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없다면서도 '북미 대화로 위상 높아져' 주장…외교 의지 확인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지난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의 굴욕적 결렬을 경험한 후 외교 전략에서 비핵화를 버리고 '핵보유국' 지위 강화를 추진하기로 결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최선희 외무상의 '증언'이 22일 처음 확인됐다.
다만 최 외무상은 김 총비서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세 차례의 정상회담이 "가슴 뿌듯한 정치외교전에서의 가장 큰 승리"라며 "횡포한 초대국을 정의의 힘으로 압박하는 새로운 역학관계를 구축"한 성과로 포장했다.
6년 전 트럼프 대통령이 돌발적으로 협상을 깨며 최고지도자가 '국제적 망신'을 당했음에도, 미국과의 외교, 협상은 여전히 북한의 외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관심사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같은 최 외무상의 증언은 뉴스1이 입수한 북한 노동당의 이론기관지 '근로자' 2023년 9월호에 '주체 조선의 대외적 지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절세의 위인'이라는 제목의 기고문 형식으로 실렸다. 이 잡지는 대외에 공개되는 것이 아닌 북한 내부용으로, 외교 수장이 직접 나서 북한 외교의 정당성과 새 지향점을 내부에 각인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최 외무상은 김 총비서가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2018년 4월 병진노선(핵·경제 동시 발전)의 승리를 선포한 것이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관계 구도를 펼친 것"이라며 북한 외교의 중대 분기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관심을 끌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어 "조미(북미)관계 사상 처음으로 2019년 6월 진행된 싱가포르 수뇌회담(정상회담)은 횡포한 초대국을 정의의 힘으로 압박하는 새로운 역학관계를 구축한, 우리의 전략적 지위를 만천하에 떨친 특대사변이었다"라며 "총비서 동지(김정은)가 지닌 출중한 정치 실력과 높은 국제적 권위의 일대 과시"라고 자평했다.
아울러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북미 정상의 공동선언이 도출된 것은 "1950년대 정전협정 체결에 비할 바 없는 위대한 승리"였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면서 2019년 2월 하노이에서의 북미 정상회담과, 같은 해 6월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을 가리켜 "미국을 계속 호되게 다불러대며(다그쳐) 공화국의 존엄과 위상을 만방에 떨친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당 중앙 전원회의들에서 강 대 강, 정면 승부의 대적 투쟁 원칙을 제시한 총비서 동지는 제국주의의 괴수인 미국이 우리에게 핵 포기라는 협상을 다시는 하지 못하게 하실 웅지를 안고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2022년 9월)에서 국가핵무력 정책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도록 했다"라며 "적대세력들이 망상하는 비핵화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 국가의 핵보유국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기술은 김 총비서가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실패한 뒤 외교 전략을 다시 핵무력 강화 노선으로 선회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하노이 정상회담 직전 북한과 미국은 실무진 차원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에 합의하고 정상 간 타결 방식의 회담을 진행하려 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장에서 돌연 '영변+알파'를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된 바 있다.
최 외무상은 첫 비핵화 협상 실패에 대한 김 총비서의 회고나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을 목격한 뒤 미국을 자신들이 원하는 지점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더 큰 카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아도 하노이 정상회담 때 북한이 느낀 당혹감, 굴욕감이 컸음을 보여 주는 대목으로도 읽힌다.
최 외무상은 "핵 대국으로 자처하는 나라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핵무력정책의 법제화는 적대세력들로 하여금 우리의 핵을 놓고 더는 흥정할 수 없게 만들고,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의 지위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다진 세계사적 장거"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럼에도 최 외무상은 북미 간의 외교를 자신들의 '존엄과 위상'을 과시한 성과로만 포장했다. 내부용 글에서 이같은 기술을 한 것은 북한의 관심사가 여전히 미국과의 외교에 있음을 시사한다.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로 인민들이 체감할 선물을 가져오지 못한 것에 대한 북한 내부의 의구심을 통제·관리하고, 차후에도 미국과의 외교에 나설 명분을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 총비서가 지난달 20~21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의 연설에서 "나는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면서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밝힌 것도 이러한 북한의 속내를 확인할 수 있는 발언이다.
다만 북한은 '판이 바뀌었다'는 메시지를 부각해 미국의 대북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시도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이미 수년 전부터 수립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최 외무상의 글은 북한이 러시아와의 밀착을 본격화할 때 나온 것이기도 하다. 김정은 총비서가 2023년 9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해외 순방에 나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맞춰 나온 글인 것이다. 북한이 '외교적 자신감'을 러시아와의 밀착을 통해 얻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러시아와의 밀착을 통해 북한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깨려는 '다극 체제' 구상을 본격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 외무상은 "총비서 동지께서는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계로 변화되는 국제정세 추이에 맞게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관계를 가일층 확대 발전시키고 반제자주 역량과 단결과 협력을 강화해 우리 국가의 대외적 환경을 더욱 전변시켜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 총비서는 실제 지난 9월 중국 전승절 80주년을 맞아 중국을 방문하면서 집권 후 처음으로 다자외교 무대에 섰을 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반미 연대'의 선두에 나란히 서 있다는 메시지를 부각했다.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일 80주년 때도 중국과 러시아의 고위급 인사는 물론 라오스·베트남 정상을 북한으로 초청해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모습을 보였다.
<근로자>는 1946년에 창간된 정치이론잡지로, 주로 북한 노동당의 고위 간부 및 사상이론가들이 집필해 전국의 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정책 기조를 교육하는 데 활용된다. 이를 통해 전 인민들에게 '일관된' 국가 정책을 선전하고 사상이론을 전파하는 도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