈 등 다양한 재즈 스타일이 시대 변화에 따라 발전해 왔지만 이 스탠더드 작품들은 각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돼 연주됐고, 그 기록이 음반으로 고스란히 남아 클래식 작품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다. 셋째, 같은 곡을 반복해서 부르고 연주하는 다른 대중음악과 달리 재즈는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곡을 해석해 연주할 수 있는 자유롭고 창의적 공간을 제공한다.
7월 27일 스페인 알무네카에서 열린 ‘재즈 엔 라 코스타 페스티벌’ 공연. Gettyimage
헨델이 활약한 시대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문화 질서가 쇠퇴하고, 대서양을 통한 해상무역과 식민지 확장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은 디지털 네트워크와 미디어를 장악한 기업과 국가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다. 한국인의 문화와 재능으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우리 기업의 자본과 기획 속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장면을 꿈꿔야 할 때다.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
● 저서: ‘미디어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