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나무의철학 펴냄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상사 크로포드의 지시에 따라 일명 ‘버펄로 빌’ 연쇄 살인 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구금 상태인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를 찾아간다. 똑똑하고 예민하며 동시에 촌스러운 스탈링에게 흥미를 느낀 렉터는 스탈링의 개인사와 버펄로 빌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자는 조건으로 면담에 응한다. 한편 모종의 이유로 덩치 큰 여성들만 골라서 살해하는 버펄로 빌이 가장 최근 납치했던 여성은 유력 상원의원의 딸이다. 그리고 버펄로 빌의 살해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FBI는 며칠 내로 반드시 이 사건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압력에 짓눌린다.
〈양들의 침묵〉을 아주 오랜만에 재독했다. 그리고 10대 시절에 슬렁슬렁 넘겨 읽었던 〈양들의 침묵〉과, 직장을 다닌 지 아주 오래된 40대 후반의 나이에 읽는 〈양들의 침묵〉이 얼마나 다르게 다가오는지 깨달으며 새삼 놀랐다. 미국에서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1988년 이래(동명 영화는 1991년 개봉했다), 한니발 렉터는 비상한 기억력과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가진 소시오패스 캐릭터의 원형이 되어버렸다. 그 때문인지 이 작품이 렉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기억의 집단 왜곡이 일어났지만(혹시 이 사실을 아는지?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의 출연 장면은 20분을 채 넘지 않는다), 실상 이 작품은 클라리스 스탈링이라는 젊은 여성 신참 직장인의 분투기로 읽을 수 있었다.
여기서 ‘젊은 여성 신참’이라는 부분에 작은 따옴표를 치고 싶은 이유는,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P. D. 제임스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엔딩과 어느 정도 연관된다. 천애 고아 코델리아 그레이가 사설탐정이라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빙자한 오지랖(‘당신처럼 젊고 예쁜 여자가 왜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하죠?’)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또래 청년의 자살(처럼 보였던 타살) 사건을 파고들며 냉기 어린 진실에 도달한 뒤, P. D. 제임스의 유명한 기존 시리즈 주인공이자 이 작품에 ‘특별 출연’한 애덤 달글리시 경감을 만나는 엔딩 말이다. 달글리시는 코델리아와의 짧은 만남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젊은 여자는 어떤 일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녀가 맘에 들지만, 다시 만날 일이 없어서 기쁩니다. 틀에 박힌 심문을 하는 동안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싫거든요.” 순전한 악의와 죄책감으로 점철된 세계의 탐구를 훨씬 먼저 선택한 중년의 선배가, 반듯한 순수함과 직업윤리를 지키고자 애쓰는 후배를 향한 애틋한 연민과 동지애를 표하는 장면이다. 나 같은 여성 독자라면 〈양들의 침묵〉과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과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1980년대 말, 수 그래프턴과 새러 패러츠키가 각각 킨지 밀혼과 V. I. 워쇼스키 시리즈를 통해 ‘남성 탐정만큼 뛰어난’ 여성 탐정물을 연달아 발표하며 지루해진 미스터리 소설계에 심폐소생술을 진행하던 무렵, 그야말로 느닷없이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남성 작가가 만들어낸 놀라운 캐릭터다. 앞으로도 평생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피해자들(지금 당장 납치된 상원의원의 딸은 그 지위 때문에 전국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스탈링은 이전에 죽어간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무명의 여성들에 대한 연민을 떨치지 못한다)을 애도하고, 그들의 억울함에 최소한이라도 보상하기 위해 버펄로 빌을 체포하기 위한 목표에 몰입하며, 렉터라는 또 다른 악의 축과 기묘한 우정을 거래하는 대담한 임무를 성공시킨다. 그리하여 모두가 실패할 거라고 여겼던 목표에서 기필코 자신만의 승리를 거두고야 만다.
〈양들의 침묵〉은 지금 읽어도 무시무시하다. ‘범인과 결말을 알고 나면 미스터리 소설을 무슨 재미로 또 읽죠?’라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장르에 상관없이) 잘 쓰인 작품에는 동시대 독자들에게 그토록 큰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공포와 불안의 쾌락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작가의 감식안과 감수성, 캐릭터 조성 능력이 반드시 존재한다. 〈양들의 침묵〉은 여성 연쇄 살인이라는 소재를 음험한 오락거리로 소비하지 않는 작품이며, 끔찍한 연쇄 살인마 버펄로 빌에게 맞서는 자그마한 시골뜨기 여성 신참 요원의 사투를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토머스 해리스의 손놀림(거의 한니발 렉터의 그것에 맞먹는다)에 거듭 경탄을 표하게 되는 작품이다. 아직 접하지 못했다면, 혹시 오래전에 영화로만 봤다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