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정치, 언제까지 표 대신 후원금만 받고 말 텐가

권은혜 기자 TALK new
입력
수정 2025.06.17. 오전 8:04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득표율 0.98%.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았다. ‘못 뽑아서 미안하다’라는 문구와 함께 4시간 동안 후원금 약 13억원이 쏟아졌다.
6월3일 저녁 권영국 후보가 민주노동당 당사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본 후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6월3일 저녁 8시, 지상파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권영국 후보의 예상 득표율은 1.3%였다. 취재진 8명과 선거 캠프단 21명이 모여 있던 민주노동당 당사 개표상황실에서 씁쓸한 웃음이 터졌다. 권영국 후보는 “그래도 우리 지지율 처음에는 0%가 나왔잖아요. 그죠?”라며 캠프 사람들을 위로했다. 나순자 선대위 상임공동선대본부장은 “1%만 넘어도 성공이다, 했던 거 기억하시죠?”라며 “어제 지하철 유세 때 분위기가 좋아서 정말 5% 나오겠다 싶었는데 표는 안 주시고 후원금으로 보답하고 계신다”라며 웃었다.

전체 득표수 34만4150표, 득표율 0.98%. 이번 대선에서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최종적으로 받아 든 성적표다. 6월3일 저녁 8시 지상파 방송 3사 출구조사에서 나온 1.3%보다도 0.3%포인트 이상 빠진 결과다. 지난 제20대 대선 결과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득표율인 2.37%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권영국 후보는 대선 투표 전날인 6월2일 밤 지하철 탑승 유세를 마치고 곧장 충남 태안으로 향했다.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에서 끼임 사고로 사망한 하청업체 노동자 김충현씨(50)의 유족을 만나러 간 것이다. 태안화력발전소는 6년 전 하청업체 소속 김용균 노동자(당시 24세)가 산업재해로 숨진 곳이다.

권 후보는 6월2일 밤 유족을 만나 위로한 뒤 6월3일 새벽 3시경 서울에 도착했고, 같은 날 오전 재차 태안으로 가서 빈소를 찾았다. 오후 1시 한국서부발전 본사 앞 규탄 기자회견, 오후 2시경 사고가 발생한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한전KPS 종합정비동을 방문했다가, 저녁 7시에 시작하는 개표 행사 직전 아슬아슬하게 당사에 도착했다.

이번 선거는 원외 정당으로 밀려난 정의당이 노동당·녹색당을 비롯한 진보 세력과 함께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치른 첫 번째 대선이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건설국민승리21이 권영길 후보를 중심으로 대선에 처음 도전했던 1997년 제15대 대선 당시 득표수가 30만6026표(1.2%)다. 30여 년 진보정당의 역사 끝에 첫 도전과 비슷한 득표수를 받아 들게 된 셈이다. 그러나 두 수치의 의미는 다르다. 1997년의 득표율 1%가 진보정당의 희망을 보여준 반면, 이번 득표율은 2024년 총선 당시 녹색정의당 의원 0석에 이어 재차 진보정당의 실패를 체감하게 했다.

이번 대선은 시작부터 어려운 도전이었다. 문정은 민주노동당 부대표는 “기탁금만 해도 3억원에다가 전 국민 전 세대에 배포하는 공보물까지 포함하면 최소 10억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필요한 선거였다. 정의당은 2020년 총선 출마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43억원이라는 빚을 졌고 현재도 26억원 빚이 남았다. 그런 상태에서 대선을 치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선거 출마 초기에는 ‘지난 대선에서처럼 괜히 민주당 표를 뺏는 게 아니냐’라는 비난을 숱하게 받았다.

그럼에도 대선에 도전한 근거는 ‘내란 세력 청산을 넘어서서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사회 대개혁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정의당은 2022년 지방선거 정당투표에서 4.14%를 기록해 이번 대선에서 TV 토론 참여 기회를 얻었다. 권영국 후보는 세 차례 TV 토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에게 “석고대죄하고 사퇴하라”라며 후보 자격을 묻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그런 논리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영원히 못할 것 같다”라고 비판하며 존재감을 보였다.

‘이번에는 못 뽑아서 죄송합니다’



민주노동당 공보실에 따르면 1차 TV 토론이 시작된 5월18일 저녁 8시부터 5월19일 자정까지 시민 806명이 후원금 약 6200만원을 보냈다. 권영국 후보는 “TV 토론 이후 분위기가 반전됐다. 유세를 위해 거리에 나서면 ‘TV 토론 잘 봤다’라며 먼저 인사하고 다가오는 시민이 많아졌다”라고 말했다. ‘장애인·여성·노동자 혐오 등이 난무했던 난장판 토론에 권 후보가 유일한 진보 후보로서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라는 지지와 응원이 X(옛 트위터) 등 SNS에 다수 올라왔다. 5월23일 TV 토론에서 권 후보가 손바닥에 적은 ‘백성 민(民)’ 자도 화제가 되었다. 민주노동당 TV 토론 팀장을 맡았던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우리는 말의 무게를 믿었고, 상징의 힘을 실험했다. 다행히 그 믿음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지상파 3사 공동 출구조사 결과 이번 대선에서 20대 여성의 5.9%가 권영국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20대 남성 1.6%만이 권 후보에게 표를 준 것과 대조적이다. 문정은 부대표는 “20대 여성 유권자들이 우리를 많이 지지해줘서 감사하다. 다만 이 결과가 보여주는 참담함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이준석 후보든, 우리 정치가 언제까지 시민들이 성별에 따라 분열하도록 만들 것인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제21대 대통령선거 공식선거운동 마지막날인 6월2일 오전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서울 강남역에서 열린 '강남역 쓰러지 여성들과 함께 여성, 안전 유세'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시사IN 이명익


낮은 득표율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권영국 후보는 “이번 선거는 내란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는 심판의 필요성이 아주 강하게 작용한 선거였기 때문에 국민의힘 후보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진보정당이 지금까지 지지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오지 못했던 것이 한순간에 바뀔 수 없다고 본다”라고 답했다.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6월3일 오후 8시부터 후원이 마감되는 밤 12시까지 4시간 동안, 13억4429만3679원이 권영국 후보 후원 계좌에 입금됐다. 입금자는 3만6157명 시민들. ‘이번에는 못 뽑아서 죄송합니다’ ‘대선 토론 잘 봤습니다’ ‘표로 화답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돈과 함께 보냈다. 5월8일 대통령 후보자 후원 계좌가 개설된 후 6월3일 닫힐 때까지 모금된 전체 후원금은 22억2289만9525원(4만6474건)이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후원금이 단 4시간 만에 들어왔다.

후원으로 투표를 대신하는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표는 못 주고 미안하니까 후원금을 내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계속 반복되는 이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 전통적으로 진보정당이 우세했던 창원 성산구와 울산 남구·북구에서도 권영국 후보보다 이재명이 압도적으로 득표율이 높았다. 노동자 기반으로 기성정당과 다른 정치를 하겠다는 진보정당의 모델이 위기에 빠졌다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과거 정의당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낮은 득표율은) 예정돼 있던 결과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이재명 후보 대신 김문수 후보에게 센 이야기를 하는 서브 포지션으로는 득표율을 더 확장하기 어렵다. 결국은 (민주당과) 정치 세력으로서의 차별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역부족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라고 분석했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은 정의당이 노동당, 녹색당 및 진보세력과 ‘사회대전환연대회의’를 꾸려 이번 대선에 함께 대응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다시 정의당으로 돌아갈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권영국 후보는 6월4일 오전 10시 선대위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선거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뭐 그리 달라지겠습니까. 제가 살아온 인생이 그랬고, 우리 약자들의 삶이 정치로부터 외면받아 왔는데, 뭐 달리 생각하겠습니까. 그들과 함께 손잡고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정치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