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옥(獄)

김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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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선임기자


조선시대에도 옥(감옥)이 있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했다가 목에 칼을 찬 채 옥에 갇혀있는 사극을 보았을 것이다. 목이 들어가도록 판자에 구멍을 뚫은 것을 '가', 나무에 두 개의 구멍을 내어 손목을 채우는 것을 '추', 쇠로 만들어 두 발에 채우는 형구는 '각료'라고 불렀다. 목과 다리를 감는 쇠사슬 '철색'도 있었다. 이러한 형벌 도구는 신분과 죄의 경중에 따라 엄격하게 적용됐다.

옥의 성격은 교도소보다는 구치소에 가까웠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장기간 가두는 곳이 아니라 중앙의 의금부나 형조, 지방의 관아에서 판결을 내릴 때까지 신병을 묶어두는 구금장소였던 것이다.

옥이 구치소였던 것은 형벌제도 때문이다. <경국대전>에 규정한 조선시대 형벌은 다섯 가지이다. 가볍게 회초리로 때리는 '태형', 노처럼 넓적하고 긴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장형', 일정 기간 강제로 일을 시키는 '도형', 멀리 외딴 곳으로 귀양을 보내는 '유형', 목을 조르거나 잘라 죽이는 '사형'을 5형이라 하였다. 요즘처럼 수년-수십년 가둬두는 형벌이 없었기 때문에 옥이 구치소 역할만 했던 것이다. 남녀를 구분하여 가뒀고, 죄질과 신분에 따라 칸막이를 설치하거나 별실을 두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옥에 관한 민원이 존재했다. <세종실록>에는 1493년 세종대왕이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많아지고 다툼이 성하여 옥에서 죽는 일이 예전보다 2배나 늘어났다."며 자책하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는 죄수들이 옥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는 '체옥(滯獄)'을 경계했다. 감옥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추위나 질병으로 판결을 받기도 전에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씨 덕분에 구치소가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구조와 냉방시설, 독방, 수의 등 온갖 것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속옷 차림으로 체포를 거부했고, 김건희씨는 12일 감옥행을 판가름하는 영장실질심사를 받는다고 한다. 나라의 우두머리가 중대한 옥사(獄事)를 일으킨 것도 처음이고, 부부가 나란히 수사를 받게 된 것도 최초의 일이다. 유사 이래 초유의 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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