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며칠 만이라도 ‘누구 딸’로 살아봤으면”

입력 2025.10.22 (10:41) 수정 2025.10.2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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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사는 82살 강순자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제주도에 사는 82살 강순자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

■ 듣고 싶은 그 한마디 "당신은 강상룡의 딸입니다"

제주도 제주시에 살고 있는 82살 강순자 할머니는 2년 2개월째 하염없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강상룡'이란 사람이 존재했고, 당신이 그의 자식이 맞다"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섭니다.

강 할머니는 6살이던 1948년 12월 제주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 폭력에 의해 아버지(故 강상룡)를 잃고 뒤늦게 외삼촌 호적에 조카로 올랐습니다.

4.3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시기를 지나고 가족 관계를 바로잡고 싶었던 강 할머니는 서류상 아버지라도 찾기 위해 2018년부터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주검조차 수습하지 못한 유족에게 유전자 검사를 요구했습니다. 아버지를 되찾으려거든 직접 친자 관계를 증명하란 겁니다.

다행히 4년 전 재판 등 복잡한 절차 없이 국무총리실 산하 4.3 위원회의 결정으로 가족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서 강 할머니에게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갈 길은 멀었습니다. 정정 대상을 확대하는 관련 규칙과 시행령을 개정하고 보증인 등 심사 기준을 수립하는 등 법적 보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정정 신청을 받기 시작한 건 2023년 7월부터입니다. 강 할머니는 그해 8월 곧바로 주민센터로 달려가 가족관계 정정을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강 할머니는 2년이 넘도록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는데도 진행 과정조차 알지 못하는 강 할머니는 막막함을 토로했습니다.

강 할머니는 "아버지가 죄 없이 끌려가 죽으면서 평생을 고아로 살았다"며 "울면서 살다 보니 벌써 80살이 지났는데 국가는 대체 언제쯤 이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느냐"고 울분을 토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일 죽을는지 모레 죽을는지 모르는데, 죽기 전에 '누구 딸'로 며칠 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KBS 제주 리포트 〈“법 개정돼도…마르지 않는 4월의 눈물”〉(2025.04.03.)KBS 제주 리포트 〈“법 개정돼도…마르지 않는 4월의 눈물”〉(2025.04.03.)

■ "부모 찾아주세요" 222건…반년째 멈춰버린 '4.3위원회'

제주 4.3 유족 중에는 강 할머니처럼 혼란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친척이나 남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학살되던 해 태어난 77살 이순열 할머니도, 아버지가 목포형무소로 끌려갔다 행방불명된 79살 이애순 할머니와 79살 김을생 할머니도 아버지의 '딸'의 자리를 되찾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KBS 제주 리포트 〈“나는 77년째 아버지의 조카입니다”〉(2025.03.31.)KBS 제주 리포트 〈“나는 77년째 아버지의 조카입니다”〉(2025.03.31.)

친생자 관계 정정 접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23년 7월부터 현재까지 제주도에 들어온 신청은 222건. 혼인 관계와 양자 관계 인정까지 포함하면 신청 건수는 훨씬 많습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18건이 사실관계 조사 등을 거쳐 제주4.3실무위원회 심사를 통과해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처리된 건 단 한 건도 없습니다.

KBS 제주 리포트 〈“법 개정돼도…마르지 않는 4월의 눈물”〉(2025.04.03.)KBS 제주 리포트 〈“법 개정돼도…마르지 않는 4월의 눈물”〉(2025.04.03.)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4·3위원회가 지난 4월 이후 반년째 멈춰있기 때문입니다.

12.3 내란 사태 여파로 두 달간 위원장이 공석이었던데다, 민간위원 17명 가운데 11명은 지난 7월 임기가 종료됐는데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정부 차원의 4.3 추가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을 심의하고 있는 국회 추천 위원 4명도 오는 25일이면 임기가 끝납니다.

제주도 산하 4.3실무위원회 회의 모습제주도 산하 4.3실무위원회 회의 모습

■ 추가 진상조사 심의도 중단…국무총리실 "위원 위촉 서두르겠다"

첫 진상조사보고서 발간 이후 22년 만에 나온 추가진상조사보고서 초안에 대한 사전 심의도 어제(21일)를 마지막으로 중단됐습니다. 분과위원 7명 모두가 공석이 됐기 때문입니다.

4.3추가진상조사 분과위원회는 결과보고서에 대한 의견서를 달아 차기 분과위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고관용 분과위원장은 "도외 연좌제 피해 등 미흡한 부분을 기재해서 향후 조사의 필요성을 남기도록 했다"며 "추가진상조사보고서가 제대로 완성될 수 있게끔 좀 더 심중한 검토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행정안전부는 오는 12월 국회 보고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중간보고 누락과 위원 제척 사유 등 논란에 이어 위원 공석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지연은 불가피해졌습니다.

위원회 심의를 기다리는 안건은 추가진상조사와 가족관계 정정을 비롯해 희생자·유족 결정 2,000건과 보상금 지급 680여 건. 기다림이 길어지는 사이 친생자 관계를 바로잡으려던 유족 3명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국무총리실 산하 4.3위원회 회의 모습.국무총리실 산하 4.3위원회 회의 모습.

취재진과 만난 행정안전부 4·3사건처리과 관계자는 "예년 같으면 적어도 한 번은 4·3위원회 회의를 열어야 했는데 위촉이 지연돼서 우리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라며 "위원들이 위촉되면 빠르게 심의가 진행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실 국정운영실 관계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유족들이 고령이기 때문에 시급한 상황인 건 인지하고 있다"며 "다만 인사이동과 국정자원 화재 등으로 인해 일이 겹치면서 (위원회 구성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행안부로부터 명단을 넘겨받아 검토하고 있고 국회에도 위원 추천을 요청한 상태"라며 "최대한 위촉을 서두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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