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내일〉 외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우리가 소설을, 특히 미스터리 소설을 집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대리만족을 위해서다. 현실에서 범죄를 만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아무리 생떼를 부려도 티끌만 한 권력만 있으면 무사통과다. 예전에 한국추리작가협회 사무실에 도둑이 든 일이 있었다. 추리소설가들이 멋진 추리력으로 범인을 잡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고, 깜깜무소식이었다.
하지만 미스터리 소설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 불가해한 범죄도 논리적으로 해결되고 범인은 맨얼굴을 드러낸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정의의 철퇴를 맞고 세상은 질서를 회복한다. 비록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우리는 대리만족을 얻고 흡족하게 책장을 덮는다.
잭 리처 시리즈의 창조자 리 차일드는 처음부터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리처가 우리 모두 직접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주길 원했다. 당당하게 맞서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결코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영악하게 대응해주길 바란 것이다. 나는 소심하고, 확신도 없고,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굴욕스러워하는 우리가 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우리의 로망이 소설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치유적 위안을 느끼는 것을 상상해봤다(〈라인업〉 오토 펜즐러 엮음, 박산호 옮김, 랜덤하우스, 2011).”
리처는 식상한 상처 입은 알코올중독자 캐릭터와는 다르다. 키 195㎝에 체중은 113㎏으로 온몸이 근육질이며 범죄자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한다(키 170㎝의 톰 크루즈가 영화에서 잭 리처 역을 맡기로 했을 때 왜 그렇게 원작 팬들의 원성을 샀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다행히 아마존 드라마 〈리처〉의 앨런 리치슨은 소설과 비슷한 피지컬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뇌까지 근육인 것은 아니다. 군 범죄를 수사하는 110특수부대의 전직 수장으로서 날카로운 추리력과 남다른 통찰력을 갖고 있다. 예를 들자면 새벽 6시의 뉴욕 지하철 6호선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관찰하고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간파한다거나(〈사라진 내일〉), 저격 현장을 보고 숙련된 저격수가 택할 최상의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밝힌다(〈원 샷〉). 스마트한 두뇌를 갖춘 골리앗. 그것이 잭 리처다.
시리즈의 기본 골격은 영웅담 혹은 서부극이다. 서두는 비슷하다. 군에서 전역한 후 칫솔 하나만 들고 미국 전역을 떠도는 리처가 어떤 곳에 도착하거나(아버지가 나고 자란 뉴햄프셔 래코니아 〈10호실〉), 곤란한 상황에(눈보라 속에 사고가 난 버스 〈61시간〉) 맞닥뜨린다.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능력이 필요한 자를 돕는다”라는 신념이 있는 리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날카로운 추리력으로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막강한 폭력으로 응징한다. 마을은 평화를 되찾고 이방인은 석양으로 사라진다. 단순한 플롯이지만 리 차일드의 맛깔 나는 솜씨가 더해져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드라마 〈리처〉 시즌 3의 원작이기도 한 〈처단〉에서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왜 이런 일을 하느냐, 약자를 보호하려는 것이냐’는 여주인공의 질문에 리처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사실 그건 아냐. 나는 약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 그저 센 놈들을 싫어하는 거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만한 놈들이 싫은 거지.” 텔레비전만 틀면 저런 인간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하는 현실을 견디는 가장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잭 리처 시리즈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