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오래 싸우고픈 페미니스트들에게 : 들개이빨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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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더하는 말풍선]*해당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작가 제공


웹툰 작가 들빨개빨은 어느 날 가사 전체가 수학 문제 풀이 과정인 노래에 빠져버렸다. 노래를 부른 여자 뮤지션인 ★의 공연에 갔는데 초장 축제, 짚신 축제 등 행사 이름이 심상치 않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은 들빨개빨의 팬이다.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온 들빨개빨은 동성인 ★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들개이빨 작가의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이하 '부내죽')의 초반부 전개다. 이 이야기는 현실적인가?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작가 제공/카카오웹툰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제공/카카오웹툰 ​


현실적인 서사는 주로 그럴싸한 전개를 의미하곤 한다. 인과관계가 뚜렷한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보편성을 인정받은 이야기, 이런 일이 생기면 보통 저런 일이 뒤따른다는 장르적 공식 같은 것들이 현실적이라는 말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다음 회차 내용을 예상하는 것이 아예 무의미할 정도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개를 보여주는 '부내죽'의 서사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부내죽'의 댓글창에는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실화인지 궁금하다는 독자 반응이 쇄도한다. 그저 주인공의 필명과 작가의 필명이 비슷해서만은 아니다. 주인공이 앉아 있는 카페 표지판의 '이 이야기는 픽션으로 실존 인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라는 문구는 오히려 이야기가 실화임을 암시하는 메타한 유머처럼 읽히고, 인물들의 발칙함과 찌질함은 가공된 허구보다는 지나친 솔직함으로 읽힌다. 이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어이가 없지만 실화 같다. "인생은 예측불허"니까. 확률과 통계 문제의 제시문조차 무시하라고 했던 오차가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 인생이니까. 사회가 만들어낸 그럴싸함의 법칙을 전부 피해 가는 '부내죽'은 도저히 그럴듯하게 흘러가지 않는 우리 삶과 닮아서 현실적이다. 

​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제공/카카오웹툰 ​


​현실적인 길을 따르지 않는 인생에는 두려움이 따르지만, 무한한 갈림길이 주는 자유와 즐거움 역시 따른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으로 태어나 적당히 가부장제와 타협하며 생존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주인공의 멈출 줄 모르는 입담은 스스로를 비웃는 만큼 여성혐오를 비웃는다. 외모 콤플렉스와 낮은 자존감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리다가도 모든 확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랑에 힘입어 갑자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한 결정을 한다. 염소와 냉소로 무장한 소시민적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가도 사회의 불의와 부정의 초라함을 드러내며 온 힘을 다해 조소한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영감을 받으며 가장 안 그럴싸하고 가장 웃긴 서사를 꾸려나간다.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제공/카카오웹툰 ​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제공/카카오웹툰 ​


★에게 성희롱적 야유를 하는 관객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종갓집 맏며느리상과 모범적인 반성문으로 무마하는 들빨개빨. 매력적이지만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자연산 횟감을 비유로 들었다가 비건 페미니스트인 ★을 배려하지 않은 유머임을 깨닫고 자기 검열에 망신스러워하는 들빨개빨. 그는 결코 윤리적으로 완벽한 인물이 아니다. 다만 여성혐오에 분노했다가, 두려움과 자책 때문에 수그러들었다가, 다시 쭈뼛쭈뼛 저항의 언어를 찾기를 반복한다. 때로는 찌질하고 때로는 절박한 그의 모습은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일상이다. 다만 작가는 그 일상을 비극이 아닌 희극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혐오의 원리를 꿰뚫어 보며 그 초라함을 비웃을 힘. '부내죽'에서 개그는 여성이 여성혐오적 현실을 직시하고 조소하는 권능이다.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제공/카카오웹툰


들빨개빨과 ★의 입담과 연대에는 암울한 현실을 비웃으며 현실이 정해준 길에서 이탈할 힘이 있다. 이들은 슬픔에 잠겨 죽는 비극이 아니라, 박장대소하면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들춰내는 희극의 주연으로서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지금으로써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해피엔딩에 도달하려 한다. 저항의 웃음이 필요하다. 완전무결한 저항이 아니라 지속적인 저항이 필요하다. 웃으면서 오래오래 싸우고 싶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을 권한다.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제공/카카오웹툰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제공/카카오웹툰


들개이빨 작가 웹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 https://tinyurl.com/4sp9sy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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