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채용해달라는 청탁도
공무원 10명 중 8명 악성민원 시달려8년차 공무원 김모씨(29)는 최근 악몽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2년 전 퇴직한 부서 계장이 지방자치단체에서 설치한 현수막이 불법이라며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면 늘 부재중이던 전직 계장은 급기야 부서원 전체를 직무유기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김씨는 "법과 절차의 허점을 정확히 아는 전직 공무원이 악성 민원인으로 변하면 답이 없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직 공무원들의 악성 민원으로 현직 공무원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공직 경험으로 알게 된 행정 시스템의 허점과 선배라는 관계적 권위를 악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관련 지자체에 따르면 3년차 공무원 박모씨(30)는 최근 퇴직한 팀장의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 퇴직 후 동네 이장이 된 팀장이 국민신문고, 정보공개청구 등 공적 시스템을 동원해 지속적인 민원을 제기하고 있어서다. 박씨는 "존경받았던 팀장님이었지만 동네 이장이 된 뒤부터는 기피 대상이 됐다"며 "이장으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도가 지나치다"고 털어놨다.
이들의 민원이 일반 악성 민원보다 고된 이유는 행정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속속들이 알기 때문이다. 답변하기 까다로운 내용을 골라 정보공개청구를 남발하고 담당자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킨다. 또 합법적인 절차를 이용한 공격과 과거의 권위를 내세운 부당한 압박을 교묘하게 뒤섞는 탓에 기관 차원의 공식적인 대응이 더욱 어렵다.
과거 경력을 내세워 예외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것은 부지기수다. 2년차 공무원 이모씨(27)는 "과태료를 부과하려 하는데 '내가 공무원 해봐서 아는데 과태료는 취소해줄 수 있지도 않으냐'며 따지던 전직 공무원도 있었다"며 "처음에는 절차대로 진행한다고 얘기를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인사 청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11년차 공무원 김모씨(32)는 "기간제 직원을 채용할 때 모르는 퇴직 공무원이 현직 상사를 통해 특정인을 뽑으라고 압력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며 "공정성 문제로 결국 거절하긴 했지만 이런 부당한 요구가 반복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피해는 시민에게 돌아간다. 지난 6~7월 국민권익위원회가 민원 담당 공무원 109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무원의 86.3%(947명)가 악성 민원에 시달릴 만큼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이 수치는 모든 유형의 악성 민원을 포함하지만, 현직 공무원들은 시스템을 꿰뚫고 있는 전직 공무원의 공격이 행정력 낭비와 정신적 피해를 더욱 가중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시민을 위한 서비스는 지체될 수밖에 없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악성 민원인의 신상을 공개하는 등 전반적인 악성 민원 대책을 강화하는 것이 신분 노출을 꺼리는 특성을 가진 전직 공무원들의 악성 민원을 억제하는 효과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