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과 인형 키링의 함수 2편
팬덤 지갑 노리는 수법 다양해
MD 출시 종류 점점 늘어나
랜덤 판매로 중복 구매 유도
처벌 수준 미미해 제재 어려워
규제 방안 아직 없단 점 문제장난감처럼 보이는 인형과 키링이 K-팝 산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캐릭터를 파는 '굿즈 사업'이 엔터사들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굿즈 사업이 결국 팬덤의 지갑을 겨냥한 상술 아니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K-팝과 인형 키링의 함수 2편에선 팬덤은 잘 모르는 굿즈 사업의 이면을 취재했습니다.
서울 홍대·성수 등 사람 많은 동네만 가면 쉽게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가방에 주렁주렁 단 인형입니다. 인형과 키링으로 소지품을 꾸미는 게 MZ세대 사이에서 유행으로 떠오르며 K-팝 시장에도 인형 열풍이 불었습니다.
이 인형을 '한철 장난감'쯤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요즘 엔터사들은 소속 아티스트를 닮은 캐릭터를 제작해 다양한 MD(굿즈·Merchandise)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 캐릭터 사업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만만치 않습니다.
일례로, 올 2분기 SM엔터는 MD 및 라이선싱 매출로 639억원을 거둬들였습니다. 전년(458억원) 대비 39.6% 증가한 수준으로, SM엔터가 2분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 팬덤 지갑 노리는 수법 = 하지만 여기엔 살펴봐야하는 점도 있습니다. 매출이 가파르게 늘어난 덴 엔터사들이 동원한 상술도 한몫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엔터사들이 MD의 종류와 출시 빈도를 늘린 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엔터사들은 단독 콘서트나 월드투어 등 빅 이벤트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는 MD를 출시했습니다. 요즘은 다릅니다. 연중 내내 MD를 팝니다. 아티스트 컴백 전후로 새로운 MD를 내고 공백기엔 팝업스토어를 열거나 컬래버 상품을 발매하는 식입니다.
MD 종류도 다양해졌습니다. 인형은 손바닥 만한 7㎝부터 20㎝, 안고 잘 수 있는 40㎝까지 다양한 사이즈로 나옵니다. 계절이나 테마에 따라 캐릭터 외형이 조금씩 바뀌기도 합니다. 선글라스를 끼거나 파자마를 입은 버전, 태닝한 버전 등이 시즌별로 출시됩니다.
인형만이 아닙니다. 캐릭터 요소를 넣은 보조배터리, 증명사진 홀더, 디퓨저, 퍼즐 등 제품의 종류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숱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MD를 판매하기 위해 판매 회차를 나누기도 합니다. 오프라인 팝업스토어에서 1차 MD를 판매하고 추후 온라인을 통해 2차 MD를 판매하는 식이죠.
이런 상황을 팬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20대 K-팝 팬 오윤서씨의 말입니다. "캐릭터의 인기가 좋으니 엔터사들이 MD를 내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버전이 복잡하고 랜덤도 많아서 매번 사기도 어렵고 지칠 때가 많다."
■ MD와 랜덤의 덫 = 윤서씨의 말처럼, 엔터사들은 MD에도 랜덤 요소를 넣고 있습니다. 일례로, 걸그룹 아이브는 지난 8월 미니 4집을 내며 '랜덤 박스'를 출시했습니다. 각 멤버를 닮은 캐릭터 인형이 들어있는 음반 상품이었는데, 인형은 6종 중 1종이 랜덤으로 들어있었습니다. 불투명한 포장지에 상품을 넣어 직접 뜯기 전까진 어떤 버전인지 알 수 없습니다.
랜덤은 K-팝 산업에서 끊임없이 지적되는 문제입니다. 음반에 포함돼 있는 랜덤 포토카드가 대표적입니다. 포토카드는 아이돌 멤버의 사진이 인쇄된 신용카드 크기의 사진으로, 음반 1장엔 1명의 포토카드가 랜덤으로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멤버 버전을 가지려면 동일 음반을 여러 장 구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소비자원이 2023년 발표한 '팬덤 마케팅 소비자문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팬들은 포토카드와 같은 랜덤 굿즈를 위해 동일 음반을 평균 4.1장, 최대 90장 구매했습니다. 당연히 랜덤 요소에 스트레스를 받는 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K-팝 데이터 분석 플랫폼 케이팝레이더에 따르면 코어 팬(한달 동안 5만원 이상 소비하는 팬·617명) 중 70.2%가 '랜덤 포토카드·럭키드로우(뽑기) 등 랜덤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습니다.
엔터사들이 랜덤을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랜덤 상품은 단일 품목에 비해 판매량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K-팝 이커머스 플랫폼 '케이타운포유'에 따르면, 랜덤이 아닌 굿즈의 판매량은 6000~8000개 수준이었는데 랜덤 상품의 판매량은 4만개가 넘었습니다.
■ 랜덤 사각지대 = 문제는 이같은 랜덤 방식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8월 공정거래위원회는 국내 4개 엔터사(하이브·SM엔터·JYP엔터·YG엔터)를 대상으로 굿즈 판매 관련 제재를 내렸습니다. 굿즈를 판매할 때 환불을 거부하거나 상품 개봉 영상 첨부 등 불필요한 과정을 넣어 소비자의 권리를 제한한 점에 과태료를 부과했죠. 하지만 랜덤 굿즈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포토카드와 같은 랜덤 굿즈의 경우 고시해야 하는 정보를 명시한 법적 조항이 따로 있지 않아서 현행 전자상거래법을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굿즈 수집을 위해 불필요하게 많은 양을 구매하는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별도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해외는 어떨까요? 영국은 랜덤 상품이 들어간 음반을 '오피셜 차트(영국 음악 순위 차트)'에서 집계하지 않는 방식으로 규제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한다면 랜덤으로 구성한 음반을 판매한다면 음악 방송이나 K-팝 시상식에서 음반 점수를 얻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BTS는 영국에서만은 '동일한 포토카드로 구성한 버전'을 따로 발매하고 있습니다.
K-팝 행동단체 케이팝포플래닛은 "팬덤 입장에선 좋아하는 아티스트 관련 음반과 MD를 불매하기 쉽지 않다"며 "엔터사들은 팬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저당 잡아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자! 이제 결론을 이야기해볼까요? 엔터사는 MD 등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하이브는 올 2분기 MD 및 라이선싱만으로 1529억원을 벌었습니다. 같은 기간 SM엔터는 MD를 통해 639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JYP엔터와 YG엔터는 각각 669억원, 19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엔터사들은 팬덤을 볼모로 더 많은 수익을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공정위가 제재를 하고 있다지만, 과태료는 200만~300만원 수준입니다. 더 강한 수준의 처벌이나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우린 언제까지 엔터사들의 '팬덤 장사'를 지켜만 봐야 할까요? 화려한 K-팝의 웃픈 이면입니다.
조서영 더스쿠프 기자
syvho11@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