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35년 지나도 동독민은 '2등 시민'… 동독엔 이사도 안 간다 [숨은유럽찾기]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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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일 통일 35주년 기념식을 가다
마크롱 대통령, 기념식서 특별 연설
메르켈 "동독 출신이 했어야" 비판
실업률 격차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동독은 낙후, 동독민은 2등시민"
30년 간 서→동독 이주는 280명뿐

편집자주

혹시 여행으로만 유럽을 경험하셨나요. 매월 연재하는 '숨은유럽찾기'에선 평온한 관광지에선 볼 수 없는 유럽 각국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드립니다. 드러난 뉴스의 이면도 들여다 봅니다. 때론 불편한 진실이 우리에게 피와 근육이 됩니다.
지난 3일 독일 통일 35주년 기념식을 축하하기 위해 자르브뤼켄을 찾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환영하는 독일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안케 렐링거 연방 상원의장 겸 자를란트 주지사, 율리아 클뢰크너 연방의회의장, 마크롱 대통령,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슈페판 하르바르트 연방헌법재판소장. 맨오른쪽에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도 보인다. 자르브뤼켄=정승임 특파원


“메르시 보쿠(프랑스어로 고마워요), 에마뉘엘 마크롱.” (안케 렐링거 자를란트 주지사)

기온이 10도까지 떨어져 쌀쌀했던 지난 3일 오전, 독일 남서부 자를란트주의 주도(州都) 자르브뤼켄.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내외는 물론,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부부를 포함한 정부와 의회 수반들이 주지사 청사 밖에 깔린 레드카펫 위에서 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5분 후, 경찰 오토바이 호위를 받으며 등장한 검은 차량에서 내린 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였다.

한국의 개천절인 이날은 독일의 35번째 통일 기념일이었다. 동∙서독이 합쳐지면서 16개 연방주가 된 독일은 통일 기념식을 수도 베를린이 아닌 16개 주가 매년 돌아가며 개최한다. 연방 상원 의장(16개 지역 주지사가 1년 단위로 맡음) 지역구에서 주관하는데 올해는 자를란트 주지사이자 상원 의장인 렐링거 차례다. 통상 독일 내부 행사로 진행되는 기념식이지만 올해는 특별했다.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 정상인 마크롱 대통령이 참석해 특별연설까지 한 것. 이에 렐링거 주지사가 감사 인사를 표한 것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공식 초청을 받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현장에서 본 취재 열기는 뜨거웠다. 인구 18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에 독일 현지 언론은 물론 프랑스 엘리제궁 풀기자들까지 대거 파견됐다. 경호 수준이 격상되면서 골목마다 경찰차가 배치됐고 마크롱 대통령이 도착할 쯤엔 경찰 헬기가 상공에 떴다. 2일부터 사흘간 이어진 축제 기간엔 4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마크롱, 통일기념식 연설에 메르켈은 비판

지난 3일 독일 통일 35주년 기념식을 축하하기 위해 자르브뤼켄을 찾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환영하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자르브뤼켄=정승임 특파원


물론 “독일 통일 기념식인데 프랑스 대통령이 왜 연설하느냐”는 논쟁도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전날 ZDF 방송 인터뷰에서 “동유럽이나 동독 출신 인사를 특별 연사로 선정했다면 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날 30분 넘게 진행된 연설에서 “우리 사이(프랑스와 독일)에 전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럽의 성취”라며 “유럽은 이제 스스로 결정하고 방어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마크롱 대통령의 메시지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 분위기였다. 독일 통일을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보고, 양국이 유럽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그의 발언에 공감해 현장에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픽= 이지원 기자


사실 기념식이 열린 자르브뤼켄은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곳으로 1957년 독일에 귀속되기 전까지 네 차례나 프랑스에 점령된 지역이다. 때문에 동서독 통일 이전 독일인들에게 자르브뤼켄은 ‘작은 통일’의 상징이었다. 더구나 35년 전, 프랑스가 동서독 통일에 강력 반대한 국가 중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날 마크롱 대통령 방문의 의미가 적지 않았다.

콜 총리조차 예측 못했던 '1990년 통일'

동서독의 국경이 열린 다음달인 1989년 11월 10일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문 앞 베를린장벽 위에 올라가 기뻐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0년 10월 3일 0시, 독일 전역의 교회탑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축포가 통일을 자축했다. 전날 오후 5시 동독 정부가 공식 해산되고 동서독 총리가 통일 관련 대국민 연설을 한 직후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갑작스럽게 무너지긴 했지만 1년 내에 통일이 성사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독일에선 남북한 통일이 더 빠를 것으로 봤다. 당시 남한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있을 정도로 통일을 당위로 여겼지만 독일은 그런 분위기가 전무했다. 더구나 독일 통일은 ‘2+4’라 불릴 정도로 동서독뿐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승인이 필요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통일을 위한 10개 조항’을 발표한 헬무트 콜 서독 총리마저 통일을 최소 5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로 봤다.

콜 총리의 마음을 바꾼 건 동독 주민들의 열망이었다. 동독 지역 총선거를 앞두고 드레스덴 연설에 나선 그가 동독 주민들로부터 “통일을 더 지체했다간 서독으로 집단 이주할 것”이라는 일종의 압박을 받은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이미 동독 주민 수만 명이 국경을 넘는 바람에 서독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콜 총리가 ‘통일은 미룰 수 없는 과업’으로 결론 내리면서 관련 논의가 가속화했고 동독 5개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는 흡수 통일이 이뤄졌다.

'실업'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동독

지난 3일 독일 통일 35주년 기념식이 열린 자르브뤼켄에서 시민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자르브뤼켄=정승임 특파원


갑작스러운 통일이었기에 후폭풍도 컸다. 가장 큰 난제는 실업문제였다. 동독에는 ‘실업’이란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주의체제 특성상 ‘완전고용 상태’여야 했기에 실업이 존재하면 안 됐다. 이에 통일된 독일에서 실업과 경력 단절을 맞닥뜨린 동독 주민들이 받은 충격과 좌절감은 엄청났다.

서독으로 망명한 동독인들을 지원했던 ‘마리엔펠데 긴급수용소’ 부소장 출신 베티나 에프너 박사는 지난달 16일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베를린에서 주최한 국제세미나에서 “동독에서 화물차 운전사였던 여성은 서독으로 온 뒤 직업을 잃었다”며 “10년 넘게 맥도널드에서 일해야 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과잉고용 상태였던 동독에선 여성 화물차 운전사가 흔했지만 서독에선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동독에서 받은 학위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동독 의사 자격증 소지자가 다시 의사로 활동하려면 각 주별로 심사를 새로 받아야 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에프너 박사는 “동독에서 이주한 교사들은 2년 간 추가로 교생 실습을 받아야 했다”며 “당시 서베를린에 교사가 넘쳐났기에 동독 출신 교사는 환영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김상국 독일 루트비히스하펜 경영사회대 교수는 “동독민들에게 직업은 단순 생계수단을 넘어 사회 참여, 정체성 형성을 의미했는데 통일 직후 직업을 가진 동독인의 60%가 재평가를 받아야 했다”고 밝혔다. 사회통합을 위해선 동독 주민들이 실업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이야기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비효율적으로 운영됐던 동독 기업은 통일 직후 줄도산했다. 동독민이 서독으로 대거 이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서독 마르크화 교환비율을 1대 1로 했으나 이 때문에 동독 상품은 가격경쟁력을 잃었다. 당시 동독 마르크화 가치는 서독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업률 격차는 더 벌어졌다. 통일 직후인 1991년 5.4%포인트 수준이었던 동서독 실업률 격차는 점차 상승해 2000년대 중반에도 10%포인트에 육박했다. 동독지역에 특화된 고용촉진법과 직업교육훈련 등 연방 정부가 실시한 대책이 약발을 다하면서 통일 특수는 사라진 반면 동독의 구조조정은 계속됐기 때문이다.

“여전히 동독은 낙후지역∙동독민은 2등 시민”

지난달 16일 베를린 소재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남북하나재단 국제세미나에서 카타리나 복(왼쪽) f-bb IQ 프로그램 총괄 책임자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마리엔펠데 긴급수용소’ 부소장 출신 베티나 에프너 박사. 베를린=정승임 특파원


35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2024년 기준, 동서독 실업률 격차는 2%포인트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개선됐다. 2003년 단행된 하르츠 노동개혁(파견근로 합법화∙저임금 유연 근로 허용)의 효과가 점차 나타나고 옛 동독 지역으로 정부기관 이전과 해외 기업 유치가 이뤄진 결과다.

그러나 동독에서 자란 메르켈 전 총리의 앞선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동서독 간 심리적 장벽은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았다. 1991~2021년 약 400만 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반면,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경우는 280여 명에 불과하다. 독일 전체 인구 중 동독 출신은 20%지만, 사회고위직에 진출한 비율은 12.2%(2022년 기준)에 그친다. '동독은 낙후 지역, 동독 출신은 2등 시민’이란 인식이 여전한 것이다. 올 2월 총선에서 원내 2당으로 급부상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선전도 동독민이 느끼는 사회적 박탈감이 출발점이었다.

독일의 이민자 직업 교육과 경력 인정 업무를 담당하는 카타리나 복 f-bb IQ 프로그램 총괄 책임자는 “통일 35년이 지났지만 동독에 대한 선입견이 아직도 존재한다”며 “지금도 옛 동독 유치원 교사 자격증은 옛 서독에서 인정되지 않아 재검증을 받아야 한다. 옛 동독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일 정치권 '동독특임관' 존폐 논쟁도

지난달 20일 독일 시민과 관광객들이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처음 세워졌던 베르나우 거리의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있다. 베를린=정승임 특파원


올 초 정치권에선 ‘동독 특임관’ 존폐 논쟁이 벌어졌다. 통일 직후 폐지된 내독관계부(한국의 통일부)를 대신해 동서독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설치된 직책인데 2월 총선에서 집권여당이 된 중도보수 기독민주당(CDU)이 “통일은 완결됐다”며 폐지를 추진한 것이다. 이에 CDU 연정파트너인 중도좌파 성향 사회민주당(SPD)은 “통일은 현재도 진행 중”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논쟁 끝에 SPD 소속인 올라프 숄츠 내각에서 총리실 직속이었던 동독특임관이 메르츠 내각에선 재무부 직속으로 이관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메르츠 내각 출범 이후 재무부 장관이 SPD 몫이 됐기 때문이다.

동서독 분단(41년)의 두 배에 달하는 기간 떨어진 남북한의 상황은 훨씬 복잡해 보인다. 복 책임자는 “한국의 경우, 남북 경제 격차가 더 크기 때문에 북한 주민의 경력을 인정하고 검증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베티나 박사는 “독일의 경우 한쪽(동독)이 완전히 무너져 통일이 됐기 때문에 옛 동독인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 속에 살고 있다”며 “한국도 쉽지 않겠지만 열린 마음을 갖고 북한 주민들이 걸어온 길을 인정해주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통합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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