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에는 여러 답이 존재하지만,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이 최근에 가장 ‘핫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간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주로 자연선택과 성선택에 근거하여 인간의 행동, 나아가 특성을 설명했다. 동물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다루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데,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강조한다는 느낌이다.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은 차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바로 인간이 가진 문화가 핵심적 차이다. 문화는 인간이 가진 특별한 행동양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과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지능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지능이 높은 걸까? 2007년 일본의 연구자들은 인간과 침팬지의 지능 대결을 기획했다. 스크린에 1부터 9까지 숫자가 여기저기 제멋대로 배치되어 나타난다. 피검자는 짧은 시간 동안 숫자의 위치를 재빨리 외워야 한다. 잠시 후 모든 숫자는 사각형으로 가려진다. 이제 피검자는 숫자의 위치를 기억하며 1부터 9까지 순서대로 사각형을 터치해야 한다. 누가 이겼을까? 안타깝게도(?) 침팬지의 승리였다. 인간이 지능의 모든 측면에서 동물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지능이 왜 중요할까? 생물학적으로 볼 때, 지능은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19세기 서양인들은 세계 곳곳을 정복하고 미지의 영역인 극지방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극한의 환경을 이겨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탐험가도 있지만,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사람도 많았다. 길을 잃은 수많은 탐험대원이 혹한의 날씨 속에 얼어 죽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 이누이트족은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유럽의 탐험대원과 북극의 이누이트는 똑같은 인간으로 동일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왜 탐험대원만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이누이트족은 혹한 속에서 살 수 있는 많은 기술을 알고 있었다. 얼음집, 카약, 방한복 만드는 법, 순록과 바다표범 사냥법 등등. 불운한 탐험대원은 이런 기술을 자신의 지능으로 알아내지 못했다. 왜 그럴까? 사실 이상한 질문이다. 이누이트족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이런 기술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이누이트족만이 알고 있는 그 기술이야말로 문화의 예다. 문화를 걷어낸 인간은 종종 생존하기조차 힘들다. 만약 탐험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누이트족에게 구출되어 오랜 시간 함께 산다면, 그 대원도 북극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알게 될 터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와 그것을 학습하는 능력이다.
침팬지를 북극에 데려다 놓아도 얼어 죽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까지는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이제 침팬지를 이누이트족과 함께 살도록 해보자. 침팬지가 생존 기술을 익혀 이누이트처럼 북극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아닐 거다. 북극은커녕 아프리카라고 해도 침팬지가 현대 도시에서 인간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는 힘들다. 인간은 문화를 학습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참조하고 모방하는 능력이 우수하다. 사실 인간의 이런 능력은 뛰어나다 못해 유별나다.
마푸체족이 옥수수에 재를 넣은 이유
건물의 입구가 오른쪽이라고 이야기해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왼쪽으로 이동하면 대개의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왼쪽으로 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게 행동하면 어딘가 불편하다고 느낀다. 이런 느낌이 본능의 일부라는 면에서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 아기조차 다른 사람의 행동을 참조한다. 아기는 처음 보는 장난감을 다룰 때, 주변 어른의 반응을 살핀다. 어른이 기쁜 기색을 보이면 장난감을 기꺼이 만진다. 아기는 장난감에 호감을 느끼다가도 어른이 공포의 반응을 보이면 자신의 태도를 바로 바꾼다. 사회적 학습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특별한 본능이자 능력이다. 사실 인간은 주변의 아무나 참조하지 않는다. 신뢰할 만한 사람, 명망 있는 사람을 참조한다. 명망과 권력은 다르다.
문화적 학습은 종종 입 닥치고 따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칠레의 마푸체족은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를 물에 끓일 때 재를 함께 넣는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냥 관습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나중에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경우 몸에 꼭 필요한 분자인 니코틴산(비타민 B3)이 결핍될 수 있다. 그래서 옥수수가 유럽에 처음 전해져 주식이 된 지역에서 니코틴산 결핍으로 발생하는 펠라그라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옥수수에 염기성 물질인 재를 넣어주면 옥수수 내에 묶여 있던 니코틴산이 분해되어 나온다. 마푸체족 사람들이 이런 과학적 사실을 알았을 리 없지만 그냥 관습을 따른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 문화적 행동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무조건 모방하는 인간의 본능은 문화적 학습에 유리하며, 생존에도 도움이 된다.
문화는 인간에게 생물학적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인간의 소화계는 다른 유인원과 비교하여 생물학적으로 특별하다. 일단 우리의 입은 정말 작다. 침팬지는 우리보다 두 배 크게 입을 벌릴 수 있다. 우리 위장의 표면적은 영장류에서 예상되는 크기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대장의 길이는 3분의 2 정도다. 먹고 소화하는 것은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도, 우리의 소화계는 전반적으로 매우 부실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음식 문화와 관련 있다. 인간은 소화과정의 일부를 몸 밖에서 진행하는 동물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자르고, 부수고, 빻고, 으깨고, 불로 조리한다. 이렇게 준비된 음식은 몸의 소화 부담을 대폭 줄여준다. 먹이를 조리하는 기술, 즉 문화는 우리의 몸을 생물학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모유에는 유당(혹은 젖당)이 들어 있다. 인간은 모유를 먹는 아기일 때에만 유당을 소화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유당을 분해하여 소화되도록 하는) 유당분해효소 합성이 중단된다. 하지만 동물 젖을 먹는 문화를 발전시킨 북유럽인의 경우, 어른이 되어서도 유당분해효소가 만들어진다. 북유럽인의 유전자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동물 젖을 별로 먹지 않았던 우리 동아시아인의 경우, 성인이 되어서도 유당분해효소를 보유한 사람이 별로 없다. 이런 사람이 우유를 마시면 유당불내증으로 고생할 수 있다. 사실 동아시아인에게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은 병이 아니라 정상이다. 오히려 우유를 먹어도 이상 없는 사람이 유당가내증(乳糖可耐症)에 걸렸다고 보는 편이 옳다. 이처럼 문화는 유전자를 변화시킨다.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문화적 속성은 다른 사람을 참조하고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규범을 내면화하고 규범 위반자를 처벌하려는 성향까지 우리 뇌에 심어놓았다. 3세 아이들에게 낯선 물건들을 보여주며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일종의 규범이다. 그러면 사회적 참조에 능한 아이들은 대개 알려준 방법으로만 물건을 사용한다. 이제 아이들 집단에 손으로 조종할 수 있는 손인형을 넣어보자. 아이들은 손인형을 집단의 구성원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만약 (손으로 조종하는) 손인형이 물건을 규정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손인형에게 “그렇게 하는 거 아냐!”라고 소리치며 항의한다. 손인형은 정해진 규범을 어겼으나 완전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물건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렇게 반응한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지가 아니라 규범 준수 여부였다. 어른이 손인형의 규범 위반에 대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기에 아이들의 항의는 어른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즉, 이유를 몰라도 규범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이다.
가축이 야생에서 살 수 없듯이
때로 인간은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다. 왜 그럴까? 대개의 답은 이런 식이다. 인간은 합리적이다.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 또는, 인간은 이타적으로 행동할 만큼 이기적이다. 남을 돕거나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이익을 더 크게 하는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행위라는 거다. 하지만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그냥 규범을 따르려는 성향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수 있다. 마푸체족의 옥수수 이야기처럼 구성원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관습을 따른다. 덕분에 펠라그라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귀찮고 이유도 모르지만 일단 규범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대개 유리하다. 결국 규범을 따르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그냥 우리의 본성일 뿐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문화 없이 생존할 수 없다. 문화적 종으로서 인간은 주변 사람, 특히 명망 있는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사회규범을 따르며 규범 위반자를 처벌하려는 본성이 있다. 인간의 문화는 자신을 생물학적으로 변형시키기까지 했다. 인간은 이렇게 오랜 시간 자신을 문화로 길들여 왔는지 모른다. 인간이야말로 가장 성공적으로 가축화된 동물인 셈이다. 가축이 야생에서 살 수 없듯이, 인간은 문화라는 울타리 밖에서 살 수 없다. 어떤 동물도 인간만큼 문화적이지 않다. 결국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강하게 문화와 함께 결합하여 공진화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참고 문헌: 〈호모 사피엔스〉 조지프 헨릭 지음, 주명진·이병권 옮김, 21세기북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