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 사건은 거절··· “저는 탐정입니다”

임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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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23. 오전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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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명칭의 사용이 가능해진 지 5년이다. 현재 2만5000명 넘는 탐정이 활동 중이다. 스토킹 피해자 보호 탐정, 실종 반려동물 전담 탐정 등 활동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9월29일 염건령 한국범죄학연구소 소장이자 가톨릭대학교 탐정학전공 교수가 <시사IN>을 방문했다. ©시사IN 이명익


작은 아이 한 명이 들어갈 만큼 큰 배낭을 멘 염건령 탐정학 교수가 〈시사IN〉 편집국에 등장했다. 봐야 할 논문과 자료로 가방이 빵빵했다. 경찰 등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비롯해 대학원 강의까지, 그는 한 해에도 수백 번 사람들 앞에 선다. 그때마다 백팩을 메고 전국을 누빈다. 그가 다루는 분야 중 탐정과 관련된 내용도 있다. 범죄학과 범죄심리학을 연구하던 염 교수는 20년 전 우연히 한 자리에 강연을 갔다가 실재하는 탐정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탐정업이 합법이 아니던 시절, 민간 자격으로 탐정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민간 조사원이라 불렸다. 범죄를 예방하고 해결하는 데 공권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던 때였다. 당시의 만남이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다.

2018년 탐정 명칭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국내에서도 2020년 8월부터 ‘탐정’ 간판을 내걸 수 있게 됐다. 5년이 지난 현재 2만5000명 넘는 탐정이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자격증을 발급하는 협회도 수십 군데다. 직업의 성격이 음지에서 양지로 이동하면서 탐정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보험사기를 탐지하고 조사하는 보험 탐정, 도난 차량이나 차량 밀수 경로를 추적하는 자동차 탐정, 부동산 사기 피해자를 위해 증거를 수집하는 부동산 탐정, 스토킹 피해자 보호 탐정, 실종된 반려동물을 찾아주는 탐정 등 종류를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열 명 중 한 명은 여성일 정도로 여성 탐정도 늘고 있다.

일찌감치 탐정이 존재했던 영미권에서는 탐정을 ‘프라이빗 아이(Private Eye)’라고 부른다. 국가권력이나 정부기관의 조사 여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의 사각지대를 누비는 사립 탐정이란 의미다. ‘국가권력이 아니라 시민 개인의 관점에서 사건을 파헤치는 시선’이 탐정의 시선이라고 염 교수는 말한다. 20년 전 그날 이후 탐정 인력과 연구자를 양성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현재 가톨릭대 행정학과 탐정학 전공 교수이자 범죄학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탐정학 1세대 학자이기도 한 그가 최근 〈탐정의 세계〉를 출간했다. ‘훈련된 관찰자’이자 ‘걸어다니는 사회학자’인 탐정의 눈으로 본 다채로운 세상의 풍경이 담겼다. 크고 작은 사기 범죄가 횡행하는 요즘, 탐정의 시선을 갖는다는 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탐구자이자 파수꾼의 눈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탐정이 아니어도 ‘탐정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이유다.

5년 사이, 탐정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졌나?

탐정 자체가 늘어나는 게 저변 확대나 인식 개선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한다. 탐정들을 교육할 때도 스스로 탐정인 걸 밝히며 일상생활을 하라고 말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탐정일 수도 있다. 옥석은 가려야겠지만 저변이 늘어야 인식이 좋아진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탐정 제도 자체가 없었던 나라다. 그렇다고 정말 없었던 건 아니다. 보험 범죄 조사관들은 벌써 50년 역사를 갖고 있다. 보험공단에서 의료보험 사기를 잡아내는 팀도 사실 탐정이다. 일본에서 쓰이던 흥신업이라는 말이 들어와 흥신소를 차려 불법영업을 하는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탐정도 아니고 저변과도 관계가 없다. 2010년 전후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탐정 ‘미드’ ‘영드’가 들어오면서 ‘읽는 탐정’이 아니라 ‘보는 탐정’으로 바뀌었고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다

어떤 사람들이 탐정을 하려고 하나.

일단 경찰관을 꿈꾸는 젊은 세대가 있다. 경찰 채용 인원이 줄고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에 경찰이 아니어도 비슷한 일을 해보려는 것이다. 경찰에서 은퇴한 분들도 있다. 1960년대생 베이비부머 세대 퇴직자가 특히 많은데 경찰관·해양경찰관·소방관 등을 합치면 매년 4000~5000명씩 은퇴한다. 수사권과 강제권이 없지만 해오던 업무니까 해보려는 분들이다. 또 현직 때의 미제 사건을 평생 숙제로 여기는 형사들이 탐정 면허를 따기도 한다. 민간인 신분보다는 탐정이고 전직 수사관 출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좀 더 협조적이다. 또 사건 피해를 입은 사람이 또 다른 피해자를 돕기 위해 탐정이 된 케이스도 있다. 최근 공인중개사나 부동산 브로커들의 사기 증거를 수집해 피해자를 돕는 탐정을 만났는데 왜 이걸 하게 됐느냐고 물으니 스스로 피해자였다고 하더라. 추리 문학이나 탐정 문학, 만화에 심취한 분들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다른 나라를 보면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고 갈등이 증가하면서 경찰의 한계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탐정 제도가 발달했다. 한국도 그런가.

고대 그리스 시대 도시국가를 폴리스라 불렀는데 ‘행정’이라는 의미다. 무너진 도로도 보수하고 밤에 양을 지킬 사람이 필요해 따로 사람을 뽑아 마을을 관리해주던 게 공무원의 기원이다. 유럽으로 넘어오면서 치안 공무원만 따로 부른 게 ‘폴리스’다. 미국은 지역마다 그 특성에 맞는 경찰 체계를 만들었다. 동양은 절대왕정이라 경찰 시스템이 권력에 의해 운영되었다. 치안도 백성의 재산이 아니라 지배 세력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스템의 문제는 상급 기관에서 특정 범죄를 집중적으로 검거하라고 하면 수사 인력을 거기에 몰아버리는 데 있다. 테마 수사라고 하는데 다른 범죄에 투입될 인력은 부족해진다. 중앙집권제인 일본조차 경찰만으로 한계가 있어서 탐정이 발달했다.

경찰과 탐정의 일은 어떻게 다른가.

‘탐정이 왜 필요한가, 유사 경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경찰이 할 수 없거나 접근하지 못하는 부분을 탐정이 채운다. 가령 사기 피해의 경우 고소하기 전 단계에서 증거 수집이 필요하다. 경찰 입장에서도 피해자가 그냥 ‘당했다’고만 하면 수사에 애를 먹는다. 폭행상해 범죄가 줄고 경제범죄가 늘고 있기 때문에 사기가 성립하는지 안 하는지조차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들이 형사소송 전에 돈을 반환하라는 의미로 민사소송을 많이 하는데, 피고의 절대다수가 돈이 없다며 배 째라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변호사가 법원에 요청해 상대방의 재산목록을 청구해도 이미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놔서 안 나온다. 돌려놓은 자산을 추적할 수 있는 수단이 탐정뿐이다. 타고 다니는 외제차, 유흥업소 출입 흔적 등 입증할 만한 증거를 모은다.

산업기술 유출에 대응하거나 학교폭력 피해 증거를 수집하는 등 탐정의 활동 영역이 넓다.

기술 유출 사실이 노출되어버리면 기업의 주가나 자금 융통에 영향을 미친다. 공개가 안 된 상태에서 기술만 회수하든가, 유출 사실에 대해 봉인을 해야 한다. 일반적인 탐정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전직 기관원이나 관련 계통을 연구했던 분들이 한다. 그 밖에도 소송 과정에서 증거를 채집하고 정리하는 단계에서 탐정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대형 로펌에서도 조사팀을 만들어 탐정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다. 기업의 경우 내부 직원에 의한 횡령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제3자와 공조하게 된다. 감사 업무에서도 외부 용역을 쓴다. 하청업체로부터 접대를 받는 직원이 있다고 할 때 사내 감사팀이 있지만 해당 직원과 개인적 친분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아파트 단지에 차량 통행을 막는 악성 외부 주차자가 있다고 하면 동대표들이 회의를 해 누군지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반려동물 인구가 늘면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전문으로 찾아주는 탐정도 있다. 학폭 피해 증거를 수집하는 학폭 전문 탐정도 있다. 요즘 학폭은 학교 안이 아니라 학교 밖 이동경로에서 발생한다. 신체적 폭력이 아니라 정서적 폭력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 증거를 모으기가 쉽지 않다.

가스라이팅이나 스토킹 관련 의뢰가 많아지는 추세라고 했다.

스토킹 피해자가 스토킹을 당했다는 걸 입증하기가 어렵다. 두려움이 있는 상태라 상대가 다가오는 걸 사진으로 찍어둔다든지 하는 게 쉽지 않다. 탐정이 증거를 수집해 접근금지 명령의 근거로 사용하거나 전자발찌를 부착하게 할 수도 있다. 또 감시하는 탐정이 한 명 붙어 있는 자체로 안심이 된다. 집단 가스라이팅 관련 의뢰도 있다. 사이비 종교나 합숙 생활하는 다단계가 대표적이다. 학교나 직장을 그만두고 들어가 집단생활을 할 경우 위치 파악이 안 된다. 가족이 경찰에 신고하면 위치는 파악하지만 자발적 가출자라 정보 제공이 어렵다. 탐정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탐정’이라는 명칭을 내건 업체의 영업이 가능해진 2020년 8월5일, 서울 종로구 한국탐정협회에 관련 광고물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의뢰인이 스토킹 가해자인 경우도 있지 않을까.

가령 남성이 찾아와 옛사랑을 찾고 싶다고 하면 사건을 맡지 않는 게 탐정업계 불문율이다. 연인 관계나 가족관계라는 걸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오지 않으면 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탐정에게도 악의적 고객이 있다. 나쁜 목적으로 탐정을 고용하려는 경우다. 돈을 받았다고 해서 불법행위를 용인하면 범죄자가 된다. 허위 사실로 계약을 해 애먼 일을 시켰을 경우 귀책사유가 의뢰인에게 있다. 자녀를 찾아달라고 해서 찾았는데 의뢰인의 폭력으로 인해 가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럴 때도 의뢰인에게 위치를 알려줄 의무가 없다. 또 혼자 일을 처리하면 오류 발생 확률이 높기 때문에 두 명 이상 일하는 게 업계 관행이다. 심지어 의뢰인을 경찰에 고소하는 경우도 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는 왜 탐정을 찾나?

한 탐정협회에서 주관하는 강의에 갔는데 대형 기획사 부장을 만났다. 아이돌을 키워야 하는데, 과거 학교폭력 사건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피해 액수가 수십억 원에 이르기도 하기 때문에 미리 위험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아이돌이 성장한 지역에 가서 평판 조회를 하는 것이다. 연예인 지망생들의 경우 생계가 막막한데 품위 유지 계약 규정이 있으면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어렵다. 유흥업 쪽으로 빠질 수도 있는데 늦게라도 ‘뜨게’ 되면 회사 입장에선 난처하다. 한국 사회가 엔터테이너를 공인으로 여기고 남들 하는 정도의 윤리적 관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라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탐정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윤리와 도덕성이다. 탐정업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지만 보더콜리(양치기 개)처럼 경계선을 정해주는 게 중요하다. 수사 경험이 있는 분들은 준법 관념이 확실하고 기존 민간 영역 탐정들은 수사권·강제권이 없는 상태에서 일해봐서 시장의 논리를 잘 안다. 그래서 젊은 탐정과 은퇴한 수사관 탐정이 ‘콜라보’를 많이 한다. 또 협업을 잘해야 한다. 도감청 전문 탐정, 디지털 분석 탐정 등 각각의 전문 분야가 있다. 스스로 만능이라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탐정도 곤란하다. 최근 일부 탐정들이 자신이 맡은 사건을 포장해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해외로 납치되는 사람이 수천 명이라는 식으로 인터뷰를 하는 게 그 예다. 스타 탐정이 되는 건 좋지만 불안을 조장해 명성을 얻어서는 곤란하다. 사회의 공익을 생각해야 한다.

탐정에게 의뢰할 일이 있을 때 팁을 주자면?

최근 조사를 보니 고객들이 탐정을 고를 때 평균 4~5개 업체를 접촉해본다고 하더라. 그만큼 소비자도 전문성을 따져본다는 의미다. 다만 전화상으로 구두계약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직접 만나보라. 사무실 규모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사무실의 분위기라는 게 있고 그게 신뢰와도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으슥하고 캄캄한 데 사무실이 있다면 계약을 하지 않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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