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 후 재혼 금지하는 연금법? [세상에 이런 법이]

입력
수정 2025.09.20. 오전 8:33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우리가 자주 하고 듣는 말. 네, 그런 법은 많습니다. 변호사들이 민형사 사건 등 법 세계를 통해 우리 사회 자화상을 담아냅니다.
배우자 사망 후 재혼 사실이 알려지면 국민연금법상 유족연금 자격이 박탈된다. ©시사IN 이명익


배우자가 사망한 뒤에 재혼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재혼 사실이 알려지면 전 배우자와 유족 관계가 끊겨 유족연금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유족연금을 받는 대가로 혼인할 자유를 침해받는 것이다.

김영희씨(가명)는 남편 A씨가 사망하자, 국민연금공단에서 매달 약 30만원씩 유족연금을 받았다. 김씨는 그 후 약 10년이 흘러 다른 남성 B씨를 만났고, B씨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김씨가 B씨와 재혼하면, 더 이상 A씨 유족이 아니므로 유족연금이 박탈된다. 김영희씨는 B씨와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다.

문제는 재혼의 범위에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김영희씨는 B씨와의 사실혼 관계마저 숨기고 살아야 했다. 사실혼 관계가 발각되면, 유족연금이 중단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받은 유족연금도 일정 부분 반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법에 따르면 ‘배우자인 수급권자가 재혼한 때’에 ‘유족연금 수급권은 소멸한다’라고 되어 있으며(국민연금법 제75조 제1항 제2호), 수급권 소멸 사유를 신고하지 아니하거나 늦게 신고하면 급여를 환수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국민연금법 제57조 제1항 제2호).

비단 국민연금만의 문제는 아니다. 공무원연금법·군인연금법·사립학교교직원연금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 유족연금을 규정한 법률 대부분이 배우자가 재혼하면 유족연금 지급을 중단시키고, 받은 유족연금마저 환수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 재혼을 사실상 금지하는 법률이 시행 중인 셈이다.

2022년 헌법재판소(헌재)는 ‘재혼으로 유족연금 수급권이 상실되는 법률’이 위헌인지에 대해 두 번이나 판단했다. 2022년 8월 공무원연금법, 2022년 9월 군인연금법에 대해 약 한 달 간격으로 판단했다. 헌법재판소는 두 번 모두 5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합헌 결정을 내린 헌재 재판관 5명의 주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는 한정된 재원 안에서는 많은 유족을 보호해야 하므로 유족의 범위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둘째, 유족연금은 배우자 사망으로 인한 소득 상실로부터 유족들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사회보장적 성격이 강하다. 셋째, 부부는 상호 부양할 의무를 지는데, 재혼해서 새로운 부양 관계가 형성되어 사적 부양이 가능하기에 굳이 유족연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배우자는 혼인 기간 내내 연금 형성에 기여한 사람



반면 위헌 의견을 제시한 헌재 재판관 4명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배우자는 혼인 기간 내내 연금 형성에 기여한 사람이므로 배우자의 재산적 기여를 고려하지 않았다. 둘째, 배우자가 재혼으로 부양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족급여를 영구히 박탈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셋째, 재혼 후 다시 사별한 경우 등에는 유족연금 수급권이 부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한정된 재원 범위 내에서도 얼마든지 배우자를 보호할 방안이 있음에도 아무런 보호조치가 없다.’

이런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재혼이나 사실혼을 신고하지 않고 유족연금을 받다가 뒤늦게 환수 처분을 받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국민연금법 등 각종 연금 관련 법률에 여러 위헌 요소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배우자가 사망한 뒤 재혼을 사실상 금지하는 것은 혼인의 자유를 현저히 침해하는 위헌적 법률이다. 이혼 후 재혼한 경우와 사별 후 재혼 경우를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고 있으므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법률에 해당한다. 이혼 후 재혼한 배우자는 기여도에 따라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사별 후 재혼한 배우자는 현행법상 유족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22년 헌재 합헌 결정 이후, 재혼한 배우자의 유족연금 수급권 상실 규정이 헌법재판소에 다시 계류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시간문제일 뿐, 재혼을 사실상 금지하는 관련 법률은 헌법재판소에서 조만간 위헌결정을 받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