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70년대부터 北과 우호 관계…현지에 北식당, 회사 다수
최근 적발된 국내 간첩사범, 캄보디아 통해 자금·지령 수수 정황
"北공작원, 캄보디아 주재 외교관 위장해 드론 부품 조달" 관측도
한국인 납치·감금 사건이 잇따르며 '요주의 국가'로 떠오른 캄보디아. 그러나 북한 간첩들에게 이곳은 '공포의 땅'이 아닌 활동하기 가장 자유로운 '공작 거점'으로 꼽힌다. 실제 북한 공작원이 캄보디아 주재 북한 외교관으로 위장해 국내 협력자를 접촉하거나, 드론 부품을 조달해 북한으로 반출한 정황이 잇따라 포착됐다. 최근 검거된 국내 공작망 일부도 캄보디아를 경유해 자금·지령을 주고받은 사실이 수사당국 조사로 드러났다. 캄보디아가 '북한의 신(新) 대남 공작 루트'로 급부상하면서 한국 수사·정보기관도 관련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北 공작원, 외교관 신분으로 캄보디아서 활동"
캄보디아는 한때 한국인의 대표적 여행지로 꼽히던 나라다. 앙코르와트 관광과 저렴한 물가 덕에 해마다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찾았다. 그러나 최근 캄보디아에서 한인 납치·감금·보이스피싱 연루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현지 한인 사회에서조차 "캄보디아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감이 높아졌다. 이에 외교부는 대규모 범죄조직이 밀집된 시하누크빌 외 캄폿주 보코산 지역, 바벳시, 포이펫시를 여행 금지 지역으로 지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캄보디아의 이같은 치안 공백이 북한 공작원들에게는 '활동의 틈새'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정보 당국의 분석이다. 우선 캄보디아는 오랜 기간 북한과 우호 관계를 이어왔다. 1970년대 시하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이 김일성 주석과 친분을 쌓은 이래, 북한은 프놈펜에 대사관을 두고 정치·경제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캄보디아는 서방 국가들처럼 대북 제재나 감시망이 촘촘하지 않아, 북한 외교관이나 무역대표부 직원이 공작원 신분으로 위장해 활동하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으로 평가된다.
특히 대남 공작을 담당하는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들에게 캄보디아는 최적의 거점으로 꼽힌다. 이들이 중국·라오스·태국 등 인접국보다 감시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캄보디아를 한국 내 협력자와 접선하는 주요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게 정보당국의 분석이다. 현지에는 교민·사업가·노동자 등 한국인 거주 인구가 많고, 한인 커뮤니티와 상거래 네트워크가 발달해 있어 접선이나 자금 전달이 자연스럽게 위장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몇 년 사이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한 북한 공작 정황이 잇따라 포착됐다. 지난해 11월 일본 민영 방송사 니혼TV는 대북 소식통 등을 이용해 2015년쯤부터 주캄보디아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40대 중반 박아무개씨가 사실상 '공작원'으로 의심된다고 보도했다. '더글라스'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박씨가 실제로는 '청송연합' 캄보디아 지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송연합'은 북한 대외공작 기관인 정찰총국 산하의 무기 수입상사다. 박씨는 북한의 정찰총국이 제조하는 드론에 사용될 센서와 카메라, 송수신기 등을 캄보디아에서 입수해 중국 단둥을 거쳐 북한으로 보내고 있다고 매체는 보도했다. 무기 관련 품목을 북한에 보내는 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 위반이다.
"캄보디아, 대남 공작의 실질적 무대로 기능"
국내에서도 캄보디아를 경유한 대남 공작 정황이 포착된 사례가 잇따랐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최근 몇 년 사이 적발된 간첩 사건들 가운데 일부가 캄보디아를 제3국 접선지로 활용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실제 최근 대법원에서 확정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직 간부 간첩 사건에서도 피고인들이 캄보디아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지령을 받거나, 공작 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지난달 11일에는 이른바 '충북동지회' 소속 박아무개씨가 북한 공작원 지령을 받기 위해 캄보디아로 출국한 죄로 대법원으로부터 국가보안법상 특수잠입·탈출죄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는 "캄보디아에는 워낙 북한 인력이 다양한 신분으로 상주하고 있어, 공작원과 민간인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며 "겉으로는 외교관·무역상·식당 운영자로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대남 공작망의 거점 역할을 하는 인물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캄보디아 현지에는 한국 교민 사회가 크고 사업상 왕래가 잦은 만큼 공작 접선이나 자금 전달이 외형상 정상 거래처럼 보이기 쉽다"면서 "정보·사이버·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대남 공작 루트로 진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한국인 감금·납치 사태'에 관심이 쏠려 있지만, 그런 사이 북한의 대남 공작이 여전히 캄보디아에서 은밀히 이뤄지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국가정보원 출신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캄보디아는 치안이 불안하고 감시망이 느슨해 행적 추적이 어렵다"며 "이런 환경 때문에 북한 공작원들에겐 제3국 활동 무대로 적격인 나라"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평양에서 국내 인물을 선별해 일정 기간 관찰한 뒤, 포섭 가능성이 확인되면 캄보디아로 불러내 직접 접선한다"며 "예전엔 중국을 활용했지만, 최근엔 중국의 공안 감시가 워낙 강화돼 캄보디아로 무대를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 교수는 "캄보디아에 상주하는 공작원 규모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지역이 대남 공작의 실질적 무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면서 "SNS 등을 통해 연락한 뒤 '비행기 타고 캄보디아로 오라'는 식의 접선이 지금도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