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다시 유력 대선후보가 된 2025년 대선 정국에서는 ‘젠더 이슈’가 상대적으로 불이 붙지 않은 모양새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텔레그램 n번방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힌 ‘추적단 불꽃’ 활동가 박지현 씨를 대선 캠프에 영입하고 ‘데이트폭력 처벌 법제화’ 등을 공약했던 이재명 전 대표는 4월23일 현재까지 여성·젠더 관련 정책을 내지 않고 있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 함께 나선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4월17일,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4월21일 정책공약집을 내고 여성·성평등 공약을 포함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이재명 전 대표 캠프 관계자는 “지금은 전체적으로 성장과 분배, 내란 종식이라는 큰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고, 여성이나 복지 등 구체적인 정책은 경선 이후 나올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부문별 구체적인 공약이 다 나오지 않아서일 뿐이라는 취지다.
하지만 관련 입장을 밝힐 기회가 있었을 때 이 전 대표가 젠더나 여성 이슈를 정면으로 들고 나오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월11일 비전 발표회 후 취재진으로부터 ‘응원봉 집회를 주도한 2030 여성들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 2030 여성 유권자를 위한 비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 전 대표는 “빛의 혁명 과정에 모든 국민이 함께했다. 우리 공동체 모두의 성과이고 모든 국민과 함께 가야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이재명 캠프가 ‘로우키(low-key)’로 가는 전략을 택한 것 같다. 자칫 여성 이슈를 외면하는 모습으로도 비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김동연 캠프 관계자도 “(이재명 캠프를 넘어 민주당이) 지난 대선과 달리 전체적으로 여성 이슈를 껄끄러워하면서 잘 안 다루려고 하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안티 페미니즘’ 기류가 있고, 2030 남성 표심을 우려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라고 해석했다.
‘비동의 강간죄’에 대한 대선 후보들의 입장 차
이재명 전 대표와 달리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는 일찍이 여성 정책을 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이번 대선에 나선 양당 경선 후보 중 유일하게 ‘비동의 강간죄’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비동의 강간죄’는 강간의 성립 기준을 폭행 또는 협박 여부와 무관하게 상대방의 동의가 없거나 상대방 의사에 반해 이뤄진 성관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일부 주, 독일, 스웨덴 등은 비동의 강간죄를 시행하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부터 한국 정부에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권고했다.
이재명 전 대표가 당 대표였던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은 ‘비동의 강간죄 추진’을 22대 총선 공약에 포함했다가 “실무적 착오”라며 하루 만에 철회한 적이 있다. 김동연 지사는 4월21일 ‘모두의 성평등, 다시 만난 세계’라는 제목의 집담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강간의 62.5%가 폭행과 협박 없이 이뤄진다. 그루밍이 됐든 음주가 됐든 마약이 됐든, 이런 형태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범죄는 피해자 위주로 봐야 해결할 수 있다”라고 비동의 강간죄를 공약한 이유를 밝혔다.
김동연 지사는 ‘민주당이 지난 대선과 달리 젠더 이슈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민주당이 갖고 있는 공정과 평등이라는 가치 추구를 위해서는 여성 문제에 있어 더 전향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만약 (젠더 문제에 소극적인 것이) 선거 전략이나 표를 의식한 결정이라면 민주당답지 못하고 비겁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비동의 강간죄 외에도 김동연 지사는 ‘여성가족부 기능 확대’, ‘위헌 판결을 받은 낙태죄 개선 입법’, ‘성평등 임금공시제 법제화와 성별임금격차해소법 제정’ 등을 공약했다.
김경수 전 지사도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확대 개편’, ‘형법상 낙태죄 조항 전면 삭제’, ‘경구용 임신중절약 국내 도입’ ‘젠더기반폭력 예방기본법 제정’ 등의 성평등 공약을 공개했다. 다만 김경수 전 지사는 비동의 강간죄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다. 지난 4월21일 정책 발표 기자회견에서 비동의 강간죄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김경수 전 지사는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갈등이 있어 충분한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갈등 사안에 대해서 일방의 의견을 담은 제도를 무리하게 추진할 경우에는 법을 만들어놓고도 오히려 그 부작용 때문에 갈등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다”라고 답했다.
비동의 강간죄와 관련해서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도 4월20일 페이스북에서 “검사가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받은 사람이 (성관계) 상대 동의가 있었음을 사실상 입증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이 정말 많이 나올 것이다”라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4월22일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안철수 의원, 한동훈 전 대표, 홍준표 전 대구시장 등 4명이 1차 경선을 통과한 국민의힘에서도 젠더 이슈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다만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극단적인 페미니즘(feminism)을 주장하는 PC주의에 맞서 ‘건강한 가정이 해답이다’라는 ‘패밀리즘(familism)’을 확산시키겠다”, “극단적인 페미니즘이나 PC주의는 좌파 중심의 사고(4월18일 사회·교육·문화 분야 비전 발표 보도자료)”라며 페미니즘을 콕 집어 비난했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성평등이 아닌 양성 간 격차 해소”가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여성의 경력 단절 해소, 남성의 육아 참여 확대 등 성별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을 축소”하겠다고 공약했다.
20대 대선 당시 국민의힘 당대표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했던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의 경우, ‘여성가족부 개혁’을 공약으로 내놓을 예정이나, 비대한 정부 조직을 효율적으로 개편하는 차원에서 추진한다는 입장이라고 캠프 관계자는 전했다.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4월23일 여성 전문 군인제를 도입해 현재 11%인 여군 비율을 30%로 끌어올리고, 성별 구분 없이 모든 병역 이행자에게 군 가산점을 부여하겠다고 공약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4월22일 중앙차세대여성위원회 간담회에서 “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더 여성이 안전하고 여성이 커리어를 펼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와 결의가 있다”라는 자신의 과거 발언을 언급하며 “그 마음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2022년 대선의 ‘젠더 전략’ 학습 효과?
3년 전 대선과 달리 젠더 의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이번 대선이 초유의 12·3 비상계엄 직후 치러지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내란죄 단죄와 헌정질서 회복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세부 정책 논쟁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동시에 두 정당의 ‘학습 효과’도 작용했다. 〈시사IN〉과 20대 남자, 20대 여자 관련 웹조사를 진행한 여론조사 전문가 정한울 한국사람연구원장은 “2017년까지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는 성평등 인식이 확산되는 시기였다. 2018년 이후 젠더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선거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처음 20대 남성 사이에서 시작된 안티 페미니즘이 이후 남성 유권자 다른 연령대로도 퍼져나갔다. 반면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태도는 20대 여성을 제외하면 30대 여성만 해도 절반 정도에 그친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여러 세대에 걸친 남성) 지지층을 잃을까봐 (여성·젠더 문제에서) 조심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한울 원장에 따르면 국민의힘도 2021년까지는 소위 이대남 동원 전략으로 득을 봤지만, 2022년 대선 때는 ‘이대남’이 결집한 것 못지않게 ‘이대녀’가 막판에 결집했다. 안티 페미니즘을 동원한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이기기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결국 두 정당이 정치적 동원에서 페미니즘과 안티 페미니즘의 위력을 모두 확인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 조심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라고 정 원장은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