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2000만 원한 갚겠다"… 을사오적 처단 위한 비밀단체

김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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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36) 자신회 사건
금산·진산·회덕·옥천·보은·충청 애국지사 13명 참여
결사대 6개 편성, 이완용·권중현·이지용 등 암살 시도
국권 회복 목표… 거사 실패로 충청 애국지사 3명 사형
자신회의 을사5적 처단 결사대에 참여했던 이경진 애국지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대원 중 유일하게 이경진 애국지사의 묘만 현존한다. 김재근 선임기자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서 매우 조직적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이 1907년 '자신회'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구축하여 자금과 총기를 확보했고, 결사대를 꾸려 암살을 시도했다. 비록 실패하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사형을 받거나 형을 치렀지만 일제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신회 사건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은 30여명 중 13명이 충청 출신이다. 금산 진산 회덕 옥천 보은 출신의 애국지사가 을사5적과 매국노를 처단하는 거사에 참여한 것이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제2차한일협약)을 체결하자 곳곳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관리와 유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충남 홍성에서 민종식, 전북 태인에서 최익현, 경북 영덕에서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늑약은 고종과 조정의 다수 신하가 반대하는 가운데 강압적으로 맺어졌다. 일본은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로 보내 압력을 가했고,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공사관에 불러 찬성을 종용했다. 궁궐과 시내 요소요소에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서며 시위했고, 살기등등한 헌병과 경찰이 궁궐을 드나들었다. 어전회의에는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 참석했는데, 한규설과 이하영은 반대했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5명이 조약에 찬성했다.

나라가 망하자 매국노 을사5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기산도와 그의 동지들이 1905년 11월과 1906년 2월 2차례 처단을 시도했다.

을사5적을 처단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 항일운동을 벌인 자신회 멤버들. 왼쪽부터 이기 나인영(나철) 홍필주 오기호. 자료= 독립기념관


나인영(나철) 이기 오기호 등도 1907년 1월부터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김동필 박대하 이홍래 등과 결사대를 모집하고, 이광수 이용태 등과 거사 자금을 모았다. 이들은 2월3일 200여 명이 참여한 자신회를 결성했다. 취지서와 애국가, 동맹서를 만들고 여러 기관에 보내는 공식문서, 내외국인에게 밝힐 포고문도 작성했다. 이기가 지은 취지서에 따르면 '자신(自新)'은 남에 의해 새로워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새로워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선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여 국권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종학 최상오 박응칠 애국지시가 을사5적 처단에 실패한 뒤 무력을 동원하여 거사자금을 모금했던 충남 금산군 군북면 두두리. 자료=디지털금산문화대전
이종학 최상오 박응칠 3명의 애국지사는 금산군 군북면 보광리에서도 활동을 벌였다. 자료=디지털금산문화대전


이들은 동맹서에서 "이번 거사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오, 2000만 민족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고 적었다. 간신의 목을 베는 글이라는 뜻의 '참간장(斬奸狀)'에서는 "청컨대 결사 의지로 오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소제(掃除 깨끗하게 쓸어 없앰)하면 우리들 및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숨을 쉴 수 있으니…."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자신회는 이광수 성균관 박사, 이용태 전 내부대신, 전인국 전 군수, 윤주찬 농상공부주사, 최익진 궁중 호위국원, 민형식 학부협판, 김연호 전 참봉 등으로부터 자금을 모았다. 이 돈으로 권총 50여 정을 사고, 결사대원 18명을 뽑았다.

자신회 사건 관련 1907년 3월 평리원(최고 재판소)의 재판 기록. 금산 출신의 강상원, 옥천 출신 지팔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시 금산은 전라북도였다. 자료=국가기록원
옥천군의 박종섭, 회덕군(현 대전시 대덕구)의 김경선, 진산군(현 금산군 진산면) 황문숙, 금산군 황성주, 진산군 이경진, 회덕군 조화춘, 금산군 이종학의 이름이 보인다.
진산 최상오, 보은박응칠, 옥천군의 황경오 이름이 적혀 있다. 황경오는 감옥에서 순국했고, 최상오와 박응칠은 이종학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재판을 받은 30여명 중 13명이 충청 출신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호남과 한성(서울)이 주소로 적혀 있다, 자료=국가기록원
충남 회덕군 출신 전덕준은 5년 유배형을 받았다.


자신회는 전국적으로 결사대원을 모집했는 데 충청권에서 13명이나 참여했다. 충남에서는 금산군의 강상원 황성주 이종학, 진산군(금산군 진산면)의 황문숙 최상오 이경진, 회덕군(대전시 대덕구)의 김경선 조화춘 전덕준이 참가했다. 충북에서는 옥천군에서 지팔문 박종섭 황경오, 보은군에서 박응칠이 가담했다. 나머지는 호남과 한성(서울)에 주소를 두고 있다.

충청 출신 결사대원의 연령은 20-40대이며, 강상원 황성주 이경진 지팔문 외에는 거주지 마을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재판기록에 대부분 직업이 농업으로 적혀있고, 김경선과 전덕준은 상민, 조화춘은 객주, 최상오는 주상(酒商 술가게)으로 분류돼 있다. 강상원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최익현 의병 출신이었다. 대부분 대전에서 서태운 박대하를 만나 결사대에 참여했다.

결사대는 당초 이완용 권중현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등 을사5적 외에 이하영과 민영기까지 7명을 처단 대상으로 정했으나 조약에 찬성하지 않은 이하영과 민영기는 제외했다. 그 대신 법부대신 이재극을 더해 6명을 목표로 정했다. 이재극은 고위 관료와 정치사회단체 간부로서 친일에 앞장서 일본 최고 훈장인 욱일대수장까지 받은 매국노였다.

거사는 1월1일, 2월13일 등으로 몇 차례 날짜가 변경됐다. 일제 경찰이 경비를 강화하고, 지방에 사는 결사대원의 상경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자신회은 우여곡절 끝에 거사일을 3월15일로 정했다. 6명을 처단하기 위해 6개의 결사대가 조직됐는데, 박제순은 오기호가 이끄는 결사대, 이지용은 김동필결사대, 권중현은 이홍래결사대, 이완용은 박대하결사대, 이재극은 서태운결사대, 이근택은 이용채결사대가 맡았다. 6개 결사대는 각각 3명씩으로 대원은 총 18명이었다.

당일 아침 6개의 결사대는 각각 지정된 장소에서 매국노들을 기다렸다. 참정대신 박제순이 광화문을 나갈 때 오기호가 사격명령을 내렸으나 총이 발사되지 않았다. 겁을 먹은 대원들이 쏘지 못한 것이다. 위험을 눈치챈 박제순이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군부대신 권중현을 담당한 결사대는 사동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는 권중현에게 발사했으나 맞추지 못했다. 서대문에서 이재극을 기다리던 결사대도 총을 한 발도 못 쏘고 놓쳤다. 결국 을사5적 등 매국노 처단은 모두 실패했다. 농민 출신이 대부분으로 과단성이 미흡했고 제대로 사격술을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이날 충청 출신 중에서 강상원은 권중현 처단 결사대, 김경선은 박제순 처단 결사대, 황문숙과 황성주는 이완용 처단 결사대, 이경진은 이하영 처단 결사대에 가담했다.

거사가 실패한 뒤 결사대와 지휘부인 자신회의 간부들이 대거 체포됐다. 대원들이 체포돼 고문을 당하자 나인영과 오기호 김인식 등 자신회 수뇌부가 4월12일 평리원(대한제국 최고법원)에 자수했다. 결사대원 중에서 윤충하 김영채 이승대는 고문으로 정신을 잃고 뼈가 부러졌는 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1907년 7월 평리원은 이 사건과 관련 30여 명에게 5-10년의 유배형을 내렸다. 지도부인 나인영은 10년, 오기호와 김인식은 5년형이 내려졌다. 충청 출신의 강상원 지팔문 박종섭 김경선 황문숙 황성주 이경진 조화춘은 10년, 전덕준은 5년의 유배형에 처해졌다. 옥천 출신의 황경오는 6월 9일 옥사했다. 이종학과 최상오, 박응칠에게는 가장 무거운 교형(목을 매어 죽이는 사형)이 내려졌다. 이들 3명은 처단에 실패한 뒤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지 20여 명과 총과 몽둥이를 갖고 금산군 군북면 보광리와 두두리에서 금전 등을 빼앗은 혐의로 체포됐다. 3명에 대한 사형집행은 재판 10일이 지난 7월13일에 이뤄졌다. 이들 사형수 외에 유배형에 처해졌던 자신회와 결사대원은 모두 그해 12월18일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자신회를 주도했던 나인영(나철)은 훗날 오기호 이기 김인식 등과 대종교라는 민족종교를 만들어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자신회 사건으로 교형(사형)과 10년 유배형 등 가장 무거운 형을 받은 애국지사는 대부분 충청 출신이었다. 결사대원으로 현장에서 가담했고, 거사를 실패한 뒤 무력을 동원해 자금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치열한 투쟁을 벌였지만 이름 석자 외에는 별로 전하는 게 없다. 농민과 상인 등 출신도 한미했을 뿐 아니라 해방 후 나라에서도 제대로 기록하고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묘소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이경진 애국지사의 묘만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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