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등산’에 빠진 관광객들
22일 오전 강원 속초시 설악산국립공원 소공원.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많은 외국인이 신흥사를 거쳐 울산바위로 향하는 등반 코스를 오르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온 나탈리아 소코워프스카(26)씨는 “트래킹을 좋아해 한국 여행 일정 2주 중 4일을 설악산에서 보내기로 했다”며 “블로그에서 본 가을 경관이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입장료를 받지 않아 부담이 없었다”고 했다.
한국 문화를 둘러싼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에 있는 국립공원을 찾는 외국인 탐방객도 늘고 있다. 보통 한나절이면 서울에서 각 지역 국립공원으로 이동할 수 있어, 트래킹에 익숙한 외국인들이 도심뿐만 아니라 국립공원까지 여행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팔공산을 제외한 전국 22개 국립공원을 찾은 외국인 탐방객은 2021년 4만8830명에서 지난해 88만5282명으로 3년 새 약 18배로 늘었다. 같은 기간 내국인 탐방객은 3590만명에서 4065만명으로 약 13% 늘어났는데, 이를 크게 웃도는 것이다. 이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지난해 기준)은 경주국립공원(41만5427명), 설악산(20만3337명), 한라산(12만9705명), 북한산(5만637명) 등의 순이었다.
외국인들이 국립공원을 즐겨 찾는 이유로는 도심 접근성과 무료 입장, 한국만의 독특한 등산 문화 등이 꼽힌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시도마다 국립공원을 하나 이상 갖고 있어 접근이 쉽다. 또 가장 큰 지리산(483㎢)의 경우에도 미국 옐로스톤(8983㎢)과 비교하면 규모가 18분의 1 정도여서 짧은 일정으로 방문해도 여행 계획을 짜는 게 수월하다.
여기에다 지난 2007년부터 내·외국인 입장료가 모두 폐지돼 교통비만 빼곤 금전적 부담이 덜한 편이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성인 기준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를 합쳐 3000원 정도를 내야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공원들이 내국인과 외국인 구분 없이 입장료를 동일하게 받거나, 외국인에게 더 많은 입장료를 부과하는 것과 대비된다.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국립공원의 경우 자국민 입장료가 30달러 정도지만, 외국인에겐 200달러를 받는다.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도 자국민(10달러)보다 외국인(35달러) 입장료가 더 비싸다.
한국인에겐 익숙하지만, 외국인들에겐 생경한 등산 문화도 인기 요인이다. 가령, 북한산·설악산·계룡산 등 6개 국립공원에선 탐방객에게 등산 배낭, 등산화, 스틱, 아이젠 등을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 등산을 마친 후 등산화 먼지 등을 털 수 있도록 구비된 에어건도 신기해한다. 프랑스인 티파니 부샤르(39)씨는 “한국은 국립공원마다 스탬프가 있어서 그걸 모아가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국내 국립공원들이 정상별, 명소별, 대피소별로 등반 난이도를 기재해 코스를 세분화한 것 역시 장점으로 꼽힌다. 한국 방문이 세 번째라는 싱가포르인 진 첸(50)씨는 “국립공원마다 등반 코스에 난도가 표시돼 있어 동선을 다채롭게 짤 수 있다”며 “대부분 2~3일 정도면 가장 높은 정상도 찍고 내려올 수 있어 산을 정복하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를 통하지 않고 지역 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와 국립공원을 찾기도 한다. 양양국제공항은 국제선이 정기 취항하지 않지만, 지난해 중국·몽골 등에서 전세기를 타고 들어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정선·춘천·강릉 등 강원 주요 도시와 설악산 등을 찾았다고 한다. 공항 관계자는 “연말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양양으로 오는 전세 항공편을 총 8차례 운항할 예정”이라고 했다.
설악산 탐방지원센터 관계자는 “최근 20~30명씩 무리 지어 오는 외국인 단체 관광객이 늘어나고, 10월 들어선 전체 탐방객의 절반 가까이가 외국인일 정도”라며 “특히 외국인의 국적이 점점 다양해지는 걸 보니, 한국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일각에선 “외국인 탐방객이 급증하는 만큼, 생태계 보호를 위한 보전 기금 성격으로 최소한의 입장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 유명 국립공원들은 외국인에게 받은 입장료를 재원으로 공원 내 훼손지 복원, 멸종 위기종 복원, 지역사회 환원 등에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