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공조·압박 강화
캄보디아와 미얀마처럼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활동해 온 중국계 사이버 범죄 조직에 국제 사회가 잇따라 철퇴를 가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이 캄보디아 ‘프린스 그룹’을 제재한 지 일주일 만에 미얀마 군부가 태국 접경 지역의 악명 높은 온라인 사기 범죄 단지 ‘KK파크’를 급습했다. 국제 사회가 공조와 압박에 나서자 동남아 각국 정부가 자국 내 중국계 범죄 조직 소탕에 앞장 서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2021년 쿠데타 이후 혼란에 빠진 미얀마내전 상황과 군부의 정치적인 계산, 중국 입김이 얽힌 ‘다층적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21일(현지시각) 미얀마 국영 매체 알린(Myanma Alinn)에 따르면 미얀마군은 지난 9월 초부터 온라인 사기, 불법 도박, 국경 간 사이버 범죄 단속 작전을 벌인 결과, 이날 태국 접경 지역인 미야와디 외곽 KK파크를 급습해 2198명을 체포했다. 동시에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 단말기 30대 등 사이버 범죄에 쓰인 통신 장비를 압수했다. 스타링크는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다. 미얀마에서 정식 라이선스를 받지 않았지만, 수백 개 단말기가 밀수돼 범죄 조직들의 핵심 통신 수단으로 쓰였다.
이번 단속 대상이 된 KK파크는 지난 5년간 미얀마에서 온라인 사기, 돈세탁, 인신매매 대명사로 불린 곳이다. 캄보디아 등지에서 성행한 태자 단지와 유사하다. 범죄 조직들은 고수익 일자리를 미끼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여기에 유인한 뒤, 사실상 감금 상태로 로맨스 스캠(연애 빙자 사기), 투자 사기 등 범죄에 강제 동원했다. 범죄 조직은 목표치를 채우지 못하면 고문과 구타를 일삼는 등 잔혹한 수법으로 ‘인간 지옥’이라 불렸다.BBC에 따르면 이곳에 감금된 인력 중에는 태국 등 인근 아시아 국가를 넘어 아프리카 국가 출신도 다수 포함됐다.
AP에 따르면 KK파크는 사실상 정부의 비호를 받는 ‘무법 도시’에 가까웠다. 급습 당시 현장에는 1층 건물 10채, 2층 건물 100채, 4층 건물 20채, 5층 건물 2채를 포함해 상점, 차고, 진료소 등 건물 수백 채가 들어서 있었다. 현지 매체 알린은 “이 복합단지 내 어떤 건물도 공식 허가, 건축 허가, 토지 소유 증명서를 찾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KK파크가 들어선 카인(Kayin)주 미야와디는 태국과 국경을 맞댄 주요 무역 도시다. 이 지역은 미얀마 군부 통제력이 완전히 미치지 않는다. 주로 여러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영향력에 따라 구역을 나눠 지배한다.
2021년 2월 발발한 군부 쿠데타는 이들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에 황금기를 열어줬다. 시민단체 ‘저스티스 포 미얀마(Justice for Myanmar)’에 따르면 KK파크 건설은 2020년에 시작됐지만, 완공과 본격적인 확장은 2021년 쿠데타 이후 이뤄졌다. 국가 행정 시스템이 마비된 틈을 타 범죄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간 셈이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는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태국-미얀마 국경 지대에 KK파크처럼 자리한 범죄 단지 수가 11곳에서 30곳으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지난 4년간 매달 축구장 8개에 해당하는 평균 5만 5000㎡씩 범죄 단지가 넓어졌다.
이번 조치는 국제 사회가 동남아 일대 사이버 범죄 조직을 겨냥해 압박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나왔다. 앞서 14일 미국과 영국은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던 중국계 범죄 조직 ‘프린스 그룹’을 제재했다. UN은 동남아시아에 기반을 둔 사기 조직이 지난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피해자들에게서만 180억~370억 달러(약 24조~50조원)를 갈취한 것으로 추정한다. AP는 이날 “캄보디아 사이버 사기단에 대한 제재로 국제 사회의 이목이 쏠린 직후 미얀마에서 단속이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중국 정부가 미얀마 군부에 지속적으로 중국계 범죄 조직 소탕을 요구해왔다는 분석도 나왔다. KK파크 배후에는 중국계 마피아가 깊숙이 연관돼 있다. BBC에 따르면 KK파크는 2020년 초, 이 지역을 통제하던 소수민족 무장단체 카렌민족연합(KNU)과 홍콩 상장사 ‘환야 인터내셔널’가 토지 임대 계약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환야 인터내셔널은 ‘부러진 이빨(Broken Tooth)’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마카오 출신 중국 폭력조직 거물 완콕코이와 연결된 회사로 알려졌다. BBC는 “미얀마 군부의 ‘최대 후원자’는 중국”이라며 “이번 급습은 거의 확실하게 중국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