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증요법서 발병 원인 바로잡는 단계로
글로벌 제약사들의 움직임은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 바이오젠(Biogen)과 일본 에자이(Eisai)가 공동 개발한 항체 치료제 '레켐비(Leqembi)'가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MFDS) 승인을 받으며 국내에서도 알츠하이머 진행 억제제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아직 급여 적용이 이뤄지지 않아 연간 치료비만 약 2400만 원에 달하는 등 환자 부담이 크다는 점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국내 치매 치료제 개발에 대한 필요성과 기대도 한층 커지고 있다. 치매 치료의 패러다임이 단순한 증상 완화에서 벗어나 발병 원인을 억제하거나 질병 진행 자체를 늦추는 '질병 조절 치료제(DMT)'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 역시 알츠하이머병과 치매 치료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펩타이드·면역세포·지속형 제제 등 개발 전략 다양
동아에스티의 타우 표적 치매 치료제 DA-7503은 알츠하이머병 및 일차 타우병증 치료제로 개발 중인 최초 혁신(First-in-Class) 신약 후보물질이다. DA-7503은 저분자 화합물로써 분리되고 변형된 타우에 선택적으로 작용해 올리고머 형성을 억제하고 세포 내 축적을 저해한다. 지난해 식약처로부터 임상 1상을 승인받고 개발을 진행 중이다.
젬백스앤카엘은 펩타이드 기반 신약 후보물질 GV1001을 개발 중으로, 암세포에서만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효소인 텔로머라아제(hTERT)의 항산화·항염 기능을 통해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작용을 한다. 국내에서 중등도~중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2상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했으며, 현재는 750명 규모의 3상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엔케이맥스는 미국에서 자연살해(NK) 세포를 활용한 면역세포치료제 SNK01의 임상 1상 진행 중이다. 이는 뇌의 면역 균형 회복을 통해 치매 증상을 완화하는 혁신적인 세포치료 접근법으로, 기존 항체 치료제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인벤티지랩은 장기 지속형 주사제 플랫폼을 기반으로 도네페질 성분의 1개월 지속형 제제(IVL3003)와 3개월 지속형 제제(IVL2008)를 개발 중이다. 복약 편의성과 순응도를 높여 치매 환자 치료 부담을 줄이는 전략으로, 현재 비임상 및 임상 진입 단계를 밟고 있다.
차바이오텍은 알츠하이머 치료제 후보 CB-AC-02의 임상 1/2a상을 완료하고, 안전성 및 가능성을 확인했다. 최근에는 알츠하이머에 국한하지 않고 퇴행성 뇌질환 전반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을 모색 중이다.
아리바이오는 경구용 알츠하이머 치료제 AR1001을 글로벌 임상 3상(POLARIS-AD)으로 개발 중이다. 중간 분석 결과 인지 기능 유지 및 개선 효과가 확인되었으며, 항체 치료제에서 흔히 발생하는 뇌부종·출혈 부작용이 보고되지 않아 안전성 측면에서 강점이 있다. 최종 3상 결과는 2026년 상반기 발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오스코텍은 타우 단백질의 비정상적 응집을 억제하는 항체 치료제 ADEL-Y01의 임상 1a상을 시작했다. 병리적 타우에 특이적으로 작용해 응집 억제 및 제거를 유도하는 기전으로 차별성을 확보했으며, 2026년 임상 1상 종료 이후 글로벌 기술이전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국내 치매 치료제 개발 글로벌 수준
치매 치료제 연구개발은 이제 단순한 대증요법(질병의 근본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으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 방법)을 넘어 치매의 근본적인 발병 원인에 개입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제약바이오 생태계의 임상 인프라와 연구 수준 역시 글로벌 수준에 성큼 다가섰다는 평가다.
하지만 치매 치료제 개발에 있어 현실적인 제약도 있다. 치료제의 장기 안전성과 막대한 개발 비용, 높은 임상 실패 위험은 여전히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치매 치료제 개발 실패율은 99%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환자 수는 고령화 속도와 비례해 늘어나고 있고, 사회·경제적 부담 역시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65세 이상 인구의 5~10%가 치매를 앓고 있으며, 국내 유병률도 지난해 기준으로 약 12.6% 수준으로 추산된다. 치매 환자 1인당 연간 관리비용도 약 2061만원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치매 치료제 개발은 실패 위험이 높지만 인류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며 "국내외에서 증상 완화와 진행 억제를 넘어 예방과 회복을 지향하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정부·의료계·산업계가 함께 협력한다면 한국도 글로벌 무대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