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日 인기만화 ‘원피스’ 속 해적 깃발은 어떻게 전 세계 Z세대 저항 상징이 됐나

유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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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대중문화, Z세대 정치적 표현 수단으로
만화 상징 통해 부패·불평등에 항의
“시위 참여 문턱 낮추고 연대감 강화”

유명 할리우드 영화 ‘헝거게임’ 속 세 손가락 경례, ‘조커’와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하는 가면처럼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전 세계 시위 현장에는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상징이 늘 함께했다.

최근 인도네시아와 네팔 등 아시아를 휩쓰는 Z세대(199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 출생 세대) 시위 현장에 새로운 상징이 등장했다. 검은 바탕에 밀짚모자를 쓴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旗)다. 일본 인기 만화 ‘원피스(One Piece)’에서 주인공은 이 깃발을 돛대에 달고 모험을 떠난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는 아시아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겐 낯선 이 만화 깃발을 새로운 저항과 연대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인기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밀짚모자를 쓴 해골 이미지가 있는 깃발 위에 포스터를 들고 있는 젊은 인도네시아 활동가들. /연합뉴스

이 해적기는 이달 초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행정단지 싱하 두르바르에 나타났다. 정부 부패와 족벌주의에 분노한 젊은이들은 총리 퇴진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국회 의사당 격인 궁전 정문에 자신들을 상징하는 해적기를 걸었다.

24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 깃발은 1997년부터 30년 가까이 연재한 일본 만화가 오다 에이이치로의 작품 ‘원피스’에서 유래했다. ‘원피스’는 주인공 몽키 D 루피가 부패한 세계 정부와 폭력적인 지배자들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만화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밀짚모자 해적단’을 꾸려 불의에 저항하고, 자유를 찾아 항해한다. 이들은 대체로 사회 약자나 부적응자에 가깝지만, 조직적인 권력 남용에 맞서 자신들의 도덕적 잣대에 따라 싸운다. 만화 속에서 이 깃발은 억압에 맞서는 자유와 저항, 동료애를 상징한다.

2025년 8월 29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경찰청 앞에서 시위대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데 쓰이는 원피스 해적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원피스 해적기는 네팔에 앞서 지난달 인도네시아 시위에서 처음 전면에 드러났다. 인도네시아 Z세대는 의회가 의원들에게 월 5000만 루피아(약 430만원)씩 주거 수당을 지급한다고 하자 엘리트 특권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국적으로 벌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국경일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국기 게양을 독려하던 정부 방침에 반대해 원피스 해적기를 내걸었다. 지방 당국이 이 깃발을 단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원피스 해적기는 부패한 정부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는 항거의 상징이 됐다.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시위가 격해지고, 사상자까지 발생하자 의원들 혜택을 축소하거나 삭감 쪽으로 선회했다. 곧 원피스 해적기에는 저항 뿐 아니라 승리의 의미까지 담겼다.

‘승리의 부적’으로 자리 잡은 해적기는 국경을 넘어 빠르게 남아시아 전반으로 퍼졌다. 네팔 시위대는 인도네시아에서 확산된 이 깃발을 ‘젊은 반란’의 표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달부터 격렬한 시위가 진행 중인 필리핀에서도 원피스 해적기가 목격됐다. 영국 가디언은 “20일 수만 명 필리핀 국민들이 거리로 나온 가운데 원피스 해적단 깃발이 군중 위로 펄럭였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이를 “아시아 Z세대 해방의 상징”이라고 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국회의사당 격인 ‘싱하 두르바르’ 궁전에 걸린 원피스 해적기. /연합뉴스

최근 원피스 해적기는 아시아권을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Z세대 저항의 공통어가 됐다. 남아시아와 멀찌감치 떨어진 프랑스와 미국에서도 이 깃발이 나부꼈다. 프랑스에선 전역에서 열린 공공지출 삭감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대가 원피스 해적기를 들었다. 프랑스는 일본에 이어 원피스 단행본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팔리는 국가다. 미국에서는 이민 단속에 반대하는 로스앤젤레스 시위, 아프리카 코발트 광산 사용 문제로 애플을 비판하는 뉴욕 시위에서 해당 깃발이 모습을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원피스 깃발이 Z세대에게 특별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만화는 전 세계적으로 5억 부 이상 팔린 히트작이다. 기네스북은 2022년 원피스를 ‘단일 작가가 집필한 동일 만화 시리즈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작품’으로 인정했다. 2위는 2억6000만부가 팔린 ‘드래곤볼’로, 원피스에 비하면 판매량이 절반 수준에 그친다. 일본 만화 전문가 안드레아 호빈스키는 CNN에 “주인공 루피는 매사에 매우 단호하며,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본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했다. 이어 그는 “각 국 시위대가 깃발을 들 때 이 점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신임 총리가 내놓은 긴축 예산안에 반대하는 시위 현장에 등장한 원피스 해적기. /조선DB

시위를 주도한 Z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을 경험한 ‘디지털 네이티브’다. 이들은 틱톡,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로 밈(meme·유행 콘텐츠), 영상, 이미지 같은 문화적 코드를 공유한다. 같은 작품을 공유한다면 언어와 국경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스웨덴 문화 전문 매체 옴니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이해를 위하여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라고 평했다.

만화 속 캐릭터나 소품은 특정 인종이나 국적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전 세계 독자들이 쉽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다. 롤랜드 켈츠 와세다대 교수는 WSJ에 “원피스 주인공 루피는 당신이 어디에 살든, 어떤 언어를 쓰든 즉시 ‘당신만의 루피’가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원피스 해적기가 만화 팬들이 단순히 문화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코스프레(캐릭터 분장 놀이), 팬 픽션(2차 창작물), 그리고 시위 참여를 통해 의미를 직접 재창조하는 참여 문화(participatory culture)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했다. 네팔 시위 주최 측은 “Z세대 운동처럼 느껴지길 원했기 때문에 Z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슬로건과 상징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오클라호마 주립대학 누리안티 잘리 교수는 CNN에 “대중문화 상징은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그 의미를 격상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시위대가 독재에 대한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군부 쿠데타를 규탄하는 기습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만화 속에 등장하는 깃발 하나가 부패한 정권을 바꾸고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다만 학계에서는 Z세대가 기성 정치 문법을 따르는 대신, 자신들에게 익숙한 대중문화 코드를 통해 국경을 넘어 연대하고 있단 사실에 주목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는 CBC 인터뷰에서 “대중문화는 젊은이들의 시민적 상상력을 자극한다”며 “그런 상상력이 참여 정치를 가능하게 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불만을 확산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역량을 키우는 기반이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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