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창성의 인문학 산책] 사인(士人) 권필(權鞸)

남궁창성 기자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1611년 광해군 3년.

임숙영(任叔英·1576~1623년)이 대책시(對策試)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과 내용으로 왕의 질문에 답했다. 외척의 횡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관작(官爵)이라는 것은 국가의 공적인 기구이며 제왕의 중요한 권한이니, 어진 이를 우대하고 덕있는 이를 명하는 터전이며 정사를 베푸는 기반입니다. 비록 존비에 순서가 있고 경중은 같지 않으나 각각 맡은 직책이 있어서 국가의 여러 업무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관(官)은 크나 작으나 반드시 그에 맞는 재능을 천거하고, 작(爵)은 높으나 낮으나 반드시 그에 맞는 능력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을 따르고 사를 없애는 사람이 없습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을 비교해 임용하고, 벼슬하는 사람은 재물의 있고 없음을 헤아려 천거하는 근원을 삼습니다.

더구나 후비의 친척과 후궁의 족속은 은택을 희망하고 녹리를 간구하느라 밖으로는 임금의 외척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위세를 떨치고, 안으로는 궁궐의 세력을 끼고서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임명장이 내려지기도 전에 '아무개는 중전의 친척이고, 아무개는 후궁의 족속이다. 지금 아무 관직이 비었으니 반드시 아무개가 될 것이고, 아무 읍에 수령이 비었으니 반드시 아무개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 말과 부합되지 않는 적이 드뭅니다. 그럼에도 전조(銓曹)가 금하지 못하며 대간이 논쟁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공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급선무로 삼으실 일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시험 감독관이 높이 평가해 병과에 급제시켰다. 그러나 광해군이 같은해 3월17일 대책문을 보고 격노해 이름을 빼도록 했다. 당시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1564~1623년) 등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임숙영이 비판하자 왕이 미워해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한 것이다.

사신(史臣)은 이날 조선왕조실록에 글을 남겼다.

"국가가 망함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충직하고 곧은 말을 비방이라고 여겨 책망하고 삭제의 벌을 내렸으니 위태롭고 망하는 화란이 아침 저녁에 닥치더라도 누가 말을 하여 자기 몸을 위태롭게 하겠는가? 이같이 하고서도 망하지 않는 자는 드무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임진왜란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과 석주 권필의 꿈 이야기 등이 전해지는 광주 북구 소재 취가정(醉歌亭)의 모습
이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인(士人) 석주(石洲) 권필(權鞸·1569~1612년)이 이 사건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임숙영의 삭과 소식을 듣고서'.

'궁궐에 푸른 버들 가득하고 꽃잎은 어지러이 날리는데(宮柳靑靑花亂飛) / 성안의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떠네(滿城冠蓋媚春輝) // 조정에선 입 모아 태평성대의 즐거움을 노래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 누가 포의의 입에서 위태로운 말이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시가 화제가 되니 '궁류(宮柳)'라는 두 글자에 대해 사람들은 외척 유가(柳家)로 여겼다.

역린(逆鱗)을 자초한 권필은 누구란 말인가?

1601년(선조34년) 10월 1일 중국 황제가 사신을 파견해 황태자 책봉조서를 보냈다. 조정은 대제학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년)를 원접사로 삼았다. 월사는 이조정랑 박동열(朴東說), 예조정랑 이안눌(李安訥), 이조좌랑 홍서봉(洪瑞鳳)을 종사관으로 임명하고, 권필을 뽑아 제술관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백의 종사(白衣 從事)'라 했다.

권필의 글과 시는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당시 조선은 물론 중국까지 필명을 날렸다. 석주의 궁류시(宮柳詩)는 임숙영 사건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됐다. 조정에 다시 파란이 일었다.

1612년(광해군4년) 4월2일. 왕은 권필을 직접 국문하고 나섰다.

광해군 = "권필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시를 지어 멋대로 비난한단 말인가?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不道)한 죄가 매우 크다. 추문해야 한다."

권필 = "임숙영이 전시(殿試) 대책에서 미치광이 같은 말을 했으므로 신이 이 시를 지은 것인데 대의(大意)는 '좋은 경치가 이와 같고 사람마다 뜻을 얻어 잘 노닐고 있는데 숙영이 포의로서 어찌하여 위험한 말을 한단 말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궁류(宮柳), 두 글자는 당초 왕원지(王元之)가 전시 때 지은 시인 '대궐 버들이 봄 아지랭이 속에 휘휘 늘어졌네.(宮柳低垂三月烟)'라는 글귀를 취한 것인데 사람들은 유(柳)자를 가지고 외척을 가리킨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광해군 = "궁류가 외척에 관계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바른 대로 고해야 한다."

권필 = "신은 경치에 대해 말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혹 외척을 가리킨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왕이 형신을 가하라고 명하자 대신들이 고했다.

영의정 이덕형·좌의정 이항복 = "지금 국문하는 사람들은 그 죄명이 역적의 죄와는 다르고 단지 경박한 무리들이 시사에 대해 비난한 것에 불과합니다. 궁궐에서 친국하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형추까지 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교관을 지낸 적이 있지만 유사(儒士)이니 역적의 옥사가 끝난후 처치하소서."

왕이 곤장을 치며 신문할 것을 재촉했다. 이덕형·이항복 등이 재삼 구원했으나 왕은 따르지 않았다. 준장(准杖)을 치고 가두었다. 이날 밤 광해군의 노여움이 한풀 꺾였다. 왕은 "권필의 부도죄는 엄한 형신을 가하여 신문해야 하지만 대간의 말을 들어 형벌을 면제하고 귀양보낸다."

유배지는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정해졌다. 그는 몸이 약했다. 혹독한 곤장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 동대문을 나갔는데 곧이어 죽었다.

권필은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년)의 문인이다. 또한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년)의 절친이다. 19세에 초시와 복시에서 모두 장원을 했다. 그러나 글자 하나를 잘못 적은 일로 내쫓김을 당하자 술과 시로 세월을 보냈다.

선조가 그의 시 수십 편을 읽고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렸다. 참봉에 제수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동몽교관에 임명하니 잠시 나갔다가 곧바로 버렸다. 세상은 선비 가운데 제1의 사인으로 받들었다. 권필이 숨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한때는 시로 왕의 사랑을 받아 벼슬을 얻었지만 또 한때는 시로 왕의 노여움을 사 목숨까지 잃었으니 많은 선비들이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광해군 #남궁창 #인문학 #임숙영 #사람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