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챗GPT 출시로 미국 독주체제로 굳어지는 듯했던 인공지능(AI) 경쟁은 딥시크의 등장으로 2년 만에 구도가 급변했다. AI 기술 주도권을 두고 격해지는 미중 패권경쟁은 한국 외교지형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그리고 한국은 어떤 전략을 펼쳐야 기술적 자립을 확보할 수 있을까. AI는 이제 단순 기술을 넘어 외교, 안보, 국방, 경제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의제가 됐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국제정치학자가 AI를 얘기해야 하는 세상이 왔다"고 말하는 이유다.
지난 13일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AI 패권경쟁이 국제정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자세하게 들어봤다.
미중 AI 패권경쟁, 분열적 세계를 만들다
-AI산업이 국제정치에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첨단기술 우위를 차지하는 국가가 세계 질서를 주도해왔다. AI 기술을 구성하는 △데이터 △반도체 △알고리즘 경쟁력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미래 국제정치 질서가 달라질 것이다."
-주권 중심의 국제관계와 성격이 다른 것 같다.
"디지털 전환시대에서 '주권'은 영토적 경계 안에 머물지 않는다. 초국적 활동을 하는 빅테크 기업들의 활동을 국가가 지원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디지털 제국'을 형성하는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미중 AI 패권경쟁은 국제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흥미로운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자국 기업 중심으로 모델의 핵심 과정과 데이터를 비공개로 유지하면서 기술력과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폐쇄형 생태계'를 퍼뜨리는 반면, 중국은 모델의 구조, 사전 학습 가중치, 추론 코드 등 핵심 구성 요소를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하는 '개방형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기업중심의 시장 구조로만 보일 수 있겠지만, '폐쇄형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면서 동맹국들의 연대를 다지려고 한다. 반면, 중국은 개방적 접근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모습이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중 간 진영 갈등 양상처럼 보인다. 실제로 최근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사이버 공간이 분리되는 '스프린터넷(Splinternet)'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서구 진영의 국가들은 미국 기업들이 제공하는 '오픈AI', '애플페이'를 사용하는 반면,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에 '딥시크', '알리페이' 등의 서비스를 널리 제공하려고 하고 있다. AI 기술표준을 두고 분절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한국 외교…'미중 갈등' 무대 되는 한반도
-미중 AI 패권경쟁이 한국 외교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미중 간 AI 기술경쟁이 심화할수록 한국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미국 AI 데이터에 기반한 플랫폼 서비스를 개발하는 구조로 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글로벌 사우스를 상대로 자국 AI 모델을 퍼뜨리면서 중국 표준도 확산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 AI 기업들의 글로벌 사우스 진출은 점점 어려워질 수 있다. AI 기술을 두고 미국과 중국 사이가 점점 벌어지면 한국은 한쪽 다리를 떼어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다리를 잘라내선 안 된다. 기본적으로 오른쪽 다리, 그러니까 미국과의 협력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어도 왼쪽 다리를 잊으면 안 된다."
-한반도 정세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나.
"최악의 시나리오는 또 다른 차원의 분단 시대를 맞는 것이다. 남북 간 교류협력의 물꼬가 터진다고 해도, 사이버상에서는 분단된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의 AI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는다. 최근 중국의 간편결제 시스템이 북한에 많이 퍼지고 있다고 들었다. 반면 한국은 중국의 AI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고, 간편결제 시스템도 중국 서비스와의 호환성이 떨어진다. 이런 AI 기술에서의 분단 결과가 무엇일지 걱정된다. 한국이 보다 주체적인 외교를 하기 위해서라도 AI 자강능력을 갖추기 위한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한국, '독시·자강·균세'의 3대 전략으로 소버린 AI 확보해야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국내 AI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하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전략은 무엇인가.
"'독시(讀時)·자강(自强)·균세(均勢)'를 통한 '소버린(주권적) AI'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변화를 읽을 줄 알고(독시), 패권경쟁을 버틸 수 있는 힘을 갖추면서(자강), 균형적 시각으로 구조적 위치잡기(균세)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미중 간 사이가 좋았던 시대에 한국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접근을 하지 않았나. 미중 갈등이 심화할수록 이런 구도는 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에 무조건 올라탈 순 없다. 안보 위험성은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AI 기술의 전제조건인 데이터와 반도체 인프라, 알고리즘의 경쟁력을 골고루 갖춰야 한다. 다행히 한국은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AI 연산과 고성능 컴퓨팅, 그래픽 처리 등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HBM(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를 제조하는 핵심 기업을 보유한 국가이기도 하다."
-디지털 배타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소버린 AI의 주권은 디지털 시대의 쇄국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데이터를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자는 게 핵심이다. 쇄국 정책이 아니라 자강정책이라고 하겠다. 중견국이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건 결국 비슷한 처지의 국가들과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UAE)는 미국과 중국의 AI 플랫폼이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비정치적이고 국제주의적 AI 모델을 추구하는 한국과 기술협력에 나서지 않았나."
"중견국 AI 기술 연대, 강대국 제어 위해서라도 필요"
-중견국 간 AI 기술 연대가 중요하다고 보나.
"당연하다. 패권은 인지전을 하고, 오늘날 AI는 패권경쟁국들의 가치를 퍼뜨리는 핵심 수단이다. 소프트 파워와 하드 파워가 안정적으로 운영됐을 때 패권이 등장한다. 미국 AI를 사용할수록 서구 가치관이 익숙하고, 중국 AI를 사용할수록 사용자는 중국식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위협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데이터는 20세기 패권을 좌우지한 자원이었던 '석유'와 같다. 미국과 영국이 석유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건 이른바 '일곱 자매(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 기업들이 중동에 매장된 원유를 생산·유통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기술패권을 쥔 국가에 의존하고 종속되는 결과를 보게 될 수 있다."
-이달 말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주최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한국 AI 전략에 어떤 의미가 있나.
"AI 기술경쟁에서 국제 보편적 가치를 확산하고, 협력국가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얘기하는 규범은 힘을 바탕으로 하는 규칙이다. 반면 한국이 추구하는 AI 규범은 여러 국가와 협력해 자유주의적 연대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미국, 중국과 비교해 물리적 힘은 없지만, 보편적 가치를 내걸고 강자인 미국과 중국을 제어할 수 있다. 유럽연합(EU)도 규범외교를 통해 외교력을 발휘하지 않나. APEC에서 AI 규범에 대해 충분히 얘기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상배 교수: 2019년부터 서울대 미래전연구센터장을 맡아 AI와 국제정치의 상관관계에 천착해온 전문가. 알파고 쇼크 때부터 시작해 챗GPT, 그리고 올해 딥시크 쇼크까지 AI 기술 발전이 국제정치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분석해왔다. AI가 가져올 기회와 위협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군사안보적, 기술적, 법·제도적 대비책을 제시하기 위해, 최근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인공지능과 국제정치 전환'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