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남성의 위기···성평등이 답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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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교육자인 토니 포터는 자신의 책 '맨박스(MAN BOX)'에서 남자를 둘러싼 성역할 고정관념을 '맨박스'라고 소개하며 남성에게 강요되는 '남성다움'의 틀을 깨부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권한다. ⓒWikimedia


"공정한 세상을 바란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런데 이 경쟁 사회에서 여자애들이 상위권을 대부분 차지한다. 게다가 여자들은 군대도 안 간다. 좋은 자리는 여자들이 차지하며, 돈을 못 버는 남자들은 무시당한다. 게다가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당한다. 억울하다."

『민들레』 154호 '남자아이들이 위험하다'에 실린 35년간 남자중학교에서 근무한 안정선 교사가 전한 소년들의 목소리다. 성교육 활동가로서 이러한 남자 청소년의 '억울함'이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런 요즘 남성들의 호소가 특정 세대 '남성'의 문제일까? 어쩌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린 불안을 표현하는 건 아닐까?

남성의 위기, 구조적 불평등의 또 다른 얼굴

미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를 쓴 리처드 리브스는 성평등이 여성의 삶을 바꾸었지만, 남성의 삶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소년과 남자들의 문제를 논의할 때 경제적 불평등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사회 남성 문제를 인종과 계급 중심으로 살펴본 저자는 2019년 이후 여성들의 학사 학위 취득 비율이 남성보다 15% 앞지르고 있으며, 생산 설비의 자동화 등으로 남성이 종사하던 일자리는 사라져간다고 분석한다. 즉, 남성들은 더 이상 경제적 능력을 획득한 여성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성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모델이 부재한 가운데 많은 남성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의 '2024년 학업성취도 평가'에 따르면 여학생은 국어에서 남학생보다 15.1%, 영어에서 9.8% 높은 성취를 보였다. 수학은 큰 차이가 없었다. 고용 구조 역시 변화하고 있다. 성평등가족부의 '2025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상용근로자 비율은 남성 58.9%, 여성 55.1%로 비슷하며, 이는 15년 전보다 남성은 6.3%포인트, 여성은 12.0%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남성보다 빠르게 확장된 셈이다. 반면 통계청에 따르면 20~30대 남성의 1인 가구 비율은 여성보다 9.3%포인트 높다.

이처럼 경쟁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다. 학교에서는 성적에서 뒤처지고, 사회에 나와 노동시장에서는 여성들이 바짝 뒤쫓아 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활관계망에서는 남성은 소외되고 있다. 구조는 이미 변했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돌봄과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졌음에도 남성은 "남자가 돈을 벌어야지", "아내보다 적게 벌면 자존심 상하지 않냐?"와 같은 압박에 시달린다.

ⓒ민음사


성평등 시대, 남성의 삶을 재구성하려면

성평등 담론은 오랫동안 여성의 권리 신장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성들이 겪는 혼란과 부담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의 불안은 때로 '역차별'이라는 언어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나는 남성들이 느끼는 이 감정이 '여성의 약진'이 아니라, 성과 중심 경쟁사회가 만든 구조적 억울함이라고 본다. 동시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억울함'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가 요구해 온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시대적 변화의 징후라고 느낀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그 답을 '돌봄'에서 찾는다. 돌봄은 오랫동안 여성의 몫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제는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공적 가치다. 최근 돌봄의 영역으로 남성들이 진입하고 있다. 2025년 간호사 국가시험에서 남성 합격자는 4,292명으로 전체의 18.1%를 차지했고, 전체 간호사 면허자 중 남성 비율도 7%를 넘었다. 항공사 에어부산은 남자 승무원만으로 비행을 시도하며 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실험을 진행했다.

'돌봄'은 단순히 직업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성들이 일상에서 돌봄을 실천할 때, 경쟁 중심 사회의 피로를 줄이고 관계 중심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의 경쟁 체계를 그대로 둔다면 남성은 여전히 여성을 적으로 여기고, 경쟁에서 도태될 때 불안하고 억울함을 느낄 것이다. 반면 돌봄이 사회의 핵심 가치가 된다면 위계와 격차를 완화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 필요한 정책적 논의도 있다. 첫째, 노동시간 단축은 필수적이다. 돌봄을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확장하려면 개인에게 시간을 돌려줘야 한다. 둘째, 기본소득은 단순한 '공짜 돈'이 아니라 돌봄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재정적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사회복무제의 확대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청년이 일정 기간 돌봄 노동에 참여하는 제도는 공정의 새로운 형태가 될 수 있다. 이는 손익을 따지는 '공평'의 논리를 넘어, 돌봄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 체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성평등은 여성에게만 기회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맨박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부장적 부담 없이 살아갈 권리'를 되돌려준다. 성평등은 대립의 언어가 아니다. 남성 역시 변화의 주체로 서야 한다. 불안과 상처, 오래된 역할의 압박을 함께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공존과 회복의 언어로 성평등을 다시 말할 수 있다. 서로의 현실을 이해하는 그 순간, 성평등은 경쟁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으로 새로이 시작될 것이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이한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가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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