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놀수녀회 고(故) 문애현 요안나 수녀
(1930~2024)
편집자주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 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아이고. 단골손님 오셨네요. 이렇게 자주 오시면 안 되는데."
벽제화장장(서울시립승화원) 직원이 관을 들며 중얼거렸다. 반가움과 난처함이 뒤섞인 묘한 표정, 눈이 중년의 여성과 푸른 눈의 노년 수녀를 향했다.
"단골? 하기야. 헛말도 아니네."
'막달레나의 집(막달레나 공동체)'의 이옥정 대표가 함께 온 푸른 눈의 문애현 요안나 수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관이나 영정을 들고 화장장을 툭하면 들락거렸으니 그리 말할 만도 하겠지.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이들, 지금까지 이들을 몇 명이나 배웅해왔을까.
2025년 7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 40주년 기념' 미사를 위해 1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단상에는 그 푸른 눈의 문 수녀 영정이 놓여 있었다. "10주년, 20주년, 30주년을 모두 함께했는데 오늘은 수녀님이 안 계시네요. 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한국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을 공동설립한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 2024년 11월 29일 미국 뉴욕 메리놀수녀회 본원 요양원에서 선종했다. 향년 94세.
문애현 수녀...사랑과 지혜로 문을 지키다
영화 한 편이 삶을 결정했다. 1930년 1월 16일 미국 뉴욕 시러큐스에서 태어난 문 수녀는 어린 시절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수녀가 등장하는 영화를 봤다. 막연했지만, 그는 "저렇게 살고 싶다"고 결심했다. 간호사로 일했고, 1953년 메리놀수녀회에 입회했다. 첫 소임지는 전쟁 잿더미만 남은 대한민국. 그해 9월 동료 수녀 5명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산항에 도착한 그는 메리놀 병원에서 일했다. 피란민만 100만 명이던 시절, 병원으로 하루에만 환자 2,000명이 몰렸다. 문 수녀는 줄 선 환자들 사이에서 위급한 이들을 추려내고, 그들에게 진료 번호표를 나눠주는 일을 맡았다. 병원 문 앞을 지키는 그는 어느새 '문 수녀'가 됐다. 한국 성(姓)씨 '문'은 그렇게 지어졌다. "약도 병상도 부족했어요. 정말 위급한 환자가 아니면 돌려보내야 했는데,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아이를 업고 왔던 엄마가 다음 날 안 오면 '왜 안 올까' 종일 걱정했어요." 고인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문 수녀는 1956년부터 증평 메리놀 병원에서, 1963년부터 인천 강화도 그리스도왕 병원에서 일했다. 인천 섬유공장 밀집 지역에서 노동자 상담을 맡았던 동료 돌로레스 수녀는 그때 문 수녀의 미소를 아직 기억한다. "노동자, 환자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컸어요. 그리고 활짝 웃었어요." 그런 그에게 한 친구가 이름을 지어줬다. 사랑과 지혜, 애현(愛賢)이었다.
막달레나의 집을 세우다
1984년 10월, 문 수녀를 포함한 여자수도회 장상연합 수녀들이 용산 성매매 집결지를 찾았다. 이들을 맞이한 게 그곳 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해주던 이옥정 대표였다. 보험판매원으로 왔다가 참혹한 현실에 놀라 아예 현장에 눌러 앉은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수녀들 앞에서 여성들은 가난, 근친 강간, 미혼모, 채무, 돌봐야 할 어린 동생 등 사연을 쉼 없이 털어놨다. 문 수녀는 그 얘기를 들으며 큰 안경 너머로 눈물을 연신 닦고 있었다. "저분이 어쩌면 동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대표는 막연히 생각했고, 며칠 뒤 정말 연락이 왔다. "같이 살아도 되겠습니까."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이듬해 7월 22일. 이 대표와 문 수녀, 서유석 신부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등의 도움을 받아 성매매 집결지 골목 안에 두 칸짜리 작은 방을 마련했다. 국내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이었다. 예수를 공경했던 용감한 성녀 막달레나의 이름을 따랐다.
그저 함께 먹고, 웃고, 지키고
골목의 여성들은 '냄비' 혹은 '기계'로 불렸다. "장사 어때?"라는 질문은 "그 집 기계 잘 돌아가냐?"는 말이 대신했다. 아팠고, 매를 맞았고, 빚에 쪼들렸다. 환각제가 없으면 손님을 받을 수조차 없었다.
법도 그들 편이 아니었다. 성매수자 말고 매매 여성만 처벌받던 시절, 손님들은 돈이나 물건을 훔치고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억울했지만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경찰은 상납금을 내는 업주는 두고 여성들만 단속했다. 벌을 안 받으려면 뇌물을 줘야 했다. 그렇게 빚은 또 늘어갔다.
막달레나의 집은 그런 그들 곁을 가만히 지켰다. 국수를 비벼 먹고, 미역국을 끓여 먹고, 원하면 자고 갔다. 조건을 달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자궁외 임신, 폭행, 신장병, 췌장암 등 아픈 이들이 있으면 병원을 함께 갔다. 오빠의 성폭행에 가출했던 이도, 노름으로 집을 날린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던 이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비를 넘겼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결국 눈을 감았다. 성매매 여성, 호객꾼, 업주, 혹은 그들 중 누군가의 어린 자녀들이 폭력, 빚, 약물, 화재에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그들의 마지막은 유난히 쓸쓸했다. 배웅한 건 역시나 문 수녀와 이 대표뿐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애도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집결지 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뒤에서 "파팍" 소리와 굵은소금이 날아들었다. "에이! 재수 없어!"
아침마다 용산역으로 달렸다
문 수녀는 아침마다 휴지를 들고 용산역 공동 화장실로 달렸다. 집에 화장실이 없었다. 그 모습에 동료 수녀는 펑펑 울었지만 문 수녀는 돌아올 때마다 노숙인 한 명을 데려와 아침밥을 차려줬다.
정부미로 끼니를 때웠지만, 언제나 씩씩했다. 생선을 잘못 사 온 문 수녀에게 누군가 "이건 고등어가 아니고 동태예요"라고 해도 그는 "뭐 어때요. 잘생겼잖아요"라고 답했다. 한 숟갈 뜨던 음식이 잔반으로 만든 강아지(브랜디) 밥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을 땐 짧게 외쳤다. "브랜디야 미안하다."
1991년 문 수녀 환갑잔치가 열렸다. 잔칫날 들어서던 한 손님은 말했다. "아니 전철에서 만난 수녀님이 '뭘 그렇게 공부하시나' 봤더니 글쎄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이런 걸 외우고 계시잖아." 한참을 깔깔댔다. 이 대표가 문 수녀에게 낸 숙제였다. 그날 환갑잔치에는 동네 건달이 부른 밴드가 등장했다. 문 수녀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만큼 노사연의 '만남'도 좋아했다.
거기엔 아이들도 살았다
골목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엄마를 따라 살던 아이들이 있었고, 버려져 남은 아이도 그만큼 있었다. 외로웠던 여성들은 버려진 아이를 입양하듯 키웠다. 아이를 등에 업고 호객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 몇몇은 문 수녀와 이 대표가 나서 입양을 보냈다.
문 수녀는 아이들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섰다. 성매매를 그만두려는 엄마들에겐 식당일, 가사도우미 일을 소개하고 응원했다. 함께 돌보는 아이의 태권도 심사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함께 나섰다. 하루는 더 빨리 취하겠다며 콜라와 함께 환각제를 먹는 엄마를 보다 못한 5세 아이가 "내가 우리 엄마 콩알 못 먹게 냉장고 콜라 다 마셔 버렸어" 하고 종알대기도 했다.
1988년 인근에 '배론 글방'을 열었다. 아이들을 보호해줄 곳이 절실했다. 호객꾼 엄마와 살며 청계천 피복공장에 취직했던 15세 여자아이가 손님이 지른 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집에서 숨졌다. 엄마가 영업을 나간 동안 딸이 삼촌에게 성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돈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길래' 싶었는지 아이들이 소매치기에 빠지기도 했다.
글방에선 자원봉사자 40여 명이 번갈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여성, 호객꾼, 업주 등 누구의 아이이건 관계없었다. 골목 모든 아이의 쉼터가 됐다. '공부방'이 있다는 자부심이 골목 안팎으로 번져 나갔다. 글방 초대 원장 박세옥씨는 "문 수녀님이 지원금을 마련해다 주고, 캠프·운동회에 따라나서며 아이들의 큰 어른이 돼 줬다"고 떠올렸다. "너무 애처롭게 바라보거나 심각하지는 않았어요. 문 수녀님이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서면 모든 게 괜찮은 것 같기도 했어요."
희생 아냐, 그저 함께 산 것일 뿐
막달레나의 집을 찾는 탈성매매 여성은 점점 늘어갔다. "술 따르면서 이상한 손님들한테 스트레스받는 것보다는 견딜 만하잖아." 여성들은 식당 일, 재봉 기술 등에 도전했고, 첫 월급을 타면 "큰 언니! 수녀님!"을 외치며 달려왔다. 대학까지 졸업해 학사모를 씌워주는 경사도 생겼다. 온 식구가 참기름 장사, 아이스크림 장사에 도전하기도 했다.
문 수녀는 1999년 막달레나의 집 '합숙 생활'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성서 공부모임이나 여성단체 활동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창립멤버인 김선실씨는 "호주제 폐지 운동 등 다양한 현장을 문 수녀님이 함께 지켜줬다"고 했다.
주변에선 문 수녀가 늘 홀가분한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성미영 안젤라 수녀는 "성찰과 반성, 원망과 기쁨을 다 통과한 뒤 나온 가벼움"으로 생각했다며 "그런 모습을 늘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문 수녀는 종종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지만, 고령으로 타인의 돌봄이 정작 필요한 때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2023년, 문 수녀는 70년에 걸친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4년 11월 28일, 뉴욕 메리놀수녀회 본원 요양원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에서의 추모 미사는 12월 7일 서울 합정동 전진상센터에서 봉헌됐다.
변했지만 여전하다. 남은 이들의 다짐
막달레나의 집이 생긴 지 꼭 40년. 그사이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생겼고 골목이 있던 용산도 천지개벽했다. 많은 게 변했지만, 또 많은 건 여전하다. 온라인 성착취, 청소년 대상 성학대, 해외 원정 성매매, 약물 과다 투여, 조건만남 등이 새롭게 기승을 부린다. 막달레나 공동체 동료들이 위기여성지원 등에 나서며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이유다.
홍근표 신부는 고인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뿐 아니라, 아예 누릴 것 자체를 포기하고 춥고 어려운 이의 곁을 지키며 사랑의 최절정, 존중을 보여준 분"이라고 돌이켰다. 또 "여전히 극복해야 할 일이 많아 섬기고, 동반하고, 솔선수범하고, 영감을 주는 문 수녀님의 리더십을 다시 새긴다"고 말했다.
홍 신부는 최근 막달레나의 집 추석 미사에 찾아온 탈성매매 여성의 말을 담담히 전했다. "늘 반겨 주시던 문 수녀님 모습이 생생합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저도 어렵고 힘든 이를 돕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같이 있을게요. 꼭 불러주세요." 문 수녀가 남긴 건 그저 곁을 내어준 하루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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