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여성징병제 논의는 여전히 '국가안보를 위해 희생하는 남성'과 '의무는 없고 보호만 받는 여성'이라는 낡은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 형식적인 성평등 요구에만 머물러 있다. 그러나 21세기 유럽의 징병제 개혁은 이 대립적 구도를 넘어, 평화·안보의 질적 개혁을 통해 '평화의 지속 (sustaining peace, 평화 생태계의 구축)'을 위한 원동력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실험이었다. 2000년 10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1325호(이하 1325 결의)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국제사회의 약속이었다.
1325 결의의 역사적 배경은 1990년대 르완다, 보스니아, 코소보 내전에서 발생한 집단적 성폭력 사건들이었다. 세계는 군사조직이 동원한 조직적 성폭력이 전쟁 수행의 전략으로 활용되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했다. 1998년 르완다 전범재판소는 "성폭력은 인류에 대한 범죄이며, 집단학살(genocide: 민족·종족·인종 또는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저지른 행위)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남성 중심의 군사·외교 질서 속에서 오랫동안 전쟁의 '부차적 피해자'로 간주하였던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세계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각성과 문제의식 아래 채택된 1325 결의는 '인간안보(human security: 군사 중심의 국가안보를 넘어 인간의 존엄·생명·일상 안전을 보호하려는 안보)'와 여성의 동등한 참여를 핵심 원칙으로 제시하며, 국제사회가 평화 협상, 분쟁 해결, 평화유지, 재건 등 평화·안보 분야에서 추구해야 할 네 가지 윤리적 규범―참여(Participation), 보호(Protection), 예방(Prevention), 구호와 복구(Relief and Recovery)―을 명문화했다. 이 결의가 여성차별철폐위원회나 여성지위위원회가 아닌, 국제 평화와 안보를 관할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채택되었다는 점은 결정적이었다. 젠더 문제를 복지나 인권의 주변 의제가 아니라 국제 평화 질서의 핵심 원리로 끌어올린 역사적 전환이었다.
1325 결의는 냉전 종식 후 유럽에서 확립된 "민주적 민간 통제(Democratic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 원칙과 맞물려, 군이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의 기반이 되었다. 이 결의문의 정신은 곧 유럽 각국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특히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325호가 제시한 WPS(여성·평화·안보) 전략의 핵심 원칙인 참여와 예방을 자국의 안보정책에 반영하며, "군이 사회의 대표성을 잃으면 정당성도 잃는다,"는 인식 아래 성중립 징병제를 도입했다.
EU 각국의 여성징병제는 여군 비율 확대보다 군의 글로벌 성평등 기준 이행에 필요한 질적 변화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여성의 군복무 비율 증가는 군이 여성에게 안전하고 의미 있는 활동 공간이 되고, 여성의 경험과 전문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인식 위에서 추진되었다. 실제로 노르웨이의 성중립 징병제 시행 이후 여군 비율은 2015년 17%에서 2022년 33.2%로 늘었다. 이 변화는 제도의 강제가 아니라, 군이 여성에게 '참여할 이유'를 제공했을 때 가능함을 보여준다.
유럽의 군대는 더 이상 전투만을 준비하는 폐쇄적 조직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협력하며 평화생태계의 구축과 신뢰 회복에 중점을 두는 민주적 공공제도로 변화하고 있다. 군은 시민의 신뢰를 얻는 법을 배우고, 내부에서 평등·책임·협력의 원리를 훈련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가 실제로 작동하는 '사회적 학교'가 된 것이다.
사회 변화를 위한 정책 설계의 묘미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미래 비전을 다양한 이해당사자들과의 민주적 의사소통과 협의에 기초한 치밀한 기획과 실행·평가·환류 주기의 반복 과정을 통해 현실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유엔에 제출하는 WPS 계획은 여전히 외교·여가부 중심의 형식적 보고에 머물고, 국방·치안·안보 영역의 구조적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청년 세대 간의 젠더 갈등이 심각한 사회적 균열로 번지고 있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며 정쟁을 일삼거나, 여전히 단기적 대책과 보여주기식 행정에 머물러 있다. 문제의 본질은 '누가 더 피해자인가'가 아니라,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논의하고 해결의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가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주요 정책 당사자들의 책임 있는 논의의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