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검토한 적 없다…대미 투자와도 부합하지 않아"
협상 지렛대로 활용?…"美, 전액 현금 투자 입장서 물러나"
한·미 양국이 3500억 달러(약 49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요구했던 '통화스와프' 안은 수면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검토한 적 없다"며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미 양국 협상은 실타래를 풀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미국에서 돌아온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이 전액 현금 투자를 고수하고 있지 않다고 밝혀서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타결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가 미국과의 관세협상 카드로 제시한 통화스와프에 대해 이창용 한은 총재가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지난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이 총재는 한은과 미국 재무부 간의 통화스와프 계약 체결 가능성을 묻는 질의에 "검토한 적 없다"고 밝혔다. 그는 "아르헨티나 사례와 같은 통화스와프는 단기 유동성 목적인만큼 (3500억 달러와 같은) 장기투자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최근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미 재무부와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아르헨티나가 외환위기에 처하자 미 재무부는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를 거치지 않고 자체 보유 중인 외환안정기금(ESF)를 활용해 유동성을 지원한 것이다. 통상 중앙은행끼리 체결하는 국가 간 통화스와프와는 다른 경우다.
미국과 관세협상 과정에서도 '아르헨티나 모델'의 통화스와프가 거론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총재는 미 재무부와의 통화스와프가 취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미 재무부의 외환안정기금(ESF)으로는 그 규모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에 조달하기엔 ESF의 총자산이 지난 8월 기준 2209억 달러 수준이기 때문이다.
미 연준과 체결하는 통화스와프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낮다. 이 총재는 "최근 제롬 파월 연준 의장과 만나 통화스와프를 논의했느냐"는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 질의에 "예전부터 통화스와프는 연준과 논의해왔다. 그러나 이번 일로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3500억 달러 대미투자)와는 전혀 부합하지 않아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앞서 한국 정부는 대미 투자금의 구체적 운용 방안과 관련해 ▲무제한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 ▲합리적 수준의 직접 투자 비중 ▲투자처 선정 관여권 보장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측은 비기축통화국과 상설 통화스와프를 맺은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계속 난색을 표하고 있다. ESF를 활용한 통화스와프 역시 연준 설득이 쉽지 않아 선회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협상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정부 측은 '통화스와프'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 취지의 발언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16일 "재무부와 우리 사이의 통화스와프는 무제한이든 유제한이든 진전이 없다"며 "재무부를 통한 통화스와프에 큰 의미를 두거나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외환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스와프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며 "많이 할 수도, 적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통상협상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 하는 게 본체"라고 덧붙였다. 통화스와프가 협상 과정에서 주요 의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미국 측이 수용하기 어려운 '통화스와프' 카드를 협상의 물꼬를 트는 지렛대 역할로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협상은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트닉 상무장관과 협상 후 지난 20일 밤 귀국한 김 장관은 "한·미 양국이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로) 한국 외환시장에 부담을 줘선 안 되겠다는 컨센서스(공감대)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5일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을 만난 이후 "한국 외환시장 안정성 확보의 필요성을 재확인했다"는 구 부총리의 발언과 비슷한 맥락이다.
김 장관은 미국 측이 전액 현금 요구를 고수하지 않고 있다고도 전했다. 그는 "미국이 계속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었는데, 미국이 상당 부분 우리 의견을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선불(up front)' 방식의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해 왔지만 외환시장의 부담을 호소한 한국 측의 절충안을 수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현금 투자 규모와 범위에 대해선 여전히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김 장관의 설명이다.
"3500억 달러 중 절반 먼저 투자 방안이 현실적"
한국 정부가 밝힌 한해 조달할 수 있는 현금 규모는 최대 200억 달러 수준이다. 이 총재 역시 "한국은행에서 외환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1년 사이에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규모가 150억~200억 달러라고 정부에 제안드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그 규모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의 캐슬린 오 연구원은 지난 20일 한·미 관세협상 관련 보고서에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한국과 미국이 현금 투자 규모를 3500억 달러의 10% 이하로 조정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가 최소 350억 달러(약 50조원)는 현금으로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오 연구원은 "한국이 3500억 달러 중 50% 이하만 앞으로 3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투자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경우엔 미국이 통화스와프 등 외환시장 안전장치를 제공해야 할 것으로 봤다.
양국이 절충점을 찾아가고 있는 가운데 타결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베선트 장관은 지난 15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과의 의견 불일치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견은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현재 논의 중이며, 앞으로 10일 안에 어떤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타결 시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경주 APEC 참석차 방한하는 오는 31일 전후가 유력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