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돌멩이?" 주머니에서 초코를 꺼냈어.
"얘 이름은 초코야. 소원을 들어 줘."
심장이 쿵쿵거렸어. 눈을 더 크게 뜨고, 놀이터 화단을 다시 살폈어.
'참, 아까 초코랑 미끄럼틀 탔지?'
나는 미끄럼틀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았어. 초코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어.
"데리고 나오지 말걸! 하지만 초코는 산책을 좋아한단 말이야."
걷다 보니 보람 슈퍼 앞이야. 다리가 아파서 빈 의자에 털썩 앉았어. 자꾸만 손에 땀이 났어.
"혼자 집으로 돌아갔나?"
진짜 그랬을지도 몰라. 생각하면 할수록, 초코가 집에 있을 것만 같았어. 나는 집으로 달려갔어. 신발을 훌렁 벗어 던지고 마루에 올라섰어. 할머니가 뉴스를 보고 있었어.
"단우 왔나? 단우야, 태풍이 코앞까지 왔다 카네."
"할머니! 초코 못 봤어?"
"뭐라꼬? 쪼꼬? 쪼꼬레뜨 말이가? 인자 곧 저녁 묵을 시간인데 뭔 쪼꼬레뜨고?"
"아니, 초코! 내 돌멩이!"
나는 답답해서 팔짝팔짝 뛰었어.
"아, 맨날 들고 댕기는 쪼맨한 니 돌멩이? 야야, 길바닥에 널린 게 돌멩인데 무신 호들갑이고?"
"초코는 내 친구란 말이야!"
맞아, 초코는 내 반려 돌멩이야. 여기로 이사 오던 날, 내 앞에 나타난 특별한 돌멩이! 그날 엄마와 나는 할머니 집과 가까운 바닷가에 놀러 갔어. 모래성을 쌓다가 파도랑 달리기 시합을 했어. 달아나는 파도를 쫓아가는데, 발밑에서 뭔가 반짝 빛났어. 처음에는 초콜릿 조각인 줄 알았지 뭐야. 그건 납작하고 네모난 갈색 돌이었어. 크기가 내 손바닥 반만 했지. 한가운데에 금색 줄무늬가 세 개 있었어.
"엄마, 이거 봐요! 보석인가? 예쁘다!"
내가 감탄하자 엄마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코를 톡 건드렸어.
"그러게, 이 예쁜 게 어디에서 왔을까?"
'파도를 타고 먼 곳에서 왔을지도 몰라, 나처럼.'
나는 마음속으로만 대답했어. 그 돌을 집에 가져와 이름을 '초코'라고 지었지.
엄마는 할머니 집에서 며칠 지내다가, 새 직장이 있는 도시로 떠났어. 내가 열 살이 되면 데리러 올 거래. 그러면 다시 엄마랑 살 수 있대. 할머니랑 엄마는 1년도 안 되는 시간이라고,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말했어. 하지만 내 시간은 다른가 봐. 하루하루가 거북이처럼 느리기만 한 걸.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손가락으로 초코를 살살 쓰다듬었어.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어. 초코를 쥐면 손안이 따뜻해졌고 말이야. 초코가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지.
그런데 초코는 진짜 마법 돌멩이일지도 몰라! 지난 일요일에 있던 일이야. 나는 초코를 만지작거리며 무심코 중얼거렸어.
"아, 오늘은 밥 대신 라면 먹고 싶다!"
그 순간, 초코의 금색 줄무늬가 빛났어. 그리고 대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어.
"단우야, 할미가 라면 사 왔다! 오늘 할매 허리가 아파가꼬 간단히 묵자. 괜찮제?"
"우와, 진짜? 진짜야, 할머니?"
"그케 좋나? 사실 내도 라면이 맛나다. 가끔 묵어야겄네! 니 엄마한텐 비밀이다!"
우린 마주 보며 깔깔 웃었어. 할머니가 부엌에 들어간 뒤, 초코를 자세히 보았어. 아까 분명히 금색 줄무늬가 반짝거렸는데, 혹시? 나는 초코의 힘을 시험해 보기로 했어.
월요일에 교문 앞에서 초코를 꺼냈어. 그런 다음 소원을 빌었지.
"오늘은 꼭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
전학 온 지 보름이 넘었지만, 친구를 사귀지 못했거든. 아침 햇빛에 초코의 금색 줄무늬가 번쩍거렸어. 알겠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는 교실에 들어가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어.
'누구일까? 누가 내 친구가 될까? 안경 쓴 남자애? 아니면 저기 단발머리 여자애?'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어. 처음 보는 아이였어. 키가 크고 얼굴도 눈도 코도 동글동글했어.
"니, 전학생 맞제?"
"으, 응……."
"대추나무 집으로 이사 왔나?"
"대추나무 집? 아, 맞아. 우리 할머니 집이야."
"나는 허승준이다. 나도 그 골목에 산다. 옆집이다! 아니, 옆, 옆 집인가? 아니면 옆, 옆, 옆……."
쿡 하고 웃음이 나왔어. 승준이도 따라 웃었어. 승준이는 축구하다 발목을 다쳐서 3주나 입원했대. 수업이 끝나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승준이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댔어. 축구한 이야기, 축구하다 발목을 다친 이야기, 발목을 다쳐 병원에서 깁스한 이야기……. 승준이의 말을 듣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지 뭐야. 승준이가 손가락으로 집을 하나씩 가리켰어.
"하나, 둘, 셋, 넷……옆, 옆, 옆, 옆집이네! 이 정도면 옆집 맞다!"
승준이의 뿌듯한 표정에 나는 또 웃어 버렸어. 승준이랑 헤어진 다음에 초코를 꺼내서 손바닥에 놓았어.
"초코야! 너 진짜 마법 돌멩이 맞지? 소원 이루어 주는 거지?"
초코의 금색 줄무늬는 세 개야. 그렇다면 혹시 소원도 세 개?
'틀림없어! 그러니까 마지막 소원은 진짜 중요한 걸로 빌어야 해!'
나는 초코를 꼭 쥐었어. 손안에서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것만 같았어.
저녁에 대문 밖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어. 승준이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온 거야. 우린 마루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어. 마당에서 대추나무가 바람에 마구 흔들렸어.
"야, 우리 아빠가 선장님이거든? 저번에는 이만큼 큰 물고기를 잡았다."
승준이가 양팔을 쫙 벌렸어.
"저 대추나무 몸통보다 통통했을걸? 근데 눈깔 상태가 너무 메롱인기라. 그래서 할 수 없이! 진짜 할 수 없이 뱃사람들이랑 나눠 무긋단다. 근데 오십 명이 먹고도 남았다 카더라! 신기하제?"
내가 킥킥거리자 승준이가 눈살을 찌푸렸어.
"거짓말 같나? 내 말 못 믿나?"
"아, 아니야. 믿어! 더 신기한 일도 있는 걸."
"더 신기한 일?"
나는 조금 망설였어. 하지만 승준이라면 믿을 것 같았어.
"비밀인데, 나한테 마법 돌멩이 있다?"
"마법 돌멩이?"
주머니에서 초코를 꺼냈어.
"얘 이름은 초코야. 소원을 들어 줘."
승준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랑 초코를 번갈아 보았어.
"진짜야! 초코 덕분에 저번에 라면도 먹고 오늘 너랑 친구도 된 거야! 내가 소원을 빌었거든. 이제 마지막 소원 하나 남았어."
"그니까, 니 소원이 라면 먹는 거랑 친구 생기는 건데 이 돌멩이, 초코가 들어줬다고?"
"맞아! 안 믿어도 상관없지만, 진짜로 진짜야!"
"어쩐지 아까 희한하이 니한테 말을 걸고 싶더라! 니 마지막 소원은 뭔데?"
"음, 여러 개라서 고민 중이야. 그중에 하나는……."
혹시 초코가 내 말을 들을까 봐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어. 그러고 나서 승준이의 귀에 아주 작게 소원을 속삭였지.
"그게 니 소원이라고?"
승준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어. 그때 할머니가 방에서 나왔어.
"승준아, 태풍 온다 카드라. 나댕기지 말고 퍼뜩 집에 드 가라!"
그날 밤엔 오랜만에 꿀잠을 잤어. 친구도 생겼고, 마지막 소원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테니까!
다음날, 나는 드디어 결심했어. 다섯 개도 넘는 소원 중에 승준이에게 말한 그 소원을 빌기로. 그런데 그날 초코가 사라진 거야.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탈 때까지만 해도 틀림없이 같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승준이가 와서 셋이 줄넘기도 했는걸. 그렇지, 승준이! 승준이가 봤을지도 몰라.
승준이네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 나는 조바심이 나서 마당을 서성거렸어. 마당 가장자리에 작은 돌탑이 줄줄이 서 있었어. 엄마랑 산에 갔을 때도 저런 돌탑을 보았지. 어, 그런데…….
"초코?"
가장 작은 돌탑 꼭대기에 낯익은 돌이 보이는 거야. 나는 반가워서 초코를 잡아챘어. 작은 돌탑이 와르르 무너졌어. 그때 뒤에서 벼락같은 목소리가 들렸어.
"야, 니 뭐고?"
승준이가 대문을 지나 씩씩거리며 달려왔어.
"뭐하냐고 물었다!"
"허승준, 네가 초코 가져갔어?"
"그, 그건……."
승준이가 당황한 얼굴로 웅얼거렸어.
"너 왜 초코 가져갔어? 아니, 왜 훔쳐 갔어? 오늘 마지막 소원 비는 날인데!"
내 말에 승준이 눈이 뾰족해졌어.
"그래서 심술쟁이맹키로 돌탑까지 무너뜨린 거가?"
"뭐?"
"시간이 빨리 가는 게 소원이라고? 무신 그런 소원이 다 있노? 내가……얼마나 열심히 쌓았는데! 우리 아빠 무사히 돌아오라고 진짜 열심히……. 근데 그걸!"
승준이가 발을 쾅쾅 굴렀어.
"초코만 가져가면 되지, 왜 내가 공들여 쌓은 돌탑을 무너뜨렸냐고!"
승준이는 이렇게 소리치다가 엉엉 울었어.
"우리 단우 목소리가 들린다 캤더만."
할머니가 승준이 엄마랑 같이 나타났어. 할머니는 승준이를 보고 혀를 찼어.
"어린 게 지 아빠가 억수로 걱정됐나 보네."
"예, 태풍 온다는 뉴스 보고 저러는 거 아입니꺼. 승준아, 걱정 마라. 니 아빠 태풍 피해서 잘 쉬고 있을 기다. 너거 아빠 바보 아이다."
"그럼 왜 연락이 안 되는데? 아빠한테 뭔 일 나믄, 단우 니 책임이다! 니 책임이라고!"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내 입에서도 울음이 터졌어. 할머니가 내 어깨를 감싸고 집으로 향했어.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반질반질한 초코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거야.
"초코야, 내 소원은 말이야……."
말을 마칠 수가 없었어. 코끝이 매웠어. 가슴도 답답했어.
다음 날 아침 일찍, 승준이가 찾아왔어. 눈, 코, 입이 퉁퉁 부어 얼굴이 아주 동그랬어.
"단우야, 미안타. 초코 훔쳐 간 거 내가 잘못했다. 뉴스에서 태풍이 온다고 하니까……. 저번에도 골목 끝 집 삼촌이 큰일 날 뻔했다 카드라. 그래서 우리 아빠도 혹시……."
"진짜로 믿었네."
"뭐?"
"초코가 마법 돌멩이라는 거."
"오십 명이 물고기 한 마리 노나 먹었다는 얘기보단 더 진짜 같지 않나?"
우리는 마주 보며 힘없이 웃었어.
"돌탑 일부러 무너뜨린 거 아니야."
"안다. 내가 억지 부린 기다. 내가 오늘 아침에 우리 집이랑 옆집이랑 골목 돌멩이 싹 모아가, 돌탑을 무지 많이 쌓았거든! 그러니까, 초코 없어도 된다!"
"나도 쌓을래, 돌탑."
나는 승준이네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차곡차곡 돌을 쌓았어. 그 돌탑을 본 승준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어.
"야, 니 왜 초코를……."
튼튼한 돌탑 맨 위에 반짝거리는 초코를 놓았거든.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는걸.
밤새 온 마을에 비바람이 몰아쳤어. 할머니가 꼭 안아 주었어. 하지만 무섭고 걱정이 돼서 잠이 오지 않았어.
다음날은 언제 태풍이 지나갔느냐는 듯이 맑았어. 나는 눈을 뜨자마자 승준이네로 뛰어갔어. 승준이네 마당에 회색 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어. 돌탑이 모두 무너진 거야. 마당에 있던 승준이가 울먹이며 다가왔어.
"단우야! 초코가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몬 찾겠다. 니한테 돌리줄라 캤는데."
그때 집 안에서 승준이 엄마 목소리가 들렸어.
"여보세요! 응, 삼촌. 승준이 아빠랑 통화가 안 돼서 그라는데……."
승준이가 내 손을 덥석 잡았어. 나도 승준이의 손을 꼭 쥐었어.
"그래, 여보야! 와 전화를 안 받노? 마, 우린 다 잘 있다!"
승준이의 눈이랑 코가 갑자기 빨개졌어.
"단우야, 니 소원 내가 이뤄 주께!"
"뭐?"
"내가 니 시간 빨리 지나가게 해 주께! 사실 나도 안다! 병원에 있을 때 시간이 억수로 안 가드라! 근데 축구할 때랑 놀 때는 시간이 빨리 가거든! 내가 니 억수로 재미나게 해 주께. 축구도 하고 바다 가서 놀고. 그래, 초코랑 비슷한 돌멩이도 같이 찾고! 그럼 니 시간도 빨리 갈 끼다."
"야, 숨 좀 쉬고 말해!"
승준이와 맞잡은 손이 따뜻해졌어. 초코를 쥐고 있을 때처럼 말이야. 그러고 보니, 승준이랑 만난 뒤로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갔어. 초코가 우리 소원을 전부 이루어 준 걸까? 초코는 어디로 갔을까? 혹시 다른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려고 떠난 걸까? 정말 그랬을지도 몰라. 다시 만난다면 꼭 말해 줄 거야. 초코야, 고마워. 넌 진짜 진짜 멋진 마법 돌멩이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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