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출간된 책 네 권에 적힌 ‘○○○ 옮김’

차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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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04.25. 오전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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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한 권, 3월에 세 권. 각기 다른 출판사가 펴낸 책 네 권에 ‘유강은 옮김’이라고 적혀 있다. 꽤 묵직한 책들이다. 24년 차 전업 번역가를 만나 번역 작업의 묘미에 대해 들었다.〈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열린책들), 〈특권계급론〉(오월의봄), 〈냉전〉(서해문집),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생각의힘). 모두 올해 번역·출간된 책이다. 1월에 한 권, 3월에 뒤의 세 권이 나왔다. 각기 다른 출판사가 펴낸 이 네 권은 공통점이 있다. 한 사람이 번역했다. 번역가 유강은씨(54)의 손을 거쳐 출간되었다.

유강은씨는 출판계에서 사회과학·국제문제 전문 번역가로 통한다. 2002년 ‘유강은 번역’으로 처음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가 출간되었다. 24년 차 전업 번역가인 그는 현재까지 80권이 넘는 외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원래는 지난해 연말에 나왔어야 할 책들이 12·3 쿠데타 때문에 출간이 늦어졌다. 그때 못 나온 책들의 출간 시점이 우연히 겹쳤다.” 이번에 나온 것 말고도 출판사에 번역 원고 3개를 넘겨놓은 상태다. 요즘은 출간 시점을 맞추어야 할 외서 한 권을 번역하고 있다. 2025년, 독자들은 그의 이름이 적힌 책 표지를 더 접할 성싶다.

번역가 유강은씨는 외서 80여 권을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책이 좌우로 쌓여 있다. ©시사IN 조남진


유씨는 1989년 대학에 들어갔다. 종교학을 전공했지만 ‘조교 선배들이 억지로 졸업을 시켜줄 정도’라고 말할 만큼 학과 공부는 안 했다고 했다. 1997년 8월, 몇몇 지인들과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라는 소규모 사회운동단체를 만들었다. 1996~19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이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관심을 모을 때였다. 한국의 진보운동 소식을 알리고, 나라 밖 사회운동단체의 소식을 국내에 전하는 일을 했다. 인터넷 세계가 열려 이제 막 대중화될 즈음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명의로 공동 번역서를 몇 권 낸 바 있다.

단체가 해산하고 그때 인연을 맺은 이후출판사에서 그에게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1·2 번역을 제안했다. 2차 세계대전에 폭격수로 참전했던 하워드 진은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평생을 반전·평화·민권 운동에 바친 역사학자다. “〈미국 민중사〉 번역 제안을 받고,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검색했다. 소개 글만 봐도 하워드 진의 인생이 참 흥미로웠다. 이 자전적 역사 에세이를 먼저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출판사에 제안했다.” 이렇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먼저 번역하고, 〈미국 민중사〉 1·2를 2006년에 번역·출간했다. 간간이 외주 교정·교열 일도 했다.

전문 번역가로 출판계와 첫 인연을 맺게 한 〈미국 민중사〉는 그가 사회과학·국제관계 전문 번역가로 알려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유강은 번역가는 2017년에 제58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는데, 수상 이유가 이랬다. ‘번역의 외로움과 고단함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가 쉽지 않다. 심사위원들은 번역 부문에서는 단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작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민중사〉와 〈더 레프트〉 등을 통해 한국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친 유강은 선생의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하워드 진, 노엄 촘스키, 도널드 서순, 리처드 세넷, 일란 파페, 낸시 홈스트롬 등. 유강은씨가 두 권 이상 우리말로 번역한 외국 학자들이다. 한 저자의 다른 책을 계약한 출판사가 유씨의 전작 번역을 보고 연락해와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AK47〉처럼 ‘총기의 역사’를 다룬 책을 번역했더니, 다른 출판사가 〈콜트〉 같은 총기 관련 논픽션 번역을 의뢰하기도 했다. “다른 번역자가 옮기다가 포기하고, 출판사에서 나에게 연락 온 책들이 몇 권 있다. 사회학·역사학·정치학·경제학 등에 자주 쓰이고 굳어진 개념들이 있는데, 그거에 익숙하지 않은 번역자들은 생소하고 어려워할 수 있다. 특별히 어떤 분야의 책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편집자들이 전작을 보고서, 내가 그 분야에 익숙하겠거니 하고서 번역 의뢰를 하는 것 같다.”

그는 집에서 번역 작업을 한다. 원서를 A4 용지에 확대 복사해 들여다본다. 직장인 출퇴근하듯이, 아침밥 먹고 시작해 오후 6시까지 꾸준히 일한다. 밤샘 번역은 안 한다. “올빼미처럼 밤새 작업하는 번역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일하면 금세 몸이 상하니까. 시간을 딱 정해놓고 작업한다.”

“쉬운 번역과 100% 직역은 없다”



이런 번역 작업이 적성에 맞는다는 그는 “쉬운 번역은 없다”라고 말한다. 우선 한국어 자체의 변화가 너무 많다. 20년 전에 비해 쓰는 어휘 자체가 무척 달라졌다고 느낀다. 번역가는 ‘언중’이 쓰는 말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래도 젊은 독자들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제 50대 중반인 내가 무심코 사용한 언어가 요즘 젊은이들이 느끼기에 외계어 같을 수 있다. 번역은 끊임없이 언어의 새 흐름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다.” 특히 사회과학 서적은 개념어와 한자어가 많이 나와서 젊은 독자들이 어려워하기 쉽다. 어떻게 옮겨야 할까, 계속 궁리하고 ‘줄타기하듯’ 옮길 수밖에 없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흔한 질문에 대해선? 그가 보기에,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꿀 때 직역은 없다’. “아마 내가 10년 전에 번역한 책을 지금 다시 번역한다면, 그 번역은 많이 다를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언어도 변한다. 언어는 옮겨지는 순간, 달라진다. 100% 직역은 불가능한 일이다.”

번역가 유강은씨의 책장 한켠에 그가 번역한 책들이 꼽혀있다. ©시사IN 조남진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은? “도달할 수 없는, (상상의 동물) 유니콘 같은 거다.” 그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영역판을 대조해서 읽어본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몇 가지 실수가 보였다. 그는 ‘당연한 실수’라고 여긴다. “영한사전은 그동안 업그레이드를 해서 꽤 수준이 높다. 그런데 한영사전은 방치해두어서 형편없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번역하려면 한영사전, 한독사전, 한불사전 등을 이용할 텐데 그 품질이 정말 안 좋다. 그런 사전을 이용하면 누가 번역해도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오역과 별개로 유강은 번역가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강 작가가 영어 번역본을 보고서 100% 이건 내가 쓴 책이라고 생각할까? “내가 보기에, 두 책은 꽤 다른 책이다. 문장의 길이도, 말의 리듬도 다르다. 마찬가지로 내가 번역한 책도 원서와는 전혀 다른 책이다. 담겨 있는 정보는 같겠지만, 그 정보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게 번역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유강은 번역가의 거실 양쪽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한쪽 책장의 절반은 소설이었다. 다른 방에 소설과 시집이 따로 더 있다고 했다. 그는 “번역 의뢰가 들어오면 일정이 맞으면 다 하는 편이다. 편집자들을 만나면 ‘리처드 라이트(미국 흑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와 리얼리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렇게 신경 써서 안 듣는 것 같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얼마 안 지나 ‘문학’ 서가에 ‘유강은 옮김’이라 적힌 책이 꽂히지 않을까. 기대 어린 예감이 들었다. 언어와 번역에 대한 그의 말을 한참 듣고 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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