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 회장의 승진과 권오갑 명예회장의 경영 일선 용퇴가 맞물리면서 HD현대그룹에 오너 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지배구조 측면에서 정 회장의 입지는 미완에 머물러 있다.
그룹의 실질적인 컨트롤 권한은 정 회장이 가졌지만 소유권은 아직 부친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 회장의 승진으로 지배구조 재정비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오너일가는 HD현대 지분만 보유해도 그룹 전반을 좌우할 수 있도록 단순한 구조로 설계돼 있다. 다시 말해 정 회장은 HD현대의 지배력만 집중적으로 확보하면 그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 회장의 지분은 6.12%에 불과해 최대주주인 정 이사장(26.6%)과 격차가 크다.
정 회장은 경영지원실장이었던 2018년 KCC로부터 주식을 매입해 HD현대 지분 5.10%를 확보하며 핵심주주에 올랐다. 이후 6년 만인 지난해 장내에서 소량씩 지분을 매입해 현재의 지배력을 갖추게 됐다. 자사주를 이용해 지분 확대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었다. 정 회장은 주로 매입을 통한 정공법을 활용했다.
정 회장은 개별적으로 소유한 회사가 없으며, HD현대를 제외한 다른 자회사의 보유 지분도 미미하다. 증여 외에는 단번에 지배력을 끌어올릴 뾰족한 수단이 없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승계를 앞둔 재벌들은 세금계산에 골몰하지만 HD현대는 다르다. 세 부담을 걱정하기에 앞서 정 이사장의 주식담보대출 상환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정 이사장의 보유 주식 중 약 50%에 해당하는 1142만주가 담보로 질권설정돼 있다. 이를 기반으로 은행과 증권사에서 총 3715억원을 대출했다. 은행과 맺은 2건의 담보계약은 2018년 이후 여러 차례 연장됐으며, 증권사에서 융통한 자금은 비교적 최근에 실행됐다.
정 이사장이 2018년 주식담보대출을 받을 무렵 정 회장은 KCC가 소유한 지분을 매입했다. 당시 정 회장은 자기자금 3040억원과 차입금 500억원 등 총 3540억원을 재원으로 활용했다. 자기자금은 정 이사장으로부터 받은 현금으로 추정된다.
또 정 회장은 지난해 HD현대 지분 0.62%를 추가 확보하기에 앞서 현금 증여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정 이사장 역시 500억원 규모의 담보계약을 추가로 체결했다. 이에 정 회장의 지분 매입과 정 이사장의 대출 간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들의 지분 확보를 지원하기 위해 실행한 대출이 결과적으로 승계 속도를 늦춘 셈이다.
이전처럼 부친이 지원한 자금으로 주식을 사모으는 방식은 후계자임을 드러내는 상황에서는 효과적이지만 본격적인 승계 단계에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시장의 의견이다. 부친의 주식 중 상당 부분이 질권설정된 상황에서 현금 증여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다만 이를 반복적으로 활용할 경우 추가 차입만 늘리는 셈이 된다.
지배력 확보의 유력한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정 이사장이 담보로 제공하지 않은 일부 지분을 선제 증여하는 것과 정 회장에게 양도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모든 시나리오에는 세 부담이 따른다. 증여 대상의 평가액이 30억원을 초과하면 50%의 세율이 적용되며, 후자의 경우 정상적인 매도라면 정 회장이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지만 변칙 증여로 추정되면 증여세 수준의 과세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또 원칙적으로 주식담보대출 상환이 선행돼야 증여가 가능한 반면 양도는 매각 대금으로 대출을 상환하는 조건으로 금융기관과 협의할 수 있다.
다만 일부 지분이 담보로 잡힌 채 지분이 변동될 경우 마진콜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금융기관으로서는 만약 담보가치가 하락한다면 추가 담보를 요청할 수 있고 증여로 총담보비율이 떨어지면 즉각 상환을 요구할 수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지배구조 재편은 지주사 전환으로 단순화했기 때문에 활용이 제한적인 데다 개인 소유 회사도 없다"며 "자본시장을 이용하는 방안보다는 증여가 유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