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조롱과 폭력에 멍든 아카데미

이이슬 기자
입력
수정 2022.03.31. 오전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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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포커스]

오스카 초유의 사건
어떤 이유든 폭력 정당화 안돼
지나친 농담은 조롱·멸시
우크라이나 난민 연대 목소리
여성·성소수자·장애인 품어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 폭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있을까. 오스카 무대에서 동료의 아내를 향해 수준 미달의 조롱을 가하고, 이에 격분해 뺨을 내리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초유의 사건은 전 세계에 생중계 됐다.

코미디언 겸 배우 크리스 록이 2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 참석했다.

그는 시상자로 무대에 올라 객석을 바라보며 남우주연상 후보로 참석한 배우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를 향해 말했다. "제이다, '지 아이 제인2'에 출연하면 되겠네요." '지 아이 제인'은 주인공인 데미 무어가 삭발로 등장한 영화다. 이날 제이다가 삭발 헤어로 참석한 것을 보며 농담을 한 것이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윌 스미스도 마찬가지였다. 치아가 다 보이게 웃었지만, 제이다는 웃지 못했다. 자신이 조롱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윌 스미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중앙에 마련된 통로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크리스 록은 다가오는 그를 일종의 이벤트처럼 여기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현장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갑자기 윌 스미스가 크리스 록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퍽'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했다.

불시에 뺨을 맞은 크리스 록은 진행을 이어갔다. "지금 윌 스미스가 날 때렸어요. 저한테 한방 먹였어요." 객석에 앉은 배우들은 리액션이 고장 났다. 상황 파악이 안 됐다. 그때 객석에서 윌 스미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내 아내 이름 입에 올리지 마."

이후 윌 스미스는 영화 '킹 리차드'로 남우주연상으로 호명됐다. 트로피를 품에 안고 소감을 말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조금 전 소동에 대해 사과했지만, 크리스 록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무려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킹 리차드'는 스포츠를 배경으로 가족의 사랑과 신념,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 호평을 얻었다. 영화를 이끈 윌 스미스는 대단한 여성이자 뛰어난 챔피언인 딸들을 빈민가의 위험에서 지켜낸 아버지로 분해 울림 있는 연기로 유력 남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돼왔다.

충분히 좋았다. 폭행만 없었다면, 윌 스미스가 무대에 올라 상이 주는 의미를 멋지게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울림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폭력에 이 모든 의미가 가라앉게 됐다.

아카데미는 시상식을 넘어 모두가 웃으며 축제처럼 즐기는 자리다. 뒤풀이처럼 열리는 파티도 유명하다. 시상식이 끝나면 한 해 동안 땀 흘린 서로를 격려하면서 술잔을 부딪힌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전하면서 밤새 먹고 마신다. 이날 크리스 록은 시상식이 끝난 후 파티에 가지 않고 돌비극장을 빠져나갔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아카데미에서는 소위 '미국식 농담'이 단골처럼 오간다.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때론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크리스 록의 발언은 미국에서 농담이 아닌 '조롱'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농담의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현지에서는 이를 '여성 차별'로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2018년 건강 이상으로 탈모 증상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건강상 문제와 관련돼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제이다가 삭발로 오든, 장발로 오든 그건 자유이자 권리다. 만약 남성 배우가 삭발로 왔다면 삭발 영화 주인공을 농담 소재로 삼는 일 따위는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외모에 대한 조롱은 또 다른 혐오가 될 수 있다.

샤론 스톤은 "크리스 록이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에게도 사과하는 것을 듣고 싶다"며 "누군가의 아픔을 웃음거리로 만들어선 안된다"고 일침을 가했다.

혹자는 가족 관련 가십에 찌든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낀 윌 스미스가 분노의 일격을 날린 것처럼 보기도 하지만, 아내를 향한 거듭된 조롱에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 록의 농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주로 여성이거나, 아시안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시상자로 참여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아카데미를 보이콧했다. 이는 마치 내가 가수 리한나의 팬티를 보이콧 하는 것과 같다. 그와 나는 모두 초대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 순간에 제이다와 리한나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됐다.

또 크리스 록은 아시아계 어린이 3명을 무대에 올린 뒤 "미래에 훌륭한 회계사들이 될 세 분을 소개하겠다. 밍주, 바오 링, 데이비드 모스코위츠(아시안식 이름)를 환영해달라"며 웃음을 유도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내 농담이 불쾌했다면 스마트폰으로 트윗을 올려라. 물론 그 폰은 어린이들(아시안)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계속된 실언에 크리스 록의 오스카 시상자 자격 논란이 불거졌다. 그런데도 아카데미는 계속해서 그를 무대에 올렸다.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일각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아카데미의 책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전 세계 시청자가 충격적인 폭행을 목격했다. 윌 스미스의 폭력은 명백한 범죄이고, 비판 받아 마땅한 행위다.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인간의 존엄을 저버린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현장에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짐 캐리는 "크리스 록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무대에 올라가 상대의 얼굴을 때릴 권리는 없다"고 비판했다. 영화 '킹 리차드'의 실존 인물인 리처드 윌리엄스도 "정당방위가 아니라면 누구도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지탄했다.

시상식 다음날 윌 스미스는 사과문을 게재하고 "크리스 록에게 선을 넘었다. 내가 틀렸다. 미안하다. 아카데미에 사과하고 싶다. 쇼의 프로듀서와 청중들, 그리고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윌리엄스 가족과 나의 '킹 리처드' 가족에게도 사과하고 싶다. 내 행동이 우리 모두의 멋진 여정을 얼룩지게 한 것을 정말 깊이 후회한다"고 했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이미지출처=EPA연합뉴스]


이날 아카데미는 러시아에 침공 당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를 호소했다. 윤여정 등 레드카펫에 오른 배우 다수가 난민을 응원하는 리본을 매고 지지의 뜻을 전했다.

청각장애 남성 배우 최초로 트로이 코처가 영화 '코다'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을 통역하던 수어 통역사도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비춰지기도 했고, 윤여정이 수어로 먼저 발표한 후 영어로 호명하는 배려가 돋보였다.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여성 배우 아리아나 데보스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남성으로 성전환 한 엘리엇 페이지가 각본상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올해도 아카데미는 새 역사를 썼다.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을 품으면서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결국은 두 배우의 조롱과 폭력으로 얼룩졌지만, 우리가 올해 시상식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윌 스미스와 크리스 록이 한 무대에 선 모습이 강렬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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