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9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조선인 희생자의 유족들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대상으로 다시 소송에 나섰다. 이들은 희생자의 야스쿠니 신사 무단 합사 철회, 일본 정부의 희생자 정보제공 고지 철회, 사죄문 교부, 피합사자 한 명당 원고에게 위자료 120만 엔(약 1131만원) 지급을 요구한다.
이희자(82)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대표는 2001년에 시작해 2011년 최종 패소한 재한군인·군속 소송, 2025년 1월 최종 패소한 야스쿠니 신사 무단 합사 철회 1·2차 소송(1차 2007년, 2차 2013년 제소)을 주도해왔다. 재한군인·군속 소송 원고이자 2007년에 제소했던 1차 소송 원고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막 새로 시작하는 3차 소송을 옆에서 돕고 있다.
이 대표의 아버지 이사현은 1944년 나이 스물셋에 일본에 강제징집되었고 전쟁 중이던 1945년 중국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현재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1989년 7월 당시 서울 용산에 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을 찾아간 것이 시작이었다. 1992년, 이 대표는 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아버지의 한 줄짜리 사망 기록을 찾아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후 보상 운동단체 사람들을 붙들어가며 도움을 청했다. 1997년 그렇게 얻게 된 ‘유수명부(강제 징용된 한국인 군인·군속 명부)’ 속 아버지의 이름 옆에는 ‘합사제(合祀濟)’라는 한자가 붙어 있었다. “일본 활동가에게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희자씨 아버님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이 대표는 말했다. “일본이 강제로 전쟁에 끌고 가서 사람을 죽여놓고 가족한테 사망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그래 놓고 자기네 마음대로 야스쿠니에 합사해서 (일본을 위해 죽은 이라며) 추모한다는 게 말이 되나? 도무지 용서가 안 됐다.”
“당신 아버지는 천황을 위해 죽었다”
1959년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는 조선인 희생자를 당시 식민지의 국민이었다는 이유로 일본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그중에는 전쟁에 나갔다가 사망했다며 무단으로 합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생존해 있던 강제동원 피해자도 있었다. 일본 정부와 신사 측은 이름을 올리면서 합사된 당사자나 희생자의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희자 대표 아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부터 합사된 사실까지 전부 스스로 파악해야 했다.
이후 이 대표는 몇 차례 일본에 갈 때마다 신사에 찾아가 합사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때마다 신사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시 일본인이었고 천황을 위해 죽었으니, 합사는 정당하다”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지면 모두가 하나의 신이 되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다. 이름을 빼는 일은 하나의 신체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합사 이래 특정인의 이름을 사후에 뺀 적이 없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 후보가 4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일본에 의해 전쟁 피해를 겪은 한국을 비롯해 주변 아시아 국가에서 반발이 컸다. 이를 계기로 이희자씨를 포함해 희생자 유족과 피해 생존자들이 힘을 합쳐 무단 합사 철회를 요구하게 되었다. 2001년 6월29일,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군인·군속 전체를 아우르는 소송을 시작했다. 이른바 ‘재한군인·군속 소송’은 재한군인·군속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으로 구성된 원고 414명이 신사 합사 철회뿐 아니라 강제동원에 대한 손해배상, 유골 반환 등을 총망라해 요구한 ‘전후 보상 재판의 총결산’과도 같은 소송이다.
이후 이 소송은 다시 야스쿠니 합사 철회에만 집중한 두 차례 소송(2007년 1차 소송 원고 11명, 2013년 2차 소송 원고 23명)으로 이어졌다. 이희자 대표는 재한군인·군속 소송과 1차 소송에 원고로 참여했다.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재한군인·군속 소송과 1·2차 무단 합사 철회 소송 전부 ‘기각’ 결정이 내려지면서 최종 패소했다. 일본 재판부는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시설이기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정교분리의 원칙)’ ‘사건 발생(합사일) 후 20년으로 정해진 제척기간(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기간)이 지났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설명에는 모순된 점이 많았다. 1950~1970년대 당시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에 적극적으로 전몰자(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에 대한 정보제공 행위를 해왔다. 또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합사 명부를 넘긴 게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초여서, 생존 희생자와 유족은 그 이전에 합사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었다.
올해 1월17일 2차 소송이 최종 패소했지만 결실이 아예 없진 않았다. 최고재판소 4인 중 한 명인 미우라 마모루 재판관이 처음으로 소 ‘기각’에 대해 장문의 반대의견을 낸 것이다. 판결문 18쪽 중 표제 부분과 2쪽 남짓한 기각 설명을 제외하면 반대의견만 장장 12쪽에 달한다.
미우라 재판관은 ‘(일본 정부가 30년간 전몰자 명단을 야스쿠니 신사에 제공한 것이 정교분리 원칙 위반이라는) 유족의 주장을 전제로 한다면 헌법이 정한 정교분리 규정에 어긋날 가능성이 있다’며 ‘국가는 합사를 원하지 않는 (한국인) 유족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상정하면서 합사를 추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전제로 하면 국가의 책임은 매우 무겁다’라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제척기간이 지났음을 이유로 기각한 다수의견과 달리 ‘유족이 야스쿠니 신사에 희생자가 합사된 사실을 제척기간이 끝난 1990년대 후반까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함을 밝혔다. 소송을 제기한 유족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일본 시민단체 ‘야스쿠니무단합사철폐소송’의 사무국장인 야마모토 나오요시는 이에 대해 한국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간행물 〈역사와 책임〉 제16호(2025년)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하고 합사 행위에 대한 협력을 무분별하게 계속하여 유족들의 인격적 이익을 침해한 것을 엄중히 단죄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며, 당사자의 소송상 지위를 공평히 고려하여 제척기간 적용을 제한하였다는 점에서 향후 같은 종류의 소송을 다투는 데 있어 선례적 가치를 지닌다.’
지난 1월의 2차 소송 최종 패소는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보수 신문을 포함해 일본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다. 일본의 진보 성향 일간지 〈도쿄신문〉은 “야스쿠니 합사 판결 ‘정교일체’ 의혹 풀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2월6일자 사설에서 “‘시간의 벽’으로 위헌성 판단을 덮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최고재판소는 헌법 판단에서 도피하지 말고, ‘헌법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라고 평가했다. 위헌의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도 일본 재판부가 ‘제척기간’을 이유로 충분한 심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한·일 관계의 미래가 중요하다면
9월19일, 야스쿠니 무단 합사 철회 3차 소송이 시작됐다. 무단으로 본인 이름이 합사된 생존 희생자(1세대)와 희생자의 자녀(2세대)가 원고였던 1·2차 소송과 달리 이번 소송은 희생자의 손주인 3세대가 주 원고로 참여한다. 원고는 총 6명이다. 희생자 박헌태의 친손주 박선엽(56)·A·B씨 삼남매, 희생자 이희경의 외손주 C씨, 희생자 박만수의 외손주 D씨, 희생자 이낙호의 친손주 E씨다. 대부분 1·2차 소송 당시 원고였던 2세대의 자녀들이다.
1차 소송 원고로 참여했던 이희자 대표는 이번 소송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설명한다. “처음으로 손주 세대가 참여하는 소송이다. 2001년부터 25년간 소송을 진행해오는 동안 몇 번이나 패소했지만, 올해 1월 최고재판소에서 처음으로 일본 재판부의 다수 의견에 대한 반대의견을 받아냈다. (보수적인) 일본 재판부를 상대로 이런 의견을 받아낼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것을 희망의 씨앗으로 삼고 계속해서 3세대를 중심으로 이 싸움을 이어가려 한다.”
8월23일 이재명 대통령은, 현재는 사임 의사를 밝힌 당시 이시바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하며 한·일 관계의 미래를 말했다. 이재명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이희자 대표는 “국제 정세상 어려운 시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라며 운을 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관계에서 ‘강제동원’이라는 문제는 이대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래를 말할 순 없다고 본다.”
9월19일 오후 3시, 이희자 대표는 희생자 박헌태의 손주 박선엽씨와 함께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장을 낸 자리에 동행했다. 소송단은 소장을 제출한 후 오후 4시께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송에 나선 박헌태의 손자 박선엽씨는 기자회견에서 “할아버지는 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가서 원치 않는 죽음을 당했고, 가해자의 논리가 녹아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나카하라 헌태’라는 창씨개명 이름으로) 무단 합사돼 있다”라며, “아버지 세대가 해온 일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 심정으로 소송에 임하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