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뺑소니는 파렴치한 범죄다. 피해자와 가족,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국내에서 하루 평균 25건가량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다. 음주운전 뺑소니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내국인이 저지른 경우라면 어떻게든 붙잡아 처벌하면 된다. 하지만 외교관의 뺑소니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죄가 있지만 죄를 물을 수 없는 면책특권 때문이다.
□ 잊을 만하면 반복돼왔다. 3일 서울역 인근에서 택시를 들이받고 도주한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외교관이 추격해온 택시 기사를 폭행하더니 경찰의 음주 측정도 거부하며 면책특권을 주장했다. 192개국이 비준한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따라 외교관은 접수국에서 민·형사상 책임이 면제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2021년 옷 가게 점원의 뺨을 때린 주한 벨기에 대사 부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9년부터 2023년 6월까지 한국에 파견된 외교관 본인과 동반가족이 연루된 사건사고 71건 가운데 99%에 달하는 70건은 면책특권에 막혀 용의자를 구금하지도 처벌하지도 못했다.
□ 우리 외교관들도 해외에서 면책특권을 누리는 만큼 상호주의를 탓할 건 아니다. 상대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외교사절이 원활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도 면책특권은 필요하다. 문제는 죄질이 나쁘다는 것이다. 음주운전, 폭행, 성추행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외교관 개인이 아니라 파견국에 부여한 면책특권을 직무와 상관없는 범법행위에 대해서도 인정하는 셈이다. 정부 간 약속과 관례에 따른 피해를 왜 선량한 국민이 감당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 다만 파견국이 재판관할권 면제를 포기하거나 자국으로 불러들여 처벌하면 된다. 2016년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 직원이 경찰을 밀쳐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2020년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부부가 짝퉁 가방을 판매하다 적발된 사건에 대해 우리 경찰이 조사한 전례가 있다. 온두라스는 지난 6월 부산에서 한국인 남성을 강제추행하고 폭행한 혐의를 받은 외교관을 최근 소환해 법적 절차에 착수했다. 한국을 얕잡아 보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의 외교 역량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