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마법의 단어였다. 이 단어가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우려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정상회담 직전, 미국이 정상회담을 취소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한·미 정상회담을 3시간 앞두고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SNS 메시지는 한국 국민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숙청(Purge)이나 혁명(Revolution)이 일어난 것 같다”라는 글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글의 취지를 묻는 취재진 질문에 “한국의 새 정부가 최근 며칠 동안 교회에 대해 매우 잔인한 압수수색을 벌이고 심지어 우리 군사기지까지 들어가 정보를 수집했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 메시지를 접한 이재명 대통령실 참모들은, 지난 2월 공개적인 설전을 벌이며 파국으로 끝난 트럼프-젤렌스키 회담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처럼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에서 이뤄진 정상회담 때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만드는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가 되겠다”라고 말했다. 순간 트럼프 대통령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피스 메이커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사에서 피스 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피스 메이커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소망에 대한 응원인 셈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SNS 메시지에 사용한 ‘숙청’ ‘혁명’ ‘교회 압수수색’ ‘미군기지 정보수집’과 같은 단어를 꺼낸 의도는 무엇일까?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비수와 같은 협상 수단으로 보인다. 그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정상회담이 흐르지 않을 경우, 협상을 흔들 비수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 대통령의 피스 메이커 발언은 비수를 무력화하는 한편 한반도 문제로 의제를 바꾼 효과를 냈다. 피스 메이커 발언 이후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북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말문이 터진 듯 김 위원장과의 회담을 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북한과 대화를 위한 구체적 제안은 단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가령 북한이 반발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 연기 등 협상용 카드를 꺼낼 수도 있었지만 김정은 위원장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기 위한 그 어떤 카드도 내비치지 않았다. 특유의 본인 자랑만 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협상의 본무대가 만들어지기 전에 카드를 내보이지 않으려는 협상가다운 태도로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피스 메이커’ 인정 욕구가 허황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노력에 따라 임기가 끝나는 2029년 1월 피스 메이커라는 영예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에게 이 영예를 안겨줄 가장 중요한 관문이 바로 북한이다. 역설적으로 북한의 폐쇄적인 권위주의 체제나 핵 개발 때문에 북한과 대화해서 성과를 거두면 반대급부로 그에게 피스 메이커 이미지를 안겨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세 차례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며 그 파급력을 체험했다. 북·미 정상회담 성사 자체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바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언급 대목이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이었다. 우리 미국도 곧 올림픽을 주최할 예정이라 기쁘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공하는 데 나도 함께할 수 있어서 매우 영광이었다”라고 말했다.
평창에서 LA까지, 트럼프의 계획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올림픽은 2028년 열릴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이다. 평창올림픽을 회고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 LA 올림픽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김정은 위원장과 통화해서 북한을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장이지만 피스 메이커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평창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으로 이끈 자신이 LA 올림픽도 평화 올림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내보인 셈이다.
8월5일(현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LA 올림픽 태스크포스(TF) 발족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할 때도 올림픽 TF를 만들었다. 당시 책임자가 앨 고어 부통령이었다.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의장을 맡았다. 부의장은 밴스 부통령이다.
이번 TF 구성의 목적은 LA 올림픽을 ‘안전하고, 순조로우며,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행사’로 만드는 것이다. 2028년 7월14~30일 열리는 LA 올림픽이 끝나면 그해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이어진다. 피스 메이커를 향한 트럼프의 꿈은 이렇게 자신의 임기 마지막 해까지 할 일을 계획하고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피스 메이커가 되라고 권하고, 자신은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고 말한 것은 남북 관계의 현주소 때문이다. 남북 관계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역대 한국 정부가 추구해온 원칙이었다. 미국 정부가 이를 뒷받침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였다. 1998년 6월9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만났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한 바로 그 자리다. 이때 클린턴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으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였다. 김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의 지지가 임기 첫해부터 햇볕정책이 힘을 받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햇볕정책과 운전자론은 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운전자론을 더욱 강조하며 북한과 미국이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었고, 이후 코로나19까지 발생하면서 북한은 대화의 문을 닫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자력갱생과 정면 돌파를 내세웠다. 2021년 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5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국방과 경제 두 부문이 핵심이었다. 이 5개년 계획 기간인 2023년 북한은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두 개의 적대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이 노선에 따라 북한은 남북 대화를 완전히 단절시켰다.
8월14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서울의 희망은 어리석은 꿈에 불과하다’라는 담화에서 “세상에서 제일 적대적인 국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 변화를 기대하거나 점치는 것은 사막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라는 험담을 쏟아내었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 확성기 철거 등 대북 유화정책 직후 이렇게까지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김여정 부부장의 발언은 냉혹했다. 8월19일 김여정 부부장은 외무성 주요 국장들과 협의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위인이 아니다”라며 혹평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김여정 부부장의 발언은 한국에 대한 발언과 비교하면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7월28일 김 부부장은 한국과 미국을 비판하는 각기 다른 두 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는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반면 미국에 대해선 비판적 논지를 전개하면서도 “우리 국가수반과 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라며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더구나 두 담화 모두 7월28일 작성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보도됐는데, 대남 담화는 7월28일에, 대미 담화는 7월29일 발표하는 등 보도 날짜를 달리하는 기술을 부렸다. 미국을 향한 담화만 하루 늦게 공개해, 미국에 대한 유화 메시지를 담은 뉘앙스가 한국에 대한 비판 논조에 묻히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유화 제스처에 응할까?
트럼프 대통령 속내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피스 메이커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면서 2028년 LA 올림픽을 평창 동계올림픽처럼 평화 올림픽으로 개최해 궁극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와 연결해본다면 북·미 대화는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환경이 운전자였던 한국의 지위를 페이스메이커로 바꾸었다. 실용주의자 이재명 대통령도 이런 현실을 간파해 페이스메이커로 자신의 역할을 조정한 것이다.
2026년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
한국이 페이스메이커로 역할을 바꾼다면 탈냉전 30여 년 동안 한반도 운전자 노릇을 하기 위해 세우고 추진해온 목표와 전략도 바꾸어야 한다. 북한은 우리가 햇볕을 쬐어 낡은 외투를 벗겨야 할 대상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북한은 이제,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말했던 두꺼운 외투를 걸친 겨울 나그네가 아니다. 북한의 지위를 변화시킨 것은 핵 능력뿐이 아니다. 김여정 부부장도 언급한 ‘급변하는 지역 및 국제 지정학적 상황 변화’ 때문이다.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 미국(트럼프)과 러시아(푸틴)의 소통이라는 국제질서의 변화가 북한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9월3일 베이징에서 열릴 중국 항일 전쟁 승전 80주년 기념행사 열병식에 참석했다. 김 위원장은 그곳에서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을 각각 만났다.
북한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가 다시 짜이기 전에는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 대화에 임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북한에 손을 내밀면 내밀수록 북한의 대남 비난은 더 격화될 것이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이 필요하다. 북·미 대화를 지원하면서 페이스메이커가 할 일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오는 10월10일 노동당 창건 80돌 행사와 연말 또는 2026년 초 열릴 노동당 9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새로운 정책을 내세울 것이다. 9차 당대회 이후 북·미 접촉은 본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인 한반도 전략을 세우고, 다가오는 북·미 접촉의 시기를 대비하며, 눈밭을 내딛는 심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 임기 5년과 겹치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4년은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좋은 기회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와 빌 클린턴 대통령 임기가 겹쳤던 2년을 제외하고 한·미 양국 대통령의 정책 기조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이재명-트럼프 두 대통령의 임기가 겹치는 4년은 김대중-클린턴 임기가 겹쳤던 2년처럼 한·미 정상 사이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앞으로 4년이야말로 ‘페이스메이커론’으로, ‘운전자론’이 추구했던 ‘한반도의 강고한 평화’를 정착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