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 7, 8화는 소덕동 팽나무를 둘러싼 소송을 다룬다.
소덕동 이장은 말할 때 "그 뭐지, 그거?" "그 있잖아, 그" "그 뭐냐 그"를 연발한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지녔으나 두뇌가 비상한 우영우 변호사는 그럴 때마다 이장의 머릿속에 있을 법한 단어를 제안한다. 일부는 적중하고, 그러면 개운해하는 우영우의 표정 위로 청량한 효과음이 울린다. 주요 인물들이 소덕동 길을 걷는 다른 장면. 주민들의 별명이 화제가 된다. 이장이 자신의 별명을 말하려고 하자, 이번에도 우영우는 "소덕동 뭐더라?"라며 답을 추측한다.
'뭐더라 이장'은 극화된 모습이지만, 누구나 경험하고 중년 이후 더 자주 마주치는 현상을 보여줬다. 이를 설단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 일반명사나 고유명사가 두뇌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은 확실한데 떠오르지 않아 혀끝으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이다. 영어로는 'tip-of-the-tongue phenomenon', 줄여서는 tot라고 한다.
"그…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현상이 뭐였더라?"
우리가 설단 현상에 대응하는 방법은 대략 둘로 나뉜다. 검색해서 답을 확인하거나, 바로 필요한 정보가 아닌 경우 그냥 넘어가거나. 여기 제3의 길이 있다. 넓지 않은 길이지만, 자주 걷다보면 두뇌 회로가 활성화된다. 그러면서 이 현상이 줄어든다. 설령 무언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도 전혀 낙담하지 않게 된다. 그동안 익힌 방법을 구사하면 100%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은 아울러 평소 두뇌 활동에도 활력을 불어넣는다.
먼저 기억과 관련해 실험심리학의 개념들을 익혀두자. 이는 학생들이 공부 방법으로 활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이들 개념 중 일부는 제3의 길에도 다시 등장한다. 사람이 시각과 청각, 촉각 등으로 접한 정보는 부호화를 거쳐 장기기억으로 저장되고, 저장된 장기기억은 인출되어 활용된다. 부호화는 그 정보를 유의미하게 만들거나 기존 장기기억과 연결하는 등 처리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부호화를 거치지 않은 정보는 대부분 일시적으로만 저장됐다가 지워진다. 부호화를 효과적으로 해두면 인출이 쉽게 된다.
학습에서 부호화-저장-인출은 서로 영향
예를 들어 설명하면, 열대 과일 구아바를 기억하기 위해 '구워봐 구아바'라는 문구를 만들어 청각적으로 부호화할 수 있다. 아니면 의미적 부호화 방식으로 기존 지식과 연결해, 열대 과일로 오렌지처럼 비타민C가 풍부하며 패션프루트처럼 속살이 분홍색이라고 처리할 수도 있다.
그 낱말과 찰떡 궁합인 다른 낱말을 짝지우는 기법이 효과적이다. '그 사람 이름 석자는 전부 시옷(ㅅ)으로 시작하네'처럼, 그 단어 자체를 공감각적으로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 또한 정보가 세트일 때에는 구성 요소 각각을 앞글자를 따서 엮은 뒤 기억하는 기법이 자주 쓰인다. 시각적 처리 중 널리 쓰이는 기법이 기억할 대상을 장소와 연결하는 것이다. 이는 장소법이라고 불린다. 익숙한 공간을 떠올리고, 대상 정보를 그 공간의 특정 위치와 연관짓는 것이다. 그 공간을 마음속으로 지나가면서 정보를 순서대로 꺼내면서 저장한다.
한편 인출은 장기기억을 강화한다. 시험 점수를 높게 받으려면 무턱대고 암기하려고만 들지 말고 중간중간 떠올려보라고, 높은 학업 성취도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권한다. 또는 가능하다면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라고 한다. 이 또한 인출을 통해 장기기억을 다지는 노하우다.
뇌에 가벼운 임무를 주면 문득 떠오르기 쉬워
인출(retrieval)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회상(recall)과 재인(recognition)이다. 회상은 단서가 거의 없이 떠올리는 활동이고, 재인은 정보를 제시받은 가운데 기억을 활용하는 활동이다. 재인의 사례로는 OX 문제를 들 수 있다. 기억과 대조해 제시된 내용이 정확한지 아닌지 판단하라는 문제다. 설단 현상은 실패한 회상이다. 이 경우 대개 이미지는 떠오르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제 본론이다. 설단 현상과 마주쳤을 때, 시간이 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회상해 보자. 회상 활동은 가벼운 종류와 추적하는 작업으로 나뉜다. 시간 여유가 없을 때, 처음 회상 훈련을 하는 단계에는 가벼운 종류가 적합하다. '나중에 떠오를 거야'라면서 뇌에 살짝 과제를 주는 것이다. 뇌는 신비로운 기관인 것이, 이렇게 임무를 부여받으면 우리가 그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계속 그 과제를 수행한다. 답을 찾아내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여기 답!'하고 알려준다.
이는 심리학의 자발적 인출(spontaneous retrieval)에 해당하는 듯하다. 심리학에서는 자발적 인출을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찾는 단어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살짝 수정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뇌에 과제를 부여할수록 자발적 인출이 더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필자가 최근 경험한 자발적 인출의 사례를 두 건 소개한다. 전날 저녁 모임에서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주연 배우 이름을 참석자 모두 바로 회상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케 서방'이라는 별명만 떠올렸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뇌의 한 구석이 내게 그 배우 이름이 '니콜라스 케이지'라고 알려줬다. 나는 그 이름이 다음에는 바로 회상되게끔 앞 두 글자를 따서 '니케'라는 별명을 붙여 부호화했다. 다른 고유명사는 지인의 이름이었다. 몇 번 회상을 시도했더니, 며칠 뒤 문득 '송성수(가명)구나'하고 알려줬다. 나는 그의 이름을 각 음절이 시옷(ㅅ)으로 시작한다는 특징으로 부호화했다.
검색하고 추적해 찾아낸 다음에는 부호화하라
자발적 인출에 실패한 단어는 추적 회상 목표로 설정한다. 며칠 동안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 배우가 '최종병기 활'의 주연 배우였다. 얼굴도 떠오르고,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명대사도 생각나는데. 귀가하는 동안 체계적인 회상 작업을 시작했다. 이름 석자 중 성부터 찾아보면 효율적이라는 데 착안했다. 한국에서 많은 성씨들을 하나씩 짚어봤다. 김, 이, 박, 최… 머릿속으로만 훑기 답답해서 스마트폰에서 관련 자료를 띄워놓고 그의 성을 탐색하다가 '조'씨에서 '해일'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조해일', 익숙한 이름인데, 딱 들어맞지는 않고. 석연찮은 가운데 검색했더니, 그가 쓴 '겨울여자'가 영화화된 소설가였다. 이렇게 허방을 짚은 뒤에야 그의 이름 '박해일'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다음 부호화 작업에 들어갔다. 전에 회사 모임에서 '바람은' 대사를 낭송하던 박OO 선배와 박해일을 연결해 기억하기로 했다.
추적 회상에 가장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입한 이름이 지인이 키우는 반려견의 견종이었다. 이미지와 함께 목양견이라는 사실만 떠올랐다. 그 이름을 1박2일 동안 짬짬이 떠올렸다. 그래도 자발적 인출이 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그 시간을 온전히 견종명 찾기에 투입하기로 했다. 눈을 감고 사전 표제어의 첫 글자 순서를 따라갔다. 놓치는 첫 글자도 있었겠지만, 끈질기게 탐색한 결과 그 첫 음절 '보'와 마주쳤다. 아!, '보더콜리'였다. 그 순간의 짜릿함과 이후 길게 이어진 성취 후의 여운은 큰 보상이었다. 나는 보더콜리와 브로콜리를 묶었다. 브로콜리를 읽으면 보더콜리를 떠올고, 보더콜리를 보면 브로콜리를 떠올리기로 했다. 이제 보더콜리는 언제나 쉽게 인출된다.
위장된 축복. 처음에는 좋지 않은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가리킨다. 설단 현상 또한 위장된 축복이다. 설단 현상이 축복으로 바뀔지는 각자 하기에 달렸다.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수용하는 대신, 회상을 활용하면 오히려 뇌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