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섭 지음
도서출판 말 펴냄
최진섭의 〈남정현의 삶과 문학〉(도서출판 말, 2025)은 2020년 87세의 나이로 타계한 소설가 남정현에 대한 평전이다. 그는 스물다섯 살 때이던 1958년 〈자유문학〉에 단편 ‘경고구역’을 발표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남정현은 작품을 통해 외세·반공 독재·국가보안법이라는 세 가지 적과 싸웠다. 그에게 이 적들은 한 몸이었으며, 그 몸의 머리 또는 뇌수는 미국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알레고리를, 기법적으로는 성과 정치적 소재의 결합을 애용했던 남정현의 등단작에는 아내에게 성적 주도권을 빼앗긴 무기력한 오빠와 양공주인 여동생이 나온다. 페미니즘 비평은 이런 설정에서 거세당한 식민지 남성(작가)의 열등감과 지배욕을 읽는다. 외세에 권력을 빼앗긴 식민지 남성은 자신들이 어머니·아내·여동생을 보호(지배)할 수 있어야만 정상 사회이며 주권국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가부장 논리다. 그런데 이런 비평은 다원적인 접근이 필요한 문학작품에 이분법(흑백논리)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대문학〉 1965년 3월호에 발표한 ‘분지(糞地)’는 남정현에게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목을 안겼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던 홍만수의 어머니는 해방이 된 직후 미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백인 상사 스피드에게 겁탈을 당하고 미쳐서 죽는다. 열 살인 홍만수는 여동생 분이와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다가 군대에 가게 되는데, 제대를 하고 돌아와 보니 분이가 스피드와 함께 살고 있다. 스피드는 미국 여성의 몸과 구조가 다르다고 분이를 늘 구박했다. 스피드의 아내가 한국을 방문하자, 홍만수는 미국 여성의 신체 구조를 보려고 그녀를 향미산(向美山)으로 납치한다. 간신히 산기슭으로 도망친 스피드의 아내는 겁탈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미국 국방성은 홍만수가 숨어 있는 향미산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홍만수가 홍길동의 10대손이라는 설정, 홍만수가 죽은 어머니와 대화를 하는 식의 이야기 진행, 미국이 한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 핵폭탄을 터뜨린다는 결말, 그리고 홍만수가 마지막으로 한 말(“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 등을 종합하면 ‘분지’는 판타지임이 분명하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이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갤리온, 2006)에 썼던 그대로, 해방 이후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1960년대 한국 문화에서 거세된 남성이 자신의 남근적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자리는 깡패들이 활개 치는 어두침침한 뒷골목, 초시대적인 무협의 도원경(桃源境), 사극 속의 역사적 결전지, 해학적 설화 공간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순수한 판타지이기만 할까. 1953년 10월1일, 미국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한국 정부는 미군 범죄에 관한 미군 지위협정(소파·SOFA) 체결을 원했으나 미국은 응하지 않았다. 1960년대 초, 미군부대 주변에서는 미군의 한국인 살상, 사형(私刑), 성범죄, 인권유린이 끊이지 않았다. 미군의 만행으로 한국 여론이 악화되자 미국은 비로소 SOFA 체결에 나섰다. ‘분지’가 발표되고 이듬해인 1966년 7월 SOFA가 체결됐으나, SOFA는 미군 피의자를 한국의 사법권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미군이 누리는 치외법권이 판타지를 사실주의적이게 한다.
‘분지’에 대해 글을 쓴 평론가 열 명 중 여덟 명은 홍만수가 스피드 부인을 강간했다고 전제한다. 명백한 오독이다. 그가 강간했다고 단정한 것은 미국 국방성의 일방적 선전이다. 이 소설은 홍만수가 핵폭탄을 맞기 20분 전에, 죽은 어머니에게 그동안의 일생을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부인하는 그의 말에 더 신뢰가 간다. 이 작품은 1960년대 한국인의 의식 수준에서는 “상상을 초월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한·미 동맹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1960년대보다 늘어난 지금(적어도 그때는 삼일절이나 광복절 성조기를 들고나오지는 않았다), 이 소설은 발표 당시보다 더 충격적이다.
분단문학이 희석시킨 것
김요섭의 〈살아남은 자의 글쓰기〉(삶창, 2025)는 한국 문학에 ‘제노사이드 문학’이라는 개념과 범주를 제시하는 역작이다. 제노사이드(Genocide)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는 한 지역 안의 지배적인 인종이나 다수 종파가 같은 지역의 소수인종이나 종파를 근절하려는 총체적 파괴 행위를 뜻한다. 1915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아르메니아인에게 가한 인종청소,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유럽 내 유대인을 표적으로 했던 절멸 계획,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건국되면서 그 지역의 팔레스타인인을 살상하고 추방한 나크바(대재앙), 2017년 미얀마 군부가 벌인 로힝야족 토벌이 대표적 사례다. 상식적인 제노사이드 이해에는 특정 인종과 종교를 가진 소수에게 가해지는 살상에 잘못된 명분(‘종교가 다르니까’ ‘인종이 다르니까’)을 부여해줄 위험과, 국가가 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자국민에게 자행한 의도적 살상을 간과하는 허점이 있다.
새로운 기준이 될 제노사이드 이론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근대 국민국가가 국가를 창출하고 정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사회공학의 수단이다. 국민국가의 설계자들은 건국 초창기에 (또는 기존 권력이 ‘재건국’을 통해 위기를 돌파할 필요가 있을 때)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고, 그렇지 못한 비국민을 걸러내기 위해 제노사이드를 벌인다. 한국 뉴라이트가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하는 이승만 시절에 대구 10월 사태,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과 같은 대형 학살 사건이 유독 많이 일어난 이유다. 이와 유사한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생긴 제3세계의 신생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졌는데, 신생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이 벌이는 냉전 속에서 어느 한쪽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해야만 했기에 제노사이드라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반대자를 솎아내려 했다.
냉전이 해체되자 제노사이드를 통해 국가를 창출했던 모든 나라에서 과거사 문제가 분출했다(‘이행기 정의’ 국면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1987년 제도적 민주화가 이룩되면서 공식 역사가 억눌러온 국가 폭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역사학계와 사회학계는 제노사이드라는 용어가 가진 상식적 이해를 조금씩 해체하고 있는 반면, 문학계에서는 분단문학이라는 광의의 개념이 김원일·박완서·현기영·임철우 작품의 핵심을 차지하는 제노사이드의 실체를 희석시켜왔다. 기존 분단문학 연구가 제노사이드 문학으로 명명된 작품 속에 나오는 제사와 매장 모티프를 가족주의와 샤머니즘으로 격하시켜온 해석 관행은 번복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