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말기암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리겠는가?" "수술 중에 선배 의사가 실수한 듯하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간호사나 물리치료사 등에게 업무 중 어떤 식으로 존경과 동료애를 표시해야 하나?"
임페리얼 칼리지,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등 영국의 의대들은 학생 선발 단계부터 팀워크와 소통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1학년 교실에서부터 이처럼 모의 환자 인터뷰 등을 통해 '사람을 위한 의술'을 가르친다. 의사 면허 관리 기관은 졸업 역량에 '동료와의 협업'을 못 박는다. 영국의 별명이 '바뀌지 않는 나라'이지만, 의대 교실은 의술 전파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독일 의대의 변화도 드라마틱하다. 독일 샤리테 의대 학생들은 1989년 기술 전파 강의 중심의 커리큘럼에 반발해 보이콧했고, 이를 계기로 의학 교육의 축을 강의실에서 환자 곁으로 옮겼다.
대학은 예과와 본과를 가르지 않는 통합 6년제 모듈형 커리큘럼을 도입했다. 과목이 아니라 환자 상황이 중심이 돼 학생들은 입학 첫 학기부터 소그룹 환자 면담과 주 2회 실제 사례를 체험한다. 방학 땐 임상 실습으로 배운 것을 몸에 새긴다. 평가는 필기시험뿐 아니라, 실기시험(OSCE)과 시뮬레이션, 포트폴리오까지 다양한 방식을 도입했다. 개혁을 이끈 함 피터스 유럽의대협회(AMSE) 회장은 "개혁은 계획서가 아니라 실행이다. 리더십과 데이터, 끈질긴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의 의대가 고령화 경제, 인공지능(AI) 빅테크 등 급변하는 사회를 이끌 좋은 의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각국 의대 캠퍼스에서 교육 혁명의 소리 없는 포성, 총성이 터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의대생 선발부터 교육, 평가, 수련까지 규칙을 다시 짰다.
공통 키워드는 분명하다. 학문 간 연속성이 강한 통합 커리큘럼, 역량 기반, 현장 중심 평가, 팀으로 진료하는 다학제 의학이다. 변화는 교실과 병동, 연구 현장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노벨 의학상 44명 미 하버드대도 끊임 없는 교육 혁신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44명 배출한 미국 하버드대 의대는 끊임없는 교육 혁신을 통해 임상의사뿐 아니라 제약 바이오, 의료 IT의 세계 리더를 배출하고 있다. 이 대학은 기초의학을 임상과 같은 무게로 가르친다. 의사과학자(MD-PhD) 양성 트랙에는 매년 재학생의 약 20%가 지원한다. 이 대학이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함께 운영하는 '건강과학·기술(HST) 프로그램'은 의학 과학 공학을 한 무대에 묶어,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설계하도록 이끈다.
하버드대 면역학교실의 허준렬 교수는 "기초 연구자를 체계적으로 키우는 시스템 덕분에 학생이 임상 밖에서도 의료에 기여할 길을 쉽게 찾는다"며 "수료생의 절반을 훌쩍 넘는 인원이 순수 연구에 남는다. 탄탄한 기초의 토대가 진로에 그대로 새겨진다"고 말했다. 하나의 직선로가 아니라 연구·정책·산업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을 제도적으로 열어 둔 셈이다.
하버드대가 MIT와 함께 2009년 보스턴 시내에 8500평 규모로 조성한 라곤 연구소는 의대와 공대라는 상이한 배경을 가진 의사과학자들이 각종 연구와 실험을 진행한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과 브리검여성병원의 의과학자들도 이곳에서 혁신 치료법을 개발한다. 세계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와 코로나-19 백신이 바로 이곳 라곤 연구소에서 탄생했다.
"팀으로 일해야 환자 살린다" 의사는 리더십과 소통 능력 필수
세계 각국 의료 현장에선 의사의 독단적 오류를 줄이기 위해 다학제 진료를 발전시키고 있다. 각 진료과 의사들 중심인 국내 병원과 달리 간호사, 약사, 물리치료사 등이 한자리에 모여 치료 방침을 정하고 있다. 의대에서는 이런 진료가 가능하도록 의사의 리더십, 소통 능력, 희생 등을 가르치고 있다.
조준 런던 로열프리병원 교수는 "병원의 회의에 위계가 없다. 간호사가 의사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일상이고, 그게 환자 안전을 위한 길"이라고 했다. '위계의 권위'가 아니라 '팀의 합의'를 표준으로 삼는 방식이다.
의사의 공공성도 각국 의대 교육의 고갱이다. 일본은 지역 의료에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 1972년 지역마다 자치의대를 세워 졸업생에게 9년 지역 근무 의무를 부여했다. 2008년부턴 지역인재 특별 전형을 더해 장학금과 고향 근무를 연결했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모자란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코메디닷컴 기자와 만난 가미모토 미나코 돗토리대 교수는 "지역 주민과 함께 살며 배우는 경험이 '지역을 위해 일하는 의사'를 만든다. 결국 입학 단계의 동기 부여와 커리큘럼 전반의 지역 과목 설계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의대 교실이 아니라 마을이 강의실이 되는 구조다.
"AI 시대에 단순 지식 암기해서야"
1970~90년대 공대에 진학한 수재들이 'IT 코리아'를 만들었다면 1990년대 이후 전국의 의대에 몰린 수재들이 사람을 위한 의료, 제약 바이오와 디지털 헬스산업의 엔진이 될 것이라는 희망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면 변화에 더딘 의대 교육이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 또한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의대들도 문제 해결 중심 수업을 도입하며 현장실습을 강화하고 있지만 해외 흉내 내기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압도적이다.
커리큘럼은 의술 전수 중심이어서 AI 시대에는 90% 필요 없는 것들을 가르친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교수들은 학생 교육을 부차적인 업무라고 여긴다. 진료나 연구와 달리 아무런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미래에 필요한 것보다 단순 지식을 외우고 있다. 의사로서의 가치와 보람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점수에 따라 전공을 고르고, 수입 차이에 따라 진로가 갈리는 방식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일부에선 학생 선발부터 교육, 평가, 수련, 경력 관리까지 마치 한 몸처럼 하나의 시스템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규제 당국과 대학, 교수 등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독일 미국 영국 일본 의대 변화 현장에서 실마리를 찾다
코메디닷컴은 5회에 걸쳐 세계의 의학 교육 혁신 현장을 찾는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의 의대 교육 현장을 찾아 그들이 인재를 어떻게 키우는지, 그런 교육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줄 예정이다. 그들의 혁신적인 시도와 함께 현실적인 한계와 정책적 쟁점도 함께 짚는다.
이번 시리즈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복잡한 정원 갈등을 넘어 환자 곁이나 연구, 산업 현장에 서야 할 의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우리 의대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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