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아름다운 황금 곡선, 이런 논 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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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백의종군로의 임실 슬치 임실 동헌 구간 옛길 걷기
▲ 곡선이 아름다운 맹지 논 자연스러운 곡선 살아 있는 맹지 논. 임실천 옆 병암들. 경지 정리 마다한 옛 어른들의 지혜가 놀랍다.
ⓒ 이소영

지난 21일 오전, 임실문화원에 임실의 옛길을 걷기 위해 참가자 6명이 모였다. 전주천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호남정맥의 고개 슬치로 이동하였다. 슬치에서 조선 시대 임실현 동헌(임실문화원 부근)까지 충무공의 백의종군로를 따라 옛길을 걸으며 역사 문화를 탐방하였다(관련 기사: 임실의 4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를 찾아 걷다).

슬치 고개. 슬치 원래 고갯마루는 현재의 17번 국도 고갯마루에서 북쪽으로 100m 앞에 있었다. 원래 고갯마루 해발 표고보다 5m(추정) 이상 낮아졌다. 슬치의 사라진 옛 고갯마루에서 임실 옛길 걷기를 출발하였다.

17번 국도의 선형 개량과 도로 물매를 낮추는 도로 공사를 거듭해 고갯마루의 지형이 바뀐 것이다. 슬치 고갯마루가 섬진강 쪽으로 100m 이동하여, 섬진강 수계가 그만큼 침식 당하였다. 슬치 고갯마루 부근 건물이 도로에 접근해 있다. 이 건물은 완주군과 임실군 경계에 걸쳐 있어, 건축할 때 허가가 어려웠다고 한다.

▲ 임실 슬치 고개 좌상) 슬치 옛 마루. 현재는 옛날보다 5m(추정) 이상 낮아졌다. (우상) 슬치 옛 고갯마루에서 임실 옛길 걷기 출발 (좌하) 슬치 고갯마루 부근 건물. 이 건물이 완주군과 임실군 경계에 걸쳐 있어, 건축할 때 허가가 어려웠다고 한다. (우하) 슬치 고갯마루. 걷기 일행 앞에 저만치 보인다.
ⓒ 이완우

▲ 충우공통영별로걷기 (좌상) 슬치 고갯마루의 마을 어귀 장승. (우상) 슬치 고갯마루 가까이 보이는 옛 철도 터널 입구. 터널 입구가 고갯마루 부근에 있다는 의미는? (좌하) 전라선 현재 철도 터널의 환기통 건물. 이 긴 터널(6km) 공사할 때 인부나 자재가 출입하는 통로였다. (우하) 관촌면 시장
ⓒ 이완우

슬치 고갯마루 가까이 슬치 마을이 있다. 마을 어귀에 돌 장승 네 기가 서 있다. 가운데 두 기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석상이다. 좌우 끝에 두 기는 기다란 돌기둥 끝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솟대였다.

슬치 고갯마루 가까이 옛 전라선 철도의 폐선 노반이 칡덩굴과 풀숲에 덮여있다. 옛 터널 입구가 시커멓게 깊숙한 침묵의 입을 벌리고 있다. 터널 입구가 고갯마루 한참 아래에 있어야 맞다. 이곳 슬치 고갯마루의 지형이 많이 낮아졌다는 직접적인 증거였다.

옛 전라선 철도 폐선 옆을 농로가 따라간다. 노인 한 분이 수확을 앞둔 볏논에서 갓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갓돌리기는 논두렁 가까이는 콤바인이 접근하기 어려우니 미리 낫으로 벼를 베는 작업이다.

산수유가 줄지은 농로를 한참 걸어갔다. 이제 옛 철도 노반이 농로가 되어 있었다. 전라선 슬치터널(6128m)의 환기통 건물이 보였다. 임실 향토역사탐구가인 김진영씨가 전라선 슬치터널을 뚫는 공사 때 작업 인부와 공사 자재가 터널로 드나드는 중간 통로였다고 말했다. 현재는 터널의 환기구로 쓰이고 있다.

관촌면 시가지로 들어섰다. 옛 오원역참 터를 지났다. 이곳이 예전의 관촌 시장이었고, 일제시대 주재소가 있었다고 한다. 오원천 변 로터리를 돌아서 섬진강(오원천)을 건너는 오원교(도로)를 걸었다. 오른쪽에는 섬진강(오원천)을 건너는 철도 교량을 KTX 열차가 힘차게 통과하여 슬치터널로 들어간다.

섬진강변 콘크리트 집, 정체는?

▲ 충무공백의종군로 (좌상) 옛 오원역참 터. 일제시대 주재소가 있었다. (우상) 오원강변 도로 로터리. (좌하) 섬진강(오원천)을 건너는 오원교(도로). (우하) 섬진강(오원천)을 건너는 철도 교량.
ⓒ 이완우

▲ 충무공백의종군로 (좌상) 섬진강(오원천) 변. 빙고 (우상) 섬진강(오원천) 변. 빙고 (좌하) 섬진강(오원천) 신병암리 마을 꽃길. (우하) 전라선 관촌역앞
ⓒ 이완우

섬진강(오원천) 변에 규모가 큰 콘크리트 곳집의 벽체가 두 채 있었다. 직육면체의 거대한 콘크리트 피라미드(가로 10m, 세로 10m, 높이 8m) 같았다. 일제강점기에 전라선 철도 관촌역의 섬진강(오원천)에 지은 빙고(氷庫)였다. 이곳 섬진강의 맑은 겨울 얼음을 이곳 빙고에 저장하고, 전국으로 열차 수송했다고 한다. 근대 문화 유산으로 지정해도 될 터인데, 관심 밖으로 방치되어 있어 흉물스럽기도 했다.

섬진강(오원천), 전라선 철도와 17번 국도가 서로 만나듯 가깝게 이웃하고 있다. 옛길 통영별로 들녘에 가을 산국화가 노랗게 피었다. 노란 국화꽃 앞에 머무는데, 강물 소리와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소리가 강바람 소리에 섞여서 들린다. 섬진강(오원천) 변의 신병암리 마을 꽃길을 지나서, 전라선 관촌역 앞 사거리에 도착했다.

▲ 임실 섬진강 둔치 산국화 섬진강(오원천), 전라선 철도와 17번 국도가 만나는 옛길 통영별로에 핀 가을 산국화. 강물 소리와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소리가 강바람 소리에 섞여서 들린다. ⓒ 이완우


▲ 섬진강 임실 신병암마을 (섬진강(오원천) 변 신병암 마을의 양철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과 시화.
ⓒ 이완우

섬진강(오원천)을 마당 삼아서, 신병암 마을이 자리 잡았다. 오원천 마실 꽃길이란 안내판이 보였다. 마을 곳곳에 화분이 잘 놓였고, 가을 햇볕에 강변 마을은 하나의 꽃밭이었다. 얼마나 오랜 담벽일까? 낡은 시멘트 블록 담벽이 허물어진 틈에 양철 패널로 담벼락을 세웠다. 그 양철 패널을 운치 있는 민화풍의 그림과 글귀로 장식했다.

섬진강(오원천)을 건너 신평면으로 향하는 제2오원교를 바라보며, 추수를 앞둔 벼들이 물결치는 병암들 황금 들녘으로 들어섰다. 이 농로가 조선 시대 역참로인 통영별로 원형의 옛길이다. 조선 시대에는 이 길이 섬진강의 수로와 습지 옆의 높은 두둑을 따라가는 지형으로 추정된다.

임실 옛길을 걸으며, 김진영 향토역사탐구가는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로 펼치고 있었다. 섬진강(오원천)에 가까운 병암들 너른 들녘은 의외로 경지 정리가 안 되어, 논두렁이 자연스러운 곡선이 많았다. 이곳에서 농사짓던 옛 어른들은 경지 정리를 마다했다고 한다.

들녘을 바라보면 이웃 논을 거치지 않으면, 경운기나 콤바인이 들어갈 수 없는 논들이 눈에 여기저기 띈다. 맹지(盲地, 도로와 맞닿지 않은 토지)이다. 그러나 이 맹지인 논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일정한 질서가 형성된다. 맹지인 논부터 모내기를 시작하여, 농로에 가까운 논에서 모내기를 끝내야 한다. 가을 추수 때에는 순서를 그 바꾸면 된다.

이 들녘에서 옛 어른들은 이웃과 함께 협의하고 서로 도와가며 농사지었다. 이 들녘의 옛 어른들은 이 들녘에 경지 정리를 하면 논들이 서로 분리되고, 함께 일하고 어울리는 풍토가 약해질 것을 염려했던 것이 아닐까? 병암 들녘에서 옛 어른들의 삶의 지혜를 배웠다.

임실천을 건너는 옛 지명 도마교(道馬橋)에 이르렀다. 임실천 냇물을 가로막은 콘크리트 보가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천에 제방이 튼실하게 축조되었다. 백 년 전, 이곳은 섬진강, 임실천과 병암천이 합류라는 곳으로 하천 습지가 넓었을 것이다. 이곳 도마교는 지금의 콘크리트 보의 길이보다 훨씬 길었던 하천 습지의 건너는 험로였을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황금들녘

▲ 충무공백의종군로 (좌상) 섬진강(오원천)을 건너는 제2오원교. (우상) 병암들. 이 농로가 조선 시대 역참로인 통영별로 원형의 옛길이다. (좌하) 병암들. (우하) 병암들에서 용은치로 가는 길목. 임실천을 건너는 도마교. 옛날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콘크리트 보가 있다.
ⓒ 이완우

▲ 임실 곡선 논두렁의 아름다운 논 맹지 (좌상) 곡선이 아름다운 들녘. 맹지가 들녘의 중심이다. (우상) 자연스런 곡선의 논두렁과 농로. (좌하) 한가로운 농로. (우하) 삿갓배미. 가운데 작은 논이 맹지인데 당당하다.
ⓒ 이완우

도마교, 임실천의 보를 넘어서 제방에 올라섰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황금 들녘을 보다니 뜻밖이었다. 농로도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이어졌고, 벼가 익은 논의 논두렁도 이리저리 부드러운 곡선으로 다정했다.

제방이 높아서, 벼 익은 논두렁이 분명하게 보였다. 곡선이 아름다운 들녘. 맹지가 들녘의 중심이었다. 삿갓배미처럼 작은 맹지 논이 당당했다. 예전에는 논 에 둠벙과 들샘이 흔했다. 가을에 볏논 도구치고, 들샘 품어 물고기를 잡았다. 어죽과 추어탕을 끓여 경로 잔치하며, 온 동네가 함께 어울렸다.

이곳 경지 정리를 마다한 맹지 논들이 있는 들녘은 그 정신적 가치나 들녘의 형태로 보아서 국가유산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드론을 띄워 들녘 조감도를 사진 찍으면 좋은 자료가 될 듯하다.

용은치(龍隱峙). 고갯마루에서 멈추어 섰다. 이 고개에는 15세기에 신분제의 벽을 넘으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홍길동전의 작자 허균보다 100년 전에 신분제의 모순으로 야기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남원 출신의 정3품 무관직 관리에게 첩 소생의 총명한 아들이 있었다. 그 무관은 서자인 아들을 적자로 꾸며 과거를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알고, 이 관리를 탄핵하여 파면되었다. 그 관리의 무덤이 이곳 용은치 고개에 있었다고 한다.

용은치를 넘어서 마을 앞의 도로를 걸었다. 오른쪽 냇가 넘어 벼랑이 보인다. 이 벼랑 아래에 옛날의 통영별로 벼랑길이 있었다. 이제는 통행이 없어, 옛길이 흔적도 없다.

▲ 임실 용은치 (좌상) 용은치 어귀. (우상) 용은치 마루. (좌하) 용은치 마을과 임실천을 넘는 교량. (우하) 용은치 마을 옆의 임실천 벼랑. 이 벼랑 아래에 벼랑길이 옛 통영별로였다. 현재는 통행 불가.
ⓒ 이완우

▲ 임실 두곡리 두곡저수지 (좌상) 임실읍 두곡리 두곡저수지 옆길. (우상) 두곡저수지 위에서 본 풍경. (좌하) 두곡저수지에서 향교 고개로 향한다. 백합나무 숲을 지난다. (우하) 향교 고개를 넘어 죽림암 어귀 부근.
ⓒ 이완우

임실읍 두곡리의 두곡저수지 옆을 지났다.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백의종군 길은 이 저수지 바닥의 옛날 계곡을 따라 올라갔을 것이다. 두곡저수지의 풍경을 보면서, 백합나무 숲을 지난다. 운수봉이 멀리 보인다. 운수봉 아래 깊숙한 골짜기에 운수정이란 샘이 있다. 임실현의 별호인 운수(雲水)가 여기에서 기원한다.

향교 고개를 넘으니 죽림암 어귀가 나왔다. 임실읍의 풍경이 눈앞에 잡힌다. 봉황산 아래를 지난다. 봉황산의 서남쪽을 지난다. 봉황산 기슭의 동쪽에 조선 시대에 임실현 동헌과 객사인 운수관이 있었다. 임실 동헌 터를 지나서 임실문화원에 도착하였다.

▲ 충무공 백의종군로 (좌상) 죽림암 어귀에서 임실읍이 보인다. (우상) 봉황산. 임실현의 동헌과 운수관이 봉황산 아래 있었다. (좌하) 임실현 동헌 터. (우하) 임실문화원. 임실현 관아 자리.
ⓒ 이완우

임실의 백의종군로 슬치에서 임실 동헌까지 12km의 옛길을 찾아서 걸었다. 이 구간을 빨리 걷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이야기하며, 6시간 동안 쉬엄쉬엄 걸었다. 옛 어른들의 '맹지 논' 지혜를 찾아내어 보람 되었다.

길을 걸으며 작은 것을 아름답게 보았다. 작은 것들에 섬세한 눈길을 주니, 내가 먼저 아름다워진 듯했다. 따뜻하고 다정한 낮은 마음으로 옛길을 다시 걷고 싶다. 오는 28일에는 충무공 백의종군로 임실 옛 동헌 터에서 오수역참 터까지 걷기로 계획되었다. 벌써 설렌다.

▲ 임실 곡선이 아름다운 논두렁 곡선이 아름답게 소용돌이무늬 이룬 임실 논두렁 길
ⓒ 이완우


덧붙이는 글 | 2025년 10월 21일. 충무공 백의종군로 임실 슬치에서 동헌 터까지 임실옛길걷기모임의 김유미, 김진영, 배순남, 이소영, 이완우, 천정영 함께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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