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관객이 할리우드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우리 취향이 바뀌고 있다’고.”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미국 내 깜짝 흥행에 미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이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지난달 12일 미국에서 개봉해 쟁쟁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누르고 전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2주간 정상을 지킨 이 영화는 끝내 25년 만에 ‘와호장룡’이 지니고 있던 외화 흥행 기록을 다시 썼다. 17일까지 미국 내 극장 수입은 1억3,020만 달러.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작인 ‘킹 오브 킹스’가 기록한 6,027만 달러의 2배가 넘는 수치다. NYT는 ‘무한성편’의 개봉 첫 주말 흥행 기록이 업계 예측보다 55%나 높았다면서 “젊은 세대의 변화하는 관심사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할리우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전했다.
국내 젊은 관객도 박스오피스 성적을 통해 한국 영화계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17~19일 주말 박스오피스 상위 10편 중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1위), ‘극장판 주술회전: 회옥·옥절’(3위) 등 3편이나 된다. ‘체인소 맨’은 전기톱 악마 ‘포치타’와 계약해 체인소 맨으로 변한 소년이 정체불명의 소녀 ‘레제’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가족 관객이 주를 이루던 추석 극장가에서 두 한국영화 ‘보스’ ‘어쩔수가없다’에 밀려 줄곧 3위였던 이 영화는 개봉 18일째인 11일부터 18일까지 단 하루만 빼놓고 1위 자리를 지키며 누적 관객수 213만 명을 기록했다. 이 영화가 2위로 내려갔던 16일 1위를 차지한 영화는 ‘주술회전’이었다.
‘무한성편’도 국내 개봉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주말 흥행 10위 안에 올랐다. 18일까지 545만 명을 모으며 올해 최고 흥행작인 한국영화 ‘좀비딸’을 18만 명 차이로 추격 중이다.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흥행 1위인 ‘스즈메의 문단속’의 558만 명 기록도 바뀔 가능성이 높다. ‘귀멸의 칼날’을 비롯해 ‘체인소 맨’ ‘주술회전’은 모두 만화로 시작해 TV 시리즈까지 인기를 끌며 탄탄한 팬덤을 모으고 있는 지식재산(IP)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극장가 트렌드 변화는 연간 박스오피스 순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팬데믹 전 20년간 연간 흥행 50위 안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포함된 경우는 ‘너의 이름은’(2016·396만 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년·301만 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년·216만 명) 등 여섯 편뿐이었다. 반면 올 한 해만 18일 기준 총 네 편이 50위 안에 올랐다.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국내 흥행 상위 10편 중 6편, 20편 가운데 15편이 2020년 이후 개봉작이다. 특히 만화와 TV 애니메이션의 인기를 바탕으로 거의 매년 개봉하는 장수 시리즈인 ‘명탐정 코난’과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은 2020년 이후 개봉작이 20위 안에 7편이나 올랐다. 통상 시리즈 영화는 회가 거듭할수록 관객수가 줄어들지만, 두 시리즈의 극장판은 팬데믹 이전 최고 40만~50만 명 수준에 그친 것과 달리 2022년부터 70만~90만 명대로 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강세는 국내 영화 관객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애니메이션 수입사 관계자는 “10, 20대 애니메이션 팬덤이 최근에는 40대 이상 관객에도 영향을 주면서 시장이 커졌다”면서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선 일본 애니메이션 관람이 소수 ‘오타쿠’의 취미를 넘어 보편적인 문화가 된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 관계자는 “해외 마켓에서 한국 수입사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에 몰리면서 가격이 크게 뛰었다”고 덧붙였다.
국내 영화계는 이 같은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황재현 CJ CGV 전략지원담당은 “실사 영화가 구현하기 어려운 애니메이션 특유의 상상력, 일반 영화와 차별화한 독특한 스토리, 이를 바탕으로 한 뛰어난 작화를 대형 화면에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관객이 극장을 찾고 있다”면서 “팬덤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져 일반 관객들도 극장을 찾으며 장기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