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신권' 아니라 '사용권' 검수·보관
띠지·스티커엔 '검수' 관련 정보만 기재
한은 "띠지에는 돈다발 경로 정보 없어"
책임 규명 필요하지만 고의성 입증해야
'건진법사 관봉권(官封券) 묶음 띠지 유실' 사건 수사를 요구하는 정치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0일 고발장을 접수한 김건희 특별검사팀은 "특검은 정치권 하명을 받아 수사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여당은 상설특검까지 언급하고 있다. 대검찰청 수사가 진행 중이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도 고발장이 접수된 상황. 쟁점은 무엇이고, 부풀려진 의혹 제기는 없는지 살펴봤다.
①잃어버린 '띠지' 정체는
검찰과 한국은행 설명에 따르면, 관봉권은 한은이 '사용됐던 지폐들의 상태에 이상이 없으며 수량을 계수했다'고 보증한 돈다발을 뜻한다. 관봉권이라고 하면 조폐공사에서 막 찍어낸 신권(제조권)을 떠올리지만, '한은에서 다시 묶은 사용권' 역시 관봉권으로 분류된다. 한은은 일주일마다 시중은행에서 보낸 5만 원짜리 지폐(사용권) 뭉치를 받아, 상태가 좋지 않은 지폐는 파쇄하고, 파쇄한 만큼 신권을 가져온다. 돈뭉치는 100장씩 묶어 띠지로 두르고, 묶음 10개를 다시 비닐로 포장한 뒤 스티커를 붙인다. 5,000만 원 묶음은 창고에 보관되다 시중은행이 다시 돈을 찾으러 오면 원하는 만큼 빼준다.
문제의 돈다발은 서울남부지검이 지난해 12월 17일 '건진법사' 전성배씨 자택을 압수수색하며 확보했다. 1억6,500만 원(5만 원권 3,300장)의 현금 다발을 압수했는데 이 중 5,000만 원이 한은 관봉(사용권)이었다. 100장씩 띠지로 묶인 지폐 다발이 10개 있고, 스티커가 붙은 비닐 포장이 둘러싸여 있었다. 현금을 제외하고 띠지, 비닐포장, 스티커가 보존되지 않고 유실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②띠지에 담긴 정보는
유실물에는 어떤 정보가 담겼을까. 사용권 띠지에는 계수에 이상이 없다는 '검수자'의 이름만 적혀 있다. 한은 관계자는 "띠지에는 돈다발이 어느 은행으로 갔다는 정보는 없다"고 설명했다. 은행별로 맡긴 지폐(사용권)를 구분해 보관하지 않기에, 출처를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미 한 차례 시장에 유통됐던 돈이라 출처를 역추적할 방법도 없다.
함께 유실된 스티커에는 △검수 기계 식별 번호 △처리(봉인) 일시 △담당 부서 △담당자 코드 등 보다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지만, 출처 규명에는 도움이 안 되는 정보들이다. 한은은 지난 4월 남부지검 수사팀에도 이런 점을 설명했다고 한다.
사용권이 아니라 신권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까. 신권 관봉에서 띠지는 돈다발 출처 규명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띠지만으로는 어느 은행으로 흘러갔는지 알긴 어렵다. 이명박 정부 시절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서 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은 "입막음 대가로 5,000만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한은 띠지가 붙은 신권 관봉이었다. 검찰은 그러나 출고일과 출고 은행을 끝내 밝히지 못하다가, 공여자 자백으로 정체가 드러났다.
③수사관의 실수? '원형보전' 관행?
유실 책임을 두고는 진실공방이 한창이다. 띠지를 유실한 남부지검 압수계 소속 수사관은 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입법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저게 띠지가 둘러싸여서 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남부지검 수사 지휘부는 '증거물 원형 보전'을 지시했다는 취지로 증언했지만, 이 수사관은 "원형 보전은 압수수색된 현금을 계좌에 넣지 않고 금고에 보관하는 것으로 통용돼 왔다"며 "띠지 등 부수적인 것들은 특별한 지시가 있어야만 보관하는 것으로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검찰 안팎에선 '소통 착오로 빚어진 실수' '압수물 보관 관행' 등을 언급한다. 다만 띠지 유실이 수사에 엄청난 차질을 주는 건 아니라는 의견은 공통적으로 나온다. 압수계 근무 경험이 있는 한 검찰 수사관은 "현금 압수물은 금액을 정확히 세어 보관하는 데에만 중점을 둔다"며 "검사실에서 관봉 띠지가 수사에 중요하다고 봤으면 압수물 목록에 '띠지·스티커·비닐'도 기재하고 각각 증거물 번호를 매겼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④'증거인멸' 수사해야 할 사안?
유실 잘못을 누구에게, 어느 정도로 물어야 하는지도 관심사다. 대검 조사팀에 입건된 압수계 수사관 2명과 남부지검 부장·차장검사는 이날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및 증거인멸, 위증 등 혐의로 특검에 고발됐다. 증거인멸 혐의는 일부러 해당 띠지를 은폐·멸실했다는 '고의성'을 입증해야 하고, 직권남용 혐의는 '지시에 의한 조직적 은폐'를 가려야 사법처리할 수 있다.
검사실에서 관봉권 사진을 찍어뒀기 때문에 수사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20년 경력의 한 수사관은 "띠지·스티커 속 '정보'가 중요한데 파악되지 않았느냐"며 "단순 실수로 보이는 만큼 사실관계를 가린 뒤 감찰 결과에 따라 징계 여부만 정하면 될 사안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남부지검이 특검팀에 사건을 이첩하며 보낸 수사보고서에도 띠지와 스티커 유실 사실이 적시됐다.
검찰 수사 라인의 경우 현재로선 관리 책임 규명이 우선이다. 수도권 검찰청의 간부는 "사건이 불거지기 전까지 대검 지휘계통에 제대로 보고가 되지 않은 점에 대해선 책임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이들이 수사 대상이 되려면 고의를 갖고 증거 인멸을 묵인하거나 지시한 정황이 발견돼야 한다. 띠지 유실은 올해 1월 8일 담당 검사실에서 최초 인지됐으나, 상급 기관인 대검에 4월 말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팀을 지휘한 박건욱 부장검사는 국회 청문회에서 "언론 보도로 4월 하순쯤 알게 됐다. 담당 검사(2월 인사로 전출)가 내게 왜 보고를 안 했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