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벅수-임한

이채윤 기자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101호'라고 쓰인 계량기와
연결된 관에 있는 콕을 돌려 가스 공급을 차단했다.
그곳이 잘 보이는 옆집 벽 뒤로 몸을 숨기고 사람이
나오는지 지켜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었다.
의아했다. 지드럭지드럭 못살게 굴어서 버티는 걸
포기하도록 할 작정이었는데 말이다.
뭔가 상대편이 응수를 해야 다음 작전을 펼칠 텐데
맥이 빠졌다.
▲ 김유정문학상벅수
반지하를 포함한 4층 건물에 사는 일곱 세대에는 모두 불이 켜져 있는데, B01호의 창문만 캄캄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칠이 벗겨진 그 빌라 왼쪽으로 돌아 뒤편에서 봐도 B01호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티브이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분명히 집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벽에 전기 계량기가 모여 있는 곳이 보여서 다가가 '101호'라고 쓰인 걸 들여다보니 역시 회전 원판이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지나가던 한 쌍의 남녀가 수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아직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지는데, 돌아보니 길고양이 한 마리가 가로등이 달린 전신주 옆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파헤치고 내 눈치를 보면서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이런 일을 업으로 삼고 전국을 누빈다는 카페지기 전국구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낙찰 후 세 번째 방문인 데다가 이미 소유권까지 취득했으므로 이번에는 나도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다시 건물 앞으로 가서 '101호'라고 표기된 B01호 출입문을 살폈다. 지난번 방문 때 붙여 놓은 포스트잇은 보이지 않았다. 우편함을 보니 비어 있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몇 번 더 세차게 두드리고 덜꺼덕거려 보았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국구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토요일인 다음 날 강남역 인근 커피 전문점에서 서울 남부 지역 세미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지하철 강남역 9번 출구로 나와서 커피 전문점 3층 스터디 룸에 도착해 보니 벌써 회원 10여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참석한 터라 나도 더러 알아볼 만한 얼굴들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스터디 룸 대여비 및 커피값 등에 충당할 회비를 카페지기 전국구에게 건네주고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원래도 스포츠형 헤어스타일을 한 전국구는 이발을 해서 일명 '깍두기'처럼 강한 인상을 풍겼다.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코, 각진 턱에 군살 없는 얼굴, 보통 키이지만 근육질의 단단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발로 뛰어야 하는 일의 특성상 강한 체력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별의별 사람을 다 상대해야 하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내가 전국구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그는 부동산 경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하는 온라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보다 서너 살 어린 사람인데, 40대가 되기도 전에 수십억대의 부를 쌓은 자산가로 소문이 자자했다. 카페에 동영상 강의, 판례, 기사 등 경매와 관련된 자료를 제공하고, 회원들의 질의에 답변도 해 주는데, 정기적으로 전국을 돌며 지역별 세미나도 열어서 회원들의 신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들려주는 실전 경험담은 나 같은 입문자는 말할 것도 없고 경매 고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내가 부동산 경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처음으로 입찰에 참여해 실패한 후, 그 물건 낙찰자를 쫓아가 비법을 묻자, 그녀가 소개해 준 곳이 바로 이 카페였다. 그날로 회원 가입을 했다. 닉네임은 벅수! 카페에 방문하여 게시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받았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난 때에 필적할 만한, 진정한 멘토를 찾은 기분이었다. 눈길을 끈 전국구의 글 중에는 이런 내용을 담은 것도 있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본주의 체제에 던져진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와 그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부터 배우는 게 필수적이다. 자본주의가 뭐냐?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이 이윤 획득을 위하여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 경제 체제다. 다시 말해서 생산 수단을 가진 자본가가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될 수밖에 없는 체제다. 이는 일찍이 아담 스미스가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심만을 위해 살아간다.'고 갈파한 대로 이기심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기심, 자본, 그리고 소유 등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도록 교육받는다. 심지어 무소유를 숭고한 가치인 것처럼 여기도록. 그 결과 체제 부적응자가 양산된다. 속지 마라. 무소유의 지옥을 경험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유의 감옥을 논하는 것은 사치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가 올바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의 철학에 대한 신념이 그를 부자의 반열에 올린 건 분명해 보였다. 신념의 마력은 실로 무서운 거니까. 종교적 믿음처럼 신념도 유무의 문제이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아니니까. 적어도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 최적화된 인간 같았다.

'경매 후반전, 명도!' 그날 배포된 인쇄물에 적힌 제목이었다. 주재자인 전국구가 먼저 강의하고 난 후, 모두가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으로 세미나는 진행되었다. 마침 내게 필요한 내용이라 집중해서 들었다. 책이나 동영상 강의를 통해 공부한 것과 중복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전문가가 들려주는 현장 경험담과 경매에 대한 철학은 금과옥조로 삼을 만했다. 낙찰 주택 불법 점유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게 철칙이라는 전국구의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이사비 정도의 합의금을 주고 원만하게 명도를 마무리하는 게 현명하다고 대부분의 책이나 강의에서 설명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낙화유수라는 닉네임을 가진 회원이었는데, 경매가 자선 사업이 아닌 것은 알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몰인정하게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느냐고 했다. 잠시 썩소를 보이더니 전국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낙화유수에게 쏘아붙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경매판을 어지럽힌다는 걸 명심하세요. 정당한 권리자가 그런 식으로 대하니까 불법 점유자들이 엄연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돈을 요구하는 겁니다." 듣고 있던 낙화유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하이에나처럼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사쇼, 라고 비아냥거리면서. "먼저 부자가 되어라. 그리고 억만장자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라. 가난한 자의 기부는 미덕이 아니다. 꼴값하지 말고 자기 앞가림이나 하도록 해라." 나는 낙화유수의 말보다 이런 전국구의 견해에 더 공감했다. 꼭 나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나는 전국구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말을 청했다. 초보자가 왜 이런 건에 손을 댔느냐, 라고 전국구가 말했다. 하지만 점유자를 제압해서 명도만 성공적으로 해내면 높은 수익을 올리겠다고도 했다. "설사 명도 지체로 금전적 손해를 보더라도 수업료를 낸 셈 치세요. 이 바닥에서는 경험이 곧 자산입니다. 점유자를 괴롭혀야 합니다.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까 버티는 겁니다. 견딜 수 없이 불편하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유리창에 돌을 던져도 봤습니다. 경험에 의하면 불법 점유자는 쉽사리 법적 조치를 취하지 못합니다. 카페에 방문해서 명도 실전 경험을 다룬 글을 참고하십시오." 전국구에게서 어떤 냉혹함을 느낀 나는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법정 스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을지 궁금했다.

법정 스님을 안 것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텅 빈 충만』을 통해서였다. 그 책을 읽고 스님의 사상에 매료되어 그분의 저서깨나 읽었다. 불필요한 세속적 욕망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면 완전한 마음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는 '무소유 사상'은 이후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스님을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현대에 와서 조금 수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소유권 절대의 원칙(사유 재산권 존중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무소유의 정신을 추종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닷컴 버블 붕괴를 지켜보며 대학을 다닌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계열사인 건설 회사에 입사한 나는 회사를 평생 다니는 게 안전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당시 회사 선배는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할 것을 권고했다. 특히 재테크에 대해 조언도 해 주고. "이제 서울에 마지막 남은 미개발지는 마곡지구다. 빚을 내서라도 거기 땅을 사 둬라." 이렇게 권한 그 선배는 1990년대 중반에 상암동에 주목했고, 그 투자 덕분에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고 했다.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맑고 향기롭게 살고 싶었으니까. 무소유 사상을 좇는 사람에게는 부동산 투기 수요로 들끓는 사회가 악취가 진동하는 시궁창 같았으니까. "청약 저축을 들고, 착실히 돈을 모아서 은행 융자 없이 33평형 정도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때 청약할 생각입니다." 선배한테 내가 했던 말이다. 청약 저축 입금 200회를 넘긴 지 오래지만, 33평형은커녕 서울에 있는 웬만한 아파트 3평 값도 못 모았다. 요즘 한창 개발 중인 마곡지구를 보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몇 년 전에 우리 법무실 신입 사원이 마곡지구 아파트를 분양받아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집들이에 가서 들으니 벌써 웃돈이 많이 붙었단다. 김포에서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가 사 줬다고 했다.

내가 대리였을 때 우리 회사는 임직원에게 계열사 제품인 자동차를 강매했다. 내가 구매하지 않자 한번은 부장이 부르더니 인사상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면전에서 무소유 사상까지 들먹이며 대꾸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주차장도 없는 다가구 주택에 세 들어 살면서 차를 소유해 그것의 노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더라도 주차장 있는 집이라도 장만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법정 스님 저서를 읽다 보면 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 마련이었다. 사람 성격이 괴팍해진다고나 할까. 스님을 닮아 가는 거다. 오죽하면 이 꼴 저 꼴 안 보겠다고 심산유곡으로 홀로 들어가 평생 오지 체험을 하면서 살았을까. 회사는 한술 더 떠서 자동차 판매 실적을 고과에 반영하겠다고까지 했다. 건설 회사 임직원이 무슨 자동차 회사 영업 사원이야? 매스컴에 보도가 되어 시끄러워지는 바람에 결국 회사의 방침은 백지화되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승진 연한이 4년인 과장이 되는 데에 나는 1년을 꿇는 고초를 겪었다. 그 부장 차를 타고 단둘이 출장을 가기도 했는데, 운전 경험이 없다 보니 일개 대리인 나를 뒷자리 상석에 앉히고, 부장님이 직접 운전을 해 모시고 다니는 천인공노할 풍경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에 나 같은 벅수가 또 있을까?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없을 거다.

맑고 향기롭게 산 법정 스님을 흉내 내다가 사회생활에서 겪은 고충은 이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집에 티브이, 컴퓨터를 두지 않았고, 핸드폰도 내가 경매 투자를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 누구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이로 인해 두 아들은 친구들에게 놀림도 당한 모양이었다. 물론 신혼집 마련할 때 융자받은 전세금을 상환한 이래 빚도 진 적이 없었다. 불필요한 빚조차 없애는 게 진정한 무소유 사상의 실천이라고 여겼으니까. 그야말로 무소유에의 욕망과 집착이라고 할 만했다. 물건도 돈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나눠 주고. 스님의 삶이야 만인의 칭송을 받지만, 중생의 이런 삶을 주변 사람들(특히 장인 장모)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내가 사는 곳은 산속이 아니니까. 내게는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도 있고.

이 같은 '세상과의 불화, 시대와의 불화'를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된 어느 날, 나는 내 인생을 누가 망쳐 놓았나 하고 가만히 돌아봤다. 바로 법정 스님이 범인이었다. 구실을 찾은 거였다.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를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자양분으로 인식한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과 시련에 대해서조차 관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한 인생들은 피해 의식에 젖어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원망과 회한 속에 살게 된다. 아무튼 '무소유 사상'을 죄목으로 마음속으로 스님을 단죄한 나는 철저히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잃어버린 나의 원초적 욕망, 특히 소유욕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런 전향은 당시 우리 회사 사정과 나의 처지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수년 전 내 고향 마을은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지구가 되었다. 이주 대책에 따라 받은, 얼마 되지도 않은 보상금 등을 밑천으로 시내에서 작은 사업을 해 보려던 아버지는 동업자에게 배신을 당했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가 병원 청소 등을 해서 생계를 꾸렸다. 마침내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양 의무자가 있으니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조차 될 수 없는 부모님은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나는 모아 둔 돈으로 전세방을 얻어 주고, 아버지 치료비까지 감당해야 했다. 매달 보내 주던 생활비도 더 많이 송금해야 했다. 아이들 교육비도 갈수록 늘어나는데, 회사가 구조 조정에 착수하자 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한가하게 무소유 놀음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만 4년 이상 근무한 전 직원!' 2021년 말 회사가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하며 내건 조건이었다. 이미 1년간 '인력 구조 개선 작업'이라는 이름으로 구조 조정을 진행해 왔었다. 신규 수주가 줄면서 주택 부문의 인력을 감축했고, 해외 수주 감소로 플랜트 인력의 이탈도 많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희망퇴직자를 받기로 한 거다. 몇 년간 이어지던 주택 호황이 꺾이면서 선제 대응에 나선 거였다. 이듬해 초 부장대우 진급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회사에서 잘리기 전에 안정적인 수입원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집에 있는 책장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거나 청빈낙도의 삶을 찬양하는 책들을 모조리 버리기로 했는데, 법정 스님의 저서들이 폐기 1순위였다.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그러면서 길바닥에 뒹구는 담배꽁초, 빈 깡통, 휴지, 비닐봉지 등도 줍는 할머니가 생각났다. 가져가기 좋게 책을 열댓 권씩 끈으로 묶어 두었다가, 우리 집 앞 골목을 지나갈 때 할머니에게 전해 줬다. 내가 세상에 베푼 마지막 자선이었다고나 할까?

책장을 재테크와 관련된 책으로 채우고, 나는 특히 부동산 경매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경매도 대중화되어서 너도나도 뛰어드는 바람에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울의 아파트나 지상층 빌라는 낙찰률도 높고 낙찰가율도 지나치게 높아서 차라리 일반 매매 시장에서 급매가로 사는 게 낫다고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곰곰궁리를 한 끝에 반지하 빌라를 주목했다. 돈이 부족한 나에게 알맞은 투자 물건이기도 했지만, 잘만 고르면 장점도 많았다. '임대 수요가 충분한 서울에 있는' 반지하 빌라를 최소한 20채 정도 경매로 취득해서 임대사업자가 되기로 계획을 세웠다. LTV와 DTI 규제 등 각종 부동산 정책이 강화되는 상황이라, 은행 대출이 불가피한 나는 수익 모델을 완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직장을 다니기로 했다. 대기업 직원으로서의 신용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한 거다. 벅수 같지 않게.

이 집은 나의 첫 낙찰 물건이었다. 경매 투자는 자기가 잘 아는 지역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던 터라, 물건을 검색할 때 나는 거주지 근처를 먼저 살펴봤었다. 그러다가 우리 동네에서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나오는 이 빌라를 발견했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응찰했다.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재개발 구역 경계선 바로 안쪽에 포함된 데다가 두 번이나 유찰되어 최저매각가격이 감정평가액보다 많이 낮춰져 있었으니까. 다만 2022년 7월에 낙찰받은 전 매수인이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 실시하는 재매각 사건인 게 걸렸는데, 알아본바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결과는 단독 응찰로 내가 낙찰을 받았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뭔가 불안했다. 내가 모르는 심각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됐다. 경매 정보지를 펼쳐 놓고 권리 분석부터 다시 해 봤다.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대한민국법원 법원경매정보' 사이트에도 접속했다. 현황조사서를 보니, 부동산의 점유 관계와 임대차 관계를 (주민등록표등본이 발급되는 세대주가 해당 주소에 없으므로) 점유자인 임차인의 진술에 의해서 조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점유 부분은 B01호 전부이고, 점유 기간은 2020년 9월 5일부터 2년이었다. 보증(전세)금은 3,000만 원이고. 확정 일자는 2020년 8월 3일인데, 문제는 전입 일자가 '미상'이었다. 2007년에 설정된 근저당권 실행을 위해 2021년 10월에 임의 경매 신청을 한 은행보다 어차피 후순위 임차인이라, 입찰 전 권리 분석 때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부분이었다.

나는 법원에 가서 최고가매수신고인이라고 말하고 임차인의 권리신고서, 주민등록표등본, 그리고 임대차계약서 등을 복사 신청했다. 서류를 살펴본 나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임대차계약서에는 부동산의 소재지가 B01호로 기재된 데 반해 주민등록표등본에 적혀 있는 주소는 101호인 거였다(전입 일자는 2020년 9월 7일).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펼치고 판례를 확인했다. "다세대 주택 건물의 임차인은 건물의 소재지뿐만 아니라 '호수까지 특정한' 주민 등록 전입 신고를 마쳐야만, 제3자가 임대차 건물에 주소를 가진 임차인이 등록되어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어, 주택임대차보호법상의 대항력을 갖는다."

분석 결과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명도 협상을 위해 낙찰받은 빌라를 찾아가서 점유자를 만나 보기로 했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정장을 갖춰 입고. 다 책에서 배운 거다.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포스트잇에 내 전화번호를 적고 '낙찰자입니다. 연락 바랍니다.'라고 써서 현관문에 붙여 두고 왔다. 전화를 기다리다가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도 점유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전번 포스트잇이 안 보여서 또 붙이고 왔다. 역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임차인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내가 주택 소유권을 취득한 후에 연락하기로 하고 계속 탐색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일단 대금을 지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수할 권리도 없고, 임차인도 배당을 요구했기 때문에 명도에 어려움이 없어 보였으니까. 내 명도확인서가 있어야만 임차인은 배당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2022년 10월 말에 대금 지급을 완료하자, 법원에서 확인한 후 11월 말로 배당 기일을 잡았다. 나는 인도명령과 점유이전금지가처분 신청부터 했다. 그런 다음 빌라를 또다시 방문했던 거다.

법원에서 점유이전금지가처분 결정문과 인도명령 결정문이 도착했다. 그래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봤더니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임차인에 대한 배당배제 신청이 되어 있었다. 비록 후순위이지만 소액 임차인으로서 최우선 변제를 받게 되면 그 1,600만 원만큼 손해를 보게 된 선순위 은행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임차인이 배당을 받아야 명도가 용이한 만큼 이는 나로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즉시 임차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차인은 다급했는지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듯하더니, 내가 배당배제 신청이 되어 있더라고 말하자 하소연하듯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차에 마침 전세금이 매우 싼 전용 면적 18평 집이 있어서 계약했고, 소개해 준 부동산 중개사가 보증금 떼일 걱정은 말라고 했다고. 그런데 자기가 전입 신고를 하면서 호수를 착각했다고. 집 현관문에 '101호'라고 표기되어 있고, 그 빌라 거주자들도 통상 그렇게 부르며, 언덕 위에 지어진 빌라다 보니 뒤쪽만 땅에 조금 묻혀 있을 뿐 현관 입구 쪽에서 보면 1층 같고, 그래서 주소를 B01호가 아니라 101호로 기재했다고. "계약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중개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겠군요." "그러니까 환장할 노릇 아닙니까? 전세금은 마지막 남은 내 전 재산인데······." "아무튼 배당 기일에 출석하셔서 사법보좌관에게 중재 요청을 해 보세요. 은행 측에도 사정을 봐 달라고 말씀하시고요."

나는 지체 없이 관할 법원 집행관 사무실을 방문해서 점유이전금지가처분 집행 신청을 했다. 일주일 후인 금요일 오전에 집행관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 다음 주 월요일 오후 3시 30분에 집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안내받은 연락처에 전화했더니 열쇠공이 키의 종류에 따라 비용은 10만 원 내지 15만 원이 든다고 했다. 집행 당일 내 지인인 증인 두 명(경매 학원 동기와 단골 세탁소 주인)과 함께 30분쯤 전에 현장에 도착하니, 집행관 두 명과 열쇠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행관이 두 번이나 초인종을 누르며 집행하러 왔다고 말해도 안에서 인기척이 없었다. 지시받은 열쇠공이 문을 여는 동안, 집행관은 증인 두 명과 내 신분증 등을 확인하고 내게서 (배당배제 신청 후에 주소가 B01호로 변경된) 임차인 주민등록표초본도 접수했다. 문이 열리고 집행관을 따라 증인 두 명과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거실의 불을 켠 집행관이 잠시 둘러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약봉지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 학교에서 돌아온 중학생 남자아이 하나가 현관으로 들어서며, "누구세요?" 하고 소리쳤다. 집행관이, "학생, 이 집에 살아요?" 하고 물었다. "네. 근데 아빠가 아무한테도 문 열어 주지 말라고 했어요. 나가세요." 집행관이 아이에게 확인한 결과 임차인이 사는 집이 맞았다. 방 안에서 소리가 나서 학생한테 누가 있는지 물으니, 아파서 누워 지내는 할머니라고 했다. 방문 목적을 아이에게 설명한 집행관은 잘 보이는 거실 벽면에 '알리는 말씀'과 '고시'라는 제하의 서류들을 붙였다.

1월 정기 인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입사 3년 만에 대리로 진급한 때를 빼고는) 과장, 차장 승진 때도 한 번씩 물을 먹어서 각각 5년이 걸렸는데, 역시 승진 연한이 4년인 부장대우가 되는 데에는 연거푸 두 번이나 대상에서 누락됐다. 경매를 통한 안정적인 현금 흐름 수익 모델을 구축할 때까지는 회사에 다녀야 하는데, 구조 조정이 한창인 사내 분위기를 감안하면 충격적일 수밖에. 마음을 추스르고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안쪽 전무실에서 나오던 전무 이사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나직이 지껄였다. "무소유!" 오랜만에 들어 보는 소리였다. 예전에는 내 별명처럼 부르곤 했지만, 한동안 그렇게 칭한 적이 없었다.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내 눈에서 불꽃이 튀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게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부장 시절 대리인 나를 상석에 태우고 직접 운전대를 잡고 출장을 다니던, 지금은 인사실, 총무실, 그리고 우리 법무실이 속한 경영지원본부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전무를 바닥에 때려눕히고 밟아 버릴 뻔했다. 처음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아니다. 우리 회사는 해마다 창립 기념일에 우수 임직원을 포상하는데, 내가 대리로 진급한 해에 당시 부장이던 그는 나를 추천했으니까. 일을 야무지게 한다고 칭찬도 해 주고.

울분은 종종 엉뚱한 데로 향하게 된다. 그날은 청명한 봄날이었다. 금요일 오후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봄비가 이튿날 오전까지 이어지더니, 정오쯤 말끔히 개었다. 모처럼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터라, 곧바로 점유자를 만나러 갔다. 사실 배당에서 임차인이 제외된 걸 확인한 후, 명도가 쉽지 않겠다고 여겨져 마음의 준비는 했었다. 그동안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내용 증명을 보내도 묵묵부답이어도, 엄동설한에 딱한 처지를 생각해서 기다려 줬다. 하지만 설 명절도 지났고 이제는 끝을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고, 잔금을 치르기 위해 빌린 대출금에 대한 이자가 매달 꼬박꼬박 나가고 있었으니까. 아직 공기가 차가웠다. 긴장한 탓인지 몸이 떨려서 가는 길에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질러 댔다. 심호흡을 한 후 초인종을 눌렀다. 백 번도 더 눌렀을 거다.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당신?" 제법 덩치가 큰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잘생긴 풍채로 봐서는 그런 누추한 곳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눈이 충혈되고 어딘가 지쳐 보였다. "이 집 낙찰자입니다.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으셔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나한테 전화한 사람이 당신이야? 그래서요?"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전세금은 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야. 그걸 모두 받기 전에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소. 병든 노모를 데리고 어디로 가란 말이오?" "보증금을 반환해야 할 책임은 전 소유자인 임대인에게 있습니다. 저와 선생님 사이에는 아무런 법률행위를 한 일이 없어요." 이렇게 차분히 설명을 해 줘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무조건 보증금을 전부 되찾아야겠소. 예전에도 낙찰자라고 찾아온 사람이 있어서 내 뜻을 분명히 전했소. 내가 돈을 잃은 만큼 당신은 이득을 볼 거 아냐?" 전 낙찰자가 대금을 미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냉정하고 단호한 어투로, "저는 한 푼도 드릴 수 없습니다. 집을 안 비워 주시면 강제 집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께도 인도명령 결정문이 송달된 걸로 압니다. 바로 집행 신청을 할 수도 있겠으나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대화로 해결하고 싶어서입니다. 집행이 시작되면 집행관이 불시에 들이닥치게 될 텐데, 자식 앞에 험한 꼴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말씀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주방으로 가 식칼을 가져오더니 내게 겨누며 소리쳤다. "맘대로 해 봐, 이 씨팔놈아! 내가 죽기 전에 이 집에서 나가나 봐라." 악에 받친 그의 얼굴을 보니 일단 물러서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끝까지 차분한 목소리로, "후회하실 겁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허청거리는 두 다리로 골목을 빠져나오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우스워 보이는가, 당신들!'

그날 저녁 일찌감치 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를 들고. 낮에 겪은 일을 생각하니까 빈손으로는 못 갈 것 같았다. 빌라에 다시 도착했을 때 사위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 폐지 줍는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가고 있는 게 보였다. 사는 곳이 그 근처인 모양이었다. 아내의 전언에 의하면, 내가 책 꾸러미를 준 뒤부터 할머니가 몇 차례 우리 집 앞에서 한참씩 서 있다 갔다고 했다. 나는 어두운 앞쪽 창문을 먼저 살핀 후 살금살금 뒤로 돌아가 집 안의 동태를 엿보았는데,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가스계량기가 모여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101호'라고 쓰인 계량기와 연결된 관에 있는 콕을 돌려 가스 공급을 차단했다. 그곳이 잘 보이는 옆집 벽 뒤로 몸을 숨기고 사람이 나오는지 지켜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었다. 의아했다. 지드럭지드럭 못살게 굴어서 버티는 걸 포기하도록 할 작정이었는데 말이다. 뭔가 상대편이 응수를 해야 다음 작전을 펼칠 텐데 맥이 빠졌다. 그때 골목에 주차된 트럭 뒤에서 길고양이 두 마리가 기어 나오더니 전신주 옆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퉜다. 까닭 없이 전의가 되살아난 나는 건물 옆 시멘트 바닥에 있는 수도 계량기를 향해 걸어갔다. '101호'라고 쓰인 보호통 뚜껑을 열었는데, 계량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스티로폼 조각과 헌 옷가지 등이 안에 가득했다. 겨울철의 동파 방지를 위해서 넣어 둔 거였다. 하나하나 끄집어내자 계량기가 보였다. 옆에 있는 밸브를 잠갔다. 흩어져 있는 헌 옷가지와 스티로폼 조각 등을 도로 쓸어 넣고 보호통 뚜껑을 닫았다. '이래도 안 나와?' 속으로 뇌까리며 다시 옆집 벽 뒤로 가서 숨었다. 가면서 보니 길고양이는 한 마리만 남아서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이번에도 임차인은 움직임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 그러고 있다가 내가 버티기가 힘들어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만나서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찾아갔는데, 임차인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야구 방망이로 길바닥을 쿵쿵 찍어 대며 건들거리면서 돌아왔다. '그러게 전입 신고를 똑바로 했어야지. 다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는 판국에, 몇 푼 안 되는 자기 재산도 지키지 못하는 등신 같은 새끼야!'

일요일인 다음 날 점심을 먹고 또 찾아갔다. 가스도 수돗물도 모두 차단된 상태 그대로였다. 창문을 기웃거리다가 현관문으로 다가가는데, 가족 나들이를 가는지 위층 계단에서 사람들이 내려왔다. 젊은 부부에게 물었다. "어제 오후나 오늘 오전에 혹시 이 반지하 101호 사람들 이사 갔습니까?" 자기들이 그 전날부터 계속 집에 있었는데 그 빌라에서 이사한 세대는 없었다고 했다. "어제 낮에 고함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남자가 내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묻는 바람에 나는 당황하여 야구 방망이를 뒤로 감추면서 "그냥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라고 대답했다.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는 전기 계량기가 생각나 부리나케 달려갔다. 회전 원판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건물 앞쪽으로 와서 초인종을 누르고 손바닥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수십 번 되풀이해도 안에는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핸드폰으로 임차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제 집행 외에는 별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월차 휴가를 내고 법원에 들러 담당계에서 인도명령 결정문 송달증명서를 발급받아 집행관 사무실에 강제 집행 신청을 했다. 전국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집행까지 가는 경우는 열 건에 한 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집행 비용을 예납한 후 최종 담판을 짓기 위해 점유자를 만나 보기로 했다. 비용까지 예납한 영수증 사본을 건네주면서 압박하면 해결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사실 말이 좋아 강제 집행이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어디 한둘인가 말이다. 이 건처럼 환자가 있는 경우에는 병원 입원실을 예약해야 하는 일도 있을 수 있고.

그 주 토요일 오전에 방문했는데, 다른 때와 달리 현관문에 전단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우편함을 살펴보니 각종 고지서 등 우편물이 쌓여 있고. 그중에는 홍성경찰서장이 보낸 '위반사실 통지 및 과태료부과 사전통지서'도 있었다. 10여 일 전에 예산에서 운전하다 신호 위반을 한 모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임차인이 이사를 간 듯해서, 집행 비용도 아낄 겸 문을 따 보기로 하고 돌아왔다. 주거침입죄 등이 문제될 수 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점유이전금지가처분 집행 때 문을 열었던 열쇠공에게 연락해서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증인 두 명을 다시 불렀다.

이튿날 오전에 현장에 도착해 보니 전단지도 그대로 붙어 있고 우편함 상태도 변화가 없었다.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무슨 비명이라도 질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임차인이 썰렁한 거실 벽에 박힌 못에 매달린 채 툭 불거진 눈을 하고 현관문 쪽을 노려보고 있는 거였다. 검은 혀가 길게 삐어져 나와 있고. 순간 악취가 확 풍겨 손으로 코를 막았는데, 그제서야 내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신경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방문이 반쯤 열려 있는, 현관 왼쪽에 붙은 방으로 눈길을 주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아이 하반신 아래로 검게 변한 피가 굳어 있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둘러보니 거실 바닥에도 검은 핏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형광등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두꺼운 커튼이 창문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고. 증인으로 따라온 내 단골 세탁소 아저씨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바람에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고, 내가 전화를 걸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이 출동해 도착한 건 15분쯤 후였다. 현관문에 폴리스 라인이 쳐지고 경찰 과학수사대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증거를 수집하고 시신을 수습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뒤엉킨 골목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내가 본 두 구 외에 안방에서 흉기에 가슴이 찔린 할머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경찰관은 최초 발견자이자 신고자인 나를 비롯해 증인으로 참관한 내 지인 두 명과 열쇠공을 경찰차 두 대에 나눠 태웠다. 경찰차는 구청 옆에 붙어 있는 경찰서에서 멈춰 섰다.

연일 일간지 사회면에 보도되었다. 당시 현장에서 짤막한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생활고 등을 토로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외부 침입에 의한 타살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보고, 하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를 시작했다. 외부 폐쇄 회로 티브이와 주변인 진술 등을 통해 사건 경위를 파악했다. 사망 전 마지막 행적 등도 조사했다. 나도 다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특히 시신 발견 일주일 전 토요일, 일요일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 사건 현장에 방문한 이유를 해명해야 했다.

시신 발견 사흘 뒤 경찰은 정확한 사망 시기와 원인 규명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이튿날 오전 8시쯤부터 부검을 진행했다. 부검의는 한 명은 목맴에 의한 질식, 나머지 두 명은 자창에 의한 과다 출혈이 사망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1차 구두 소견을 내놨다. 정밀 부검 결과는 그로부터 열흘 뒤에 나왔다. 극단적 선택 외에 더 이상 추가 범죄 혐의점이 없고, 발견되기 일주일 전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는 종결되었다.

소식을 들은 전국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아는 진도 씻김굿 무당을 소개해 줄 테니까, 망자를 위해 굿이나 한번 해 줍시다." "흉가로 소문나서 임대도 안 될까 봐 걱정인데, 아주 광고를 해서 저까지 죽일 작정입니까?" "임대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어차피 재개발 구역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일 하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도 겪게 됩니다. 액땜한 셈으로 치세요. 마음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벅수님!"

굿은 4월 둘째 주 수요일 오전에 열렸다. 벚꽃 축제가 한창일 때였다. 전국구가 소개해 준 무당이 택일했다. 토요일을 원했던 나는 할 수 없이 월차를 냈다. 바로 전 주말에는 빌라에 들러 세대마다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팔자에 없는 굿주가 된 나는 무당에게 미리 돈을 주어 굿상을 차리게 했다. 무당은 준비를 철저히 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골목이 북적거렸다.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거실 가운데에 앉아 있다가 적당한 때를 봐서 밖으로 나왔다. 알아듣기 힘든 무당의 넋두리가 이어지는데 꼭 나를 원망하는 소리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도 할 겸 자리를 함께해 주러 와 있던 전국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폐지 줍는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와 팔을 잡으며, "굿주 노릇을 하는 걸 보니 이 집을 산 사람이 이 양반이었구먼." 하고 말했다. 겸연쩍어서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자, "너무 안됐어, 힘들게 살았는데." 하고 덧붙이며 혀를 끌끌 찼다. 전에 살던 사람들과 잘 아는 사이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잘살았는데 꽤 크게 하던 사업이 망해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이삼 년 전에 노모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이 집으로 이사 와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어. 마누라는 집을 나가 버렸고. 노모는 폐지를 수집하다 나랑 아는 사이가 되었는데, 재작년 말에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집에 들어앉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증을 보였고. 없이 살아도 예의 바르고 선한 사람들이었어." 할머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나는, "저희 집 앞에 몇 번 오셨다고 들었는데······." 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할머니는, "참, 내가 돌려줄 게 있어. 우리 집이 여기서 가까워. 내 얼른 다녀올게." 하면서 종종걸음을 치며 사라졌다. 전국구가 누구냐고 묻길래, 이 동네에서 폐지를 주워 파는 할머니라고 했다.

굿이 한창 무르익었는지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안을 좀 살펴보려는데,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가와 명함을 건넸다. "이 아래 버스 정거장 옆에 있는 박사부동산입니다. 연락 한번 주십시오, 사장님!" 나는 받은 명함을 잠시 들여다본 후 윗도리 안주머니에 넣었다.

어느새 할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책 꾸러미 둘을 실은 카트를 끌고 다시 나타났다. "이걸 전해 주려고 내가 몇 번을 찾아갔는지 몰라. 이 귀한 걸······ 전에 나한테 줬던 법정 스님 책들이야." "이걸 왜요, 할머니? 필요 없는 책이라 드린 건데요."라고 묻는 내게 할머니는, "이 양반아! 내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버려도 되는 책인지 아닌지는 알아. 스님 가시고 나서 유언에 따라 절판되어 이 책들 이제 구하기도 힘들어. 이 카트에 실은 채로 집에 가져가." 하면서 반강제로 손잡이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전국구가 책 묶음을 살펴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벅수님! 제가 '맑고 향기롭게' 후원잡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그날 굿을 마무리했다.

성북동 인근에 관심을 끄는 경매 물건이 셋 있어서 임장 활동을 나갔다. 굿을 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길상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었다. 강연을 듣기 위해 법정 스님 생전에는 자주 찾았었는데 말이다.

스님이 발족한 시민 모임인 사단 법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으로서, 5월의 도심 속 길상사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정든 옛집에 온 듯 내 마음도 편안했다. 극락전 앞은 물론 경내 곳곳에 색색의 연등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작은 개울 건너편에 있는 아담한 사당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오늘의 길상사가 있게 한 김영한 보살의 영정이 있는 곳이었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서 확인해 보니, '경매의 꽃, 수익!'이라는 주제로 그 다음 토요일 오후 2시에 강남역 인근 커피 전문점에서 세미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군데군데 자리 잡은, 대원각 시절에는 기생들의 숙소였다는 자그마한 요사채들을 바라보며 개울을 따라 올라갔다. 길상사 끝자락에 있는 진영각에 다다랐는데, 그날은 방문이 닫혀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들 곁에 나도 걸터앉았다. 담장 너머 싱싱한 초록빛 경내가 내려다보이는 마당에 서서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여자가,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작은 돌탑 앞에서 합장한 후 나갔다. 법정 스님의 유골을 모신 곳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나 혼자 앉아 있는데, 별안간 카랑카랑한 스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뭣 하러 찾아왔어?" 순간 놀라 뒤를 돌아봤다. 다시 마당으로 고개를 돌린 후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스님이 그리워서요." "다 부질없는 인연이야. 훌훌 털어 버리시게." "미운 정은 정이 아니랍니까? 제 인생을 망가뜨려 놓았는데 어찌 스님이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말 없는 스님을 뒤로하고 마당을 거닐다가, "스님, 저 이만 갑니다." 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또 들리는 거였다. "부디 속지 말고 사시게!" 돌아보니 돌탑 뒤에 탐스럽게 핀 황매화 위를 꿀벌이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끝>

*벅수 ⓵ '장승'을 달리 이르는 말. ⓶ '멍청이'의 방언. ⓷ '북'의 방언. 여기서는 ⓶의 뜻으로 쓰임. 

#임차인 #전국구 #할머니 #집행관 #무소유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