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유일한 유품 사진첩 해체해 96점 공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화가로 불리는 나혜석의 말년은 외로움으로 점철돼 있었다. 젊은 시절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고 양육권을 잃은 그는 끝내 자녀들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혜석이 남긴 유일한 유품은 가죽 표지의 사진첩 한 권이다. 사진 96장마다 붉은 글씨로 직접 쓴 설명이 붙어 있는데 대부분이 남편과 자녀의 모습이다. 신여성으로서 가족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그가 말년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사진첩에 쏟아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경기 수원시 수원시립미술관이 열고 있는 한국 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은 바로 이 사진첩에서 출발한다. 수원 출신인 나혜석의 사진첩을 2017년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미술관은 이를 해체·복원하고 연구를 거쳐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전면 공개했다. 나혜석을 비롯해 박래현·박수근·이중섭 등 근현대 대표 작가의 회화 55점도 함께 전시된다.
사진첩에는 김우영의 일본 유학 시절부터 나혜석이 해인사에 머무른 1930년대까지의 기록이 담겼다. 나혜석이 남편과 함께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영친왕 부부 등 당대 명사와 교류한 기록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남편과 자녀 김나열·김선·김진·김건의 사진들이다.
사진 아래 한문으로 쓴 설명에는 떨리는 손끝에서 전해지는 애틋함이 배어 있다. 나혜석은 최린과의 불륜을 이유로 김우영으로부터 이혼을 당한 후 자녀와 여러 차례 만남을 시도했지만 김우영이 철저히 막았다. 한때 승려 김일엽의 도움으로 출가를 시도했지만 끝내 자식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시에 소개된 다른 작가의 작품도 가족애를 소재로 삼는다. 나혜석처럼 말년에 자녀와 만나지 못해 그리움을 그림에 담았던 이중섭의 은지화, 가족을 소재로 한 박수근과 배운성의 작품도 함께 소개됐다. 특히 눈길을 끄는 그림은 월북으로 인해 덜 알려진 작가 임군홍이 그린 남한에서의 마지막 작품 '가족'이다. 서울 명륜동 자택을 배경으로 부인과 장녀, 차남, 그리고 뱃속의 막내딸까지 한 화폭에 담았다. 임군홍은 평상시에도 애정을 담아 가족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 이 작품은 한국전쟁 발발 보름 전부터 그리다 그가 북한으로 향한 후 미완으로 남았다.
전시는 나혜석이 프랑스에서 교류한 배운성·백남순·이종우의 작품과 이혼 후 유랑기에 만났던 서진달·이응노의 작품, 식민지 시기 해외를 경험한 여성 미술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는 박래현·천경자의 작품도 소개한다. 개관 10년을 맞은 수원시립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근현대 미술의 주요 흐름과 예술가들의 삶을 한자리에 모았다. 2026년 1월 1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