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 비밥〉 이후, 고통이 사라진 세상 [연휴 정주행 추천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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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04. 오전 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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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넷플릭스 최초로 3억 뷰를 돌파했고 얼마 전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은 약 500만 관객을 모았다. 모두 애니메이션이다. 이어서 볼만한 애니메이션을 찾고 있거나, 다양한 ‘국적’의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평론가들이 꼽은 작품 네 편을 추천한다. 두 시간짜리 영화와 TV 시리즈가 섞여 있다. 유난히 긴 추석 연휴, 몰아서 보기 좋은 분량이다.

<LAZARUS 라자로>는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신작이다.


문득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이란 용어가 무척 낯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1990년대에 절정을 이룬 일본 애니메이션은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전 세계가 함께 열광하던 콘텐츠였다. 각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만 떠올려봐도 그 간극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1990년대 후반의 몇몇 작품은 끈질기게 생명력을 연장해 때때로 새로운 세대까지 아우르곤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카우보이 비밥〉(1998, 이하 〈비밥〉)이다. 실사화된 시리즈에 대한 반감이 일정 부분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의 특별한 질감이 낡기는커녕 오히려 새롭게 느껴졌다. 우리에게도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이름을 처음 알린 〈비밥〉은 진득하면서도 쿨한 정서, 미래 세계와 복고적인 감각처럼 상충하는 요소들을 함께 담아낸 당대 가장 멋진 재패니메이션으로 기억된다.

와타나베 감독의 신작 〈LAZARUS 라자로〉(2025)는 〈비밥〉의 재림을 목표한 작품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주목받았다. 배경은 우주가 아닌 2052년의 지구라지만, 요소요소 삽입된 재즈 BGM과 실루엣으로 처리한 오프닝은 물론 캐릭터마저 비밥호 승무원들과 정확히 매치될 만큼 매우 닮았다. 그럼에도 순순히 ‘제2의 〈비밥〉’이 될 생각은 없다는 듯 설계한 디스토피아만은 무척 새롭다. 천재 뇌신경학자 스키너가 발명한 진통제 ‘하프나’에 의해 모든 인류가 고통에서 해방된 세계. 여기서 고통은 단순히 신체적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사람들은 하프나를 남용함으로써 정말로 아무런 고통이 존재하지 않은 세계가 도래한다. 그렇게 3년 후, 인류의 구원자인 줄 알았던 스키너가 돌연 하프나의 변이를 알린다. 앞으로 30일 후 첫 복용자가 사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류는 절멸할 것이라고. 세계는 곧 혼란에 빠지고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잠적한 스키너를 30일 안에 찾아내야 한다. 전 지구 단위 숨바꼭질이 시작된 가운데 NSA(미국 국가안보국) 산하 비밀 에이전트 팀 ‘라자로’가 스키너의 행방을 추적한다.

라자로 멤버 5명은 각각 다른 특기를 활용해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스키너의 단서를 모은다. 그중 메인 주인공인 악셀의 활약이 가장 도드라진다. 특기인 파쿠르를 활용해 빌딩 따위는 가볍게 오르내리며 숨가쁜 추격과 도주가 이어진다. 〈존 윅〉 시리즈를 연출한 채드 스타헬스키와의 협업을 통해 구현했다. 스턴트 팀이 구상하고 촬영한 영상을 참조해 만든 액션이 전에 없던 독특한 장면들을 여러 차례 수놓는다.

스키너를 쫓으며 드러나는 세계 역시 ‘고통이 사라진 세상’이란 전제가 지독한 농담처럼 들릴 만큼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을 자처한다. 해수면이 상승해 섬은 가라앉고, 파란 하늘을 보고도 머지않아 사라질 풍경임을 곱씹으며 당면한 기후위기를 전시한다. 가난과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해 대도시에서도 노숙자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인종차별과 부를 악용한 착취가 버젓이 벌어지는 데다 국가 간 긴장감도 일소되지 않았다. 특히 작중 내내 이어지는 라자로 팀과 미 육군 정보부의 대치가 대량학살 무기 개발을 둘러싼 진실을 향하면서 그 함의는 더욱 분명해진다. 라자로 팀이 전 세계 여기저기서 목도한 건, 스키너의 절망을 초래한 인류라는 존재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매 화 무겁게 남는다. 더욱이 라자로 팀의 추적은 13화 내내 거의 모든 과정이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단서가 또 다른 단서로 이어지며 마침내 성과를 내면서, ‘고통은 성장을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란 거대한 은유가 드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인류의 미래를 긍정하는 단초가 된다.

물론 급박한 작중 시간제한이 무색하게 주요 캐릭터의 과거사까지 들여다보는 연출은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특히 상대적으로 끈끈한 동료애 덕분에 때때로 명랑한 기운이 앞서는 것 또한 〈비밥〉 팬에게는 약점처럼 느껴질 법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힘을 그러모으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한 조각 희망의 가치만은 독특한 액션과 더불어 충분히 즐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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