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경제 항산항심] 쇼핑의 종말, 혹은 거래의 재구성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안병민 열린비즈랩 대표·경영혁신 가이드오픈AI가 최근 공개한 ‘인스턴트 체크아웃’과 ‘에이전틱 커머스 프로토콜’. 단순한 기능 업데이트가 아니다. 온라인에서 가치가 교환되는 방식, 즉 거래의 근본 메커니즘을 새로 정의하겠다는 선언이다. 인스턴트 체크아웃은 사용자가 대화창을 벗어나지 않고 결제까지 완료하는 기능이다. 에이전틱 커머스 프로토콜은 이 과정을 가능케 하는 표준 규칙이다. AI, 판매자, 결제 시스템이 소통하는 방식을 표준화한 이 개방형 프로토콜은, 특정 플랫폼의 통제 없이도 거래가 가능한,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한다. 인터넷 초기, HTTP 프로토콜이 등장해 웹 생태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을 때가 겹쳐 보이는, 구조적 전환이다.

이 새로운 프로토콜 위에서 과거의 성공 공식은 해체된다. 지난 십수 년간 기업들이 숭배해 온 검색엔진 최적화(SEO)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AI는 인간처럼 광고에 현혹되거나 브랜드의 감성적 서사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AI가 원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하고 논리적으로 완결된 정보다. 시장 경쟁의 초점이 ‘답변 엔진 최적화(AEO, Answer Engine Optimization)’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AEO의 세계에서 마케터의 역할은 창의적인 카피라이터가 아니다. AI가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정제하고 구조화하는 데이터 아키텍트가 돼야 한다. 제품의 재고, 가격, 성분, 사용자 리뷰의 긍정-부정 비율 같은 이성적 데이터만이 ‘의미’를 가져서다. 그 외의 활동은 잠재적 잡음 덩어리일 뿐. 경제 권력의 지형을 뒤흔드는 엄청난 변화다.

지금까지 디지털 경제의 주도자는 구글과 아마존, 메타였다. 이들은 사용자의 주목을 자사 플랫폼에 가두는 ‘트래픽 록인(lock-in)’을 통해 광고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가 이 견고한 성벽에 파괴적 균열을 낸다. 소비자가 더 이상 검색창이나 쇼핑 앱을 열 필요 없이, AI와의 대화 한 번으로 원하는 것을 찾고 즉시 결제까지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화형 즉시 거래’ 경험은 기존 트래픽, 광고, 결제 시장의 기반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광고 기반 모델의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경제적 가치의 무게추가 ‘주목과 관심’에서 ‘거래 실행’으로 옮겨가는 거대한 전환이다. 어떤 기업이 생존하고 어떤 기업이 도태될지를 결정하는 새로운 시장 법칙의 탄생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구매 선택은 마트의 상품 진열, 웹사이트의 UI처럼 인간이 설계한 ‘정적(static)’인 환경 안에서 이뤄졌다. 그 설계는 불완전하고 때로는 의도적이었지만, 적어도 공통의 경험이었고,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는 이 패러다임을 파괴한다. AI는 단순히 내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나의 과거와 현재를 기반으로 미래의 욕망을 예측하고 설계한다. 내 건강검진 데이터와 식습관을 분석해 영양제를 추천하고,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 때 명상 앱 결제를 유도한다. ‘맞춤형 쇼핑 비서’가 따로 없다. ‘동적(dynamic)’ 구매 선택 환경으로의 변화다. 기업 전략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 패러다임의 변화다.

전략가의 눈으로 보면, ‘궁극의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구현할 전례 없는 기회다. AI가 고객의 과거와 현재를 기반으로 미래의 욕망을 예측하고 설계한다는 것은, 고객이 무언가를 ‘필요로 하기 직전’에 기업이 선제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객의 삶에 더 깊이 통합되어, 단순한 상품 판매자를 넘어 신뢰받는 문제 해결사로 포지셔닝할 수 있는 기회인 셈. AI라는 편집자가 고객의 삶이라는 텍스트에서 비효율을 걷어내고 최적의 선택지를 제안할 때, 우리 제품 혹은 서비스가 바로 그 ‘최적의 선택지’가 되도록 설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래 비즈니스의 핵심이다.

결국 ‘AI 커머스’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새로운 성공 공식에 맞춰 우리 조직이 제대로 혁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냉철한 질문이다. 이 새로운 질서 속, 데이터와 시스템을 재정비해 시장에서 선택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고 싶다고? AI는 경기의 새로운 룰을 공표했다. 어떤 플레이어로 뛸 것인지, 이제 나와 우리 조직이 답할 차례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