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물반도체 원천기술 확보하고 자립 생태계 구축해야

입력
수정 2025.10.13. 오전 10:21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K-반도체 2.0’ 서사, 어떻게 써야 하나] 국방·에너지·AI·양자 직결돼

● 반도체산업, 게르마늄→ 실리콘→ 화합물로 전환
● AI는 ‘오늘’의 무대, 양자 기술은 ‘내일’의 게임체인저
● 화합물반도체, 단순한 ‘차세대 반도체’ 아냐
● AI와 양자 시대 현실로 만드는 밑바탕
● 美. 인텔 지분 10% 확보, 방산업체 매입 거론
● 中, 군사·우주 확장하며 韓 주력 반도체 시장 위협
● 韓. 신속·과감하게 도전해야 ‘K-반도체 2.0’ 선도 가능
● 청년세대가 마음껏 연구하고 도전하는 환경 만들어야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조감도. 용인시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은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하며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이 됐고,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대만의 TSMC와 미국의 선두 기업을 꾸준히 추격해 왔다. 이제 세계 어느 나라도 K-반도체를 빼고는 산업 전략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다.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은 이제 시장점유율이나 가격 문제가 아니다. 미·중 갈등, 러시아 전쟁, 중동 분쟁, 에너지 안보 불안정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며 세계질서를 흔들고 있다. 각국은 동맹보다 독자 생존을 우선한다. 반도체는 더는 ‘산업의 쌀’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는 국가 힘의 균형을 가르는 ‘전장(戰場)의 무기’다.

‘산업의 쌀’에서 ‘전장의 무기’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인텔 지분 10% 확보를 추진하고, 나아가 록히드마틴 같은 방산업체 지분까지 거론했다. 인텔은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세계 반도체산업의 대표 기업으로, PC 등 컴퓨터 두뇌인 CPU(중앙처리장치)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회사다. 그는 전임 바이든 행정부 때의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법)을 두고 “대기업에 공짜로 돈을 주는 끔찍한 법(horrible, horrible thing)”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작 정부가 직접 기업의 주인이 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튼 셈이다. 이는 단순한 산업 지원이 아니다. 반도체와 방산을 하나의 공급망으로 묶어 국가 안보 자산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세계 반도체 경쟁이 이제 산업을 넘어 안보와 힘의 문제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이 다음 시대에도 주도권을 이어가려면 실리콘의 한계를 넘어서는 화합물반도체에 눈을 돌려야 한다. K-반도체 1.0은 성공적인 서사였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초격차’ 전략은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됐고,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며 ‘대한민국=메모리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그러나 특정 품목 의존은 위기 때마다 한국 경제를 흔드는 약점이 됐다.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에서 성과가 있었지만, TSMC·미국 기업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더 큰 문제는 기술 패권의 무대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전기차, 재생에너지, 국방·우주, AI, 양자 기술은 모두 실리콘(Si)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온·고전압·고주파 환경을 요구한다. 한때 반도체의 절대 기준이던 실리콘은 이제 한계에 직면했다. K-반도체 2.0은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화합물반도체를 중심에 둔 새로운 패러다임이어야 한다.

반도체산업의 역사는 곧 ‘소재의 전환’이다. 1947년 첫 트랜지스터와 초기 집적회로는 게르마늄(Ge)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곧 주도권은 실리콘으로 넘어갔다. 밴드갭(전자가 존재할 수 없는 에너지 대역)이 더 넓고 고온에서도 안정적이며 산화막 형성이 쉬운 실리콘은 1960년대 이후 반도체의 절대 주류가 됐다. 게르마늄은 특수 용도를 제외하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무대는 미국이었고, 벨 연구소·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인텔이 독무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2025년의 반도체 무대는 과거와 다르다. 미국만의 독무대가 아니다. 유럽, 일본, 중국, 한국, 대만이 동시에 경쟁하는 다극화된 글로벌 경쟁 체제다. 실리콘의 한계를 넘어서는 화합물반도체 시대는 특정 국가의 독점이 아니라, 치열한 리더십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한국이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뒤처지는 추격자로 남을 수 있다.

엔비디아(NVIDIA)는 전력 변환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서버와 보드에 화합물 소자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엔비디아
실리콘 너머 화합물 시대 도래
최근 인공지능(AI)의 급성장은 전력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수천 개의 GPU(컴퓨터그래픽을 처리하는 장치)가 동시에 돌아가는 데이터센터는 중형 도시 한 곳이 쓰는 것과 맞먹는 전력이 필요하다. 전력을 조금이라도 아끼는 것이 곧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이때 낭비를 절반 가까이 줄여주는 해법이 바로 탄화규소(SiC)와 질화갈륨(GaN) 같은 화합물 소자다. 전력 변환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같은 전력으로 더 많은 연산을 가능하게 한다. 엔비디아(NVIDIA)와 구글이 서버와 보드에 화합물 소자 도입을 서두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이터센터 집적도와 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SiC 전력공급장치와 인듐포스파이드(InP) 기술을 시험하고 있다. 이는 곧 전 세계 클라우드 인프라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신호다.

AI의 또 다른 심장은 데이터 전송이다. GPU 간 초당 테라비트(Tb/s)급 통신, 서버와 스마트폰이 6G 시대로 나아가는 길목마다 갈륨비소(GaAs)와 InP 기반 광소자가 자리한다. 이는 단순히 ‘더 빠른 인터넷’ 문제가 아니다. 자율주행차, 드론, 스마트카메라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센서까지 모두 화합물반도체 위에 세워지고 있다. 실시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라이다(LiDAR·Light Detection And Ranging·빛 탐지 거리 측정)·적외선(IR·Infrared)·고성능 이미지센서는 모두 화합물 재료로 만들어진다. 결국 AI의 심장과 감각기관은 실리콘에 뿌리를 두지만, 화합물과 함께 새로이 탄생하고 있다.

AI가 오늘의 무대라면, 양자 기술은 내일의 게임체인저다. SiC나 다이아몬드 같은 재료 속 미세한 결함은 단순한 흠이 아니다. 특정 조건에서 빛을 내고, 극히 작은 자기장까지 감지하는 ‘양자 센서’로 바뀐다. 더구나 극저온이 아닌 상온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에, 우주나 국방처럼 혹독한 환경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결함을 제어하고 소재를 활용하는 능력이 곧 미래 센서 경쟁의 분수령이 된다.

여기에 GaAs·InP 기반 양자점(Quantum Dots)은 단일 광자 방출기를 구현해 양자 암호통신의 단일 광원으로 쓰이고 있다. 도청이 불가능한 네트워크, 즉 국가안보를 새롭게 정의할 기술이다. 한발 더 나아가 연구자들은 SiC·GaN 기판 위에 전력 소자와 광자 소자를 융합해, 초저전력·초고속 양자 집적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이는 에너지와 통신, 그리고 안보의 경계를 동시에 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화합물은 단순한 차세대 소재가 아니다. AI와 양자 시대를 현실로 만드는 밑바탕이다.

산업과 국방·우주, 기술 안보의 교차점
시장 흐름은 곧 화합물반도체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자동차, 에너지, 데이터센터, 국방·우주 산업이 동시에 성장 엔진이 되고 있으며, 이는 과거 메모리 중심 성장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프랑스 시장조사 회사 ‘Yole Group’은 화합물 소자 시장이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13% 성장할 것으로 내다본다. 이는 전체 반도체 평균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영국 시장분석 회사 ‘Omdia’ 역시 전력반도체 시장에서 화합물의 비중이 2022년 2%에서 2029년 13.7%까지 급등할 것으로 전망한다. 연평균 성장률 28.9%라는 가파른 곡선이다. 특히 전기차의 절반 이상이 SiC 인버터를 탑재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탄소중립 시대에도 화합물반도체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태양광·풍력은 본질적으로 간헐적이다. 생산 전력의 품질을 높이고 멀리까지 손실 없이 보내려면 초고압직류송전시스템(HVDC)이 필요하다. SiC 전력 모듈은 기존 실리콘 대비 손실을 절반으로 줄인다. 유럽은 이미 북해 해상풍력과 장거리 송전에 SiC 인버터를 표준으로 채택했다. 한국도 해저케이블, 송배전망, 풍력 단지에 화합물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재생에너지 확대는 종이 위의 숫자에 불과하다. 현장에서는 단 1%의 손실 절감도 수천억 원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화합물 소자의 도입은 선택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필연이다.

미래 교통수단의 공통 키워드 역시 화합물이다. 일본 신칸센은 SiC 모듈로 전력 손실을 40% 줄였고, 독일 지멘스와 중국 철도차량 제조사 CRRC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드론의 체공 시간, 도심항공교통(UAM)의 고출력·경량 전력 시스템 역시 화합물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부 국내 기업들이 시범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글로벌 우위를 점하려면 훨씬 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화합물은 국가 교통과 안보 인프라의 핵심 기반이다.

우주와 전장은 반도체에 가장 가혹한 시험대다. 방사선, 전자기 펄스(EMP), 극한의 고온·고전압은 실리콘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 영역에서 SiC·GaN은 내방사선성과 고온 특성을 입증했고, GaAs·InP는 위성통신과 레이더의 핵심이 됐다. 미국은 이미 내방사선 SiC·GaN을 실전에 투입했고, 유럽우주국(ESA)은 InP 위성용 광소자를 검증하며 인프라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취약하다. 우주·국방 표준을 충족하는 방사선 시험 인프라가 부족해 상당 부분을 해외 기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 속도와 안보 모두에 심각한 제약으로 작용한다. 국방 자산의 근간이 외국산 소자와 국외 시험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곧 국가안보의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국방비가 단순 무기 도입에 머문다면 기술 종속과 안보 리스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법은 자립적 기술 확보와 시험 인프라 구축, 그리고 국방·우주용 화합물 소자의 조기 내재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임기 때인 2017년 2월 8일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있는 인텔 CEO 브라이언 크러재니치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美日中, 유럽의 잰걸음…한국의 선택은?
미국은 트럼프 2.0 체제 속에서 반도체를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인텔 지분 10% 확보에 나서고, 심지어 록히드마틴 같은 방산업체 지분 매입까지 거론한 것은 단순 투자 차원을 넘어선다. 주요 언론은 이를 ‘국가자본주의적 전환’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 디지털·반도체 기업에 과세·규제를 가하는 국가는 수출을 차단하겠다’는 발언까지 내놨다. 이는 반도체와 첨단기술을 사실상 안보 무역 규제의 틀에 집어넣겠다는 의미다. 미국이 기술을 무기화하며, 공급망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려는 흐름이 노골화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와 방산을 하나의 공급망 안에 묶으려는 접근은 기술을 안보 그 자체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은 430억 유로 규모의 반도체법(Chips Act)과 ESA 프로젝트를 통해 내방사선 SiC·InP 실증에 나섰다. 중국은 막대한 국가보조금을 앞세워 민군 겸용 화합물 생태계를 빠르게 키우고 있다. 일본은 파운드리 기업 Rapidus와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그리고 대만의 TSMC 협력을 통해 초미세 공정, 우주, 파운드리를 톱니처럼 맞물리게 하고 있다.

중국의 행보는 거칠면서도 빠르다. 이미 신차 판매의 상당수가 전기차(EV)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로 대체됐고, 비야디(BYD), 지리(Geely) 같은 기업은 내수와 보조금을 무기로 세계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차는 출발점일 뿐이다. 군사용 장비, 위성통신, 레이더까지 민군 겸용 공급망을 넓히고 있다. SiC MOSFET, GaN RF 모듈, InP 위성 소자가 자국 공급망에 편입됐고, 중앙정부는 웨이퍼·에피택셜·소자·모듈을 잇는 수직 통합 체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시안·창사에는 대규모 SiC 산업벨트를 조성했고, 2023년 화웨이는 GaN 전력반도체 자체 양산을 선언했다. “2030년 100% 자급”은 슬로건이 아니라 현실이 돼가고 있다. 우리가 “아직 시간은 있다”고 안심하는 사이, 중국은 내수에서 군사·우주로 확장하며 한국의 주력 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의 강점은 공급망과 기초 연구다. 청색 LED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답게 소재·부품·장비에서 여전히 저력을 유지한다. 무엇보다 기업 단위를 넘어선 완결형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소재·장비·패키징·응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정부·기업·연구기관이 긴밀히 맞물려 움직인다. Rapidus의 초미세 공정, JAXA의 내방사선 패키징, TSMC Kumamoto의 파운드리 협력이 톱니처럼 맞물린다. 이 체계는 단순한 생산능력을 넘어, 연구 경험과 인재풀에 의해 지탱된다.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립 기반이다. 한국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경쟁 포인트다. 동시에 협력의 여지도 분명하다. 경쟁과 협력을 병행하며 독자적 생태계를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공통점은 뚜렷하다. 민간 자율에만 맡기지 않고, 국가 주도의 전략 투자를 병행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메모리 중심의 실리콘 산업에 머물러 있다. 차세대 기술을 민간 자율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다만 이들 국가를 단순히 위협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특정 국가·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곳에서는 글로벌 파트너십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우주·국방용 방사선 시험 인프라, 차세대 전력모듈 국제 표준화, 박사후 연구자 공동 양성 같은 과제는 한국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략적 제휴를 통해 현실화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보완이 아니다. 국제표준 선도, 공동 IP 확보, 글로벌 시장 진입 가속으로 이어진다. 내방사선 소자 신뢰성, 양자 광원 같은 분야는 개별 국가의 독자 연구보다 국제 협력과 공동 표준 제정이 훨씬 효과적이다. 한국은 이런 장(場)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새로운 서사, K-반도체 2.0
K-컬처는 이미 세계를 흔들었다. 최근 애니메이션 ‘K-Pop Demon Hunters(케데헌)’는 넷플릭스 사상 가장 많이 본 애니메이션이 됐고, 극장 ‘싱얼롱 이벤트’까지 열리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한국적 상상력으로 태어났지만, 제작과 자본은 해외에 크게 의존했다. 성공 속에 드러난 건 가능성과 함께 구조적 한계였다.

K-반도체도 유사한 그림자를 안고 있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세계 1위를 달성했지만, 전기차·우주·방산용 화합물반도체의 90% 이상을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고, 방사선 시험 인프라조차 부족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존이 아니라 주도, 모방이 아니라 원천의 서사다.

국가경쟁력은 단순한 점유율이 아니라 원천기술에서 나온다. 화합물반도체 경쟁에서 관건은 소재 물성 제어, 이종접합 기술, 패키징, 신뢰성 확보와 같은 기초 역량이다. 이 토대가 없으면 산업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따라서 심화 연구와 고급 인력 양성이 병행돼야 한다. 산학 협력형 박사과정, 박사후 연구자 육성, 해외 석학과 재외 인재 유치 같은 투자가 필요하다. 학계는 기초와 인재, 산업계는 양산과 응용, 정부는 제도와 인프라라는 삼각 축이 맞물릴 때 비로소 토대가 단단해진다.

K-반도체 2.0은 이제 구호가 아니라 실행과 보완의 문제다. 우리는 이미 국가 차원에서 여러 반도체 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반도체 패권 경쟁은 속도와 스케일, 그리고 전략적 집중에서 갈린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

첫째, 차세대 화합물반도체를 국가 전략기술의 핵심 축으로 분명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 과제는 ‘중복 회피’와 단기 성과 관리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만으로는 차별성과 응용력을 키우기 어렵다. 국방·재생에너지·모빌리티를 떠받칠 기술을 전략 안에 확실히 포함하고, 개별 사업들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연결해야 한다.

둘째, 공공 화합물 파운드리 인프라 확대를 더는 늦출 수 없다. 장비 지원과 공동 인프라 구축이 시작됐지만, 여전히 대기업 중심 구조다. 이 구조만으로는 중소기업·스타트업·대학이 소자를 개발·검증하기 어렵다. 2030년까지 개방형 파운드리 모델을 확립해야 한다. 다양한 주체가 같은 인프라를 활용할 때 비로소 생태계가 살아난다.

셋째, 시험 인프라 확충은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국내에도 일부 방사선 시험 시설이 있지만, 고에너지 양성자·중이온·감마선 같은 핵심 영역은 여전히 해외에 의존한다. 이 상태로는 연구 속도도, 안보도 충분히 보장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보완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새로운 체계로 전환하는 일이다. 시험센터를 세우고, 국제 협력과 공동 표준화를 통해 글로벌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 시험 인프라에서 뒤처진다면 기술 독립은 공허해진다.

넷째, 국산 기술의 시장 정착을 정부가 적극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공공 프로젝트에서 국산 부품 우선 적용을 시도하고 있지만, 신뢰성 검증 부담이 기업에 과도하게 전가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중소기업의 진입을 어렵게 하고 산업 생태계를 위축시킨다. 초기 국산 부품은 위험을 분담할 때만 성장할 수 있다. 정부가 초기 부담을 기업과 분담할 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움직이며 산업 전체의 성장 동력이 만들어진다.

염재호 국가AI위원회 부위원장이 3월 25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AI 글로벌 콘퍼런스’에서 축사하고 있다. 뉴스1
정책 못지않게 산업계 태도 변화도 절실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미 시작된 정책을 한 단계 높여 올릴 결단이다. 실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잃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하고 과감한 움직임이다.

정책 못지않게 산업계의 태도 변화도 절실하다. 그간 메모리 초격차 성과에 안주하며 새로운 시장 개척에 소극적이었지만, K-반도체 2.0 시대에는 단기 수익만 좇아서는 생존조차 어렵다. 기업은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하고, 중소기업·벤처·대학과 협력해 완성형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차세대 인재는 조기에 발굴하고, 현장 인력은 재교육으로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한 경험이 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이 메모리반도체에 과감히 승부를 걸었을 때 세계는 “무모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 지원과 기업 투자, 연구자의 집념이 모여 글로벌 1위를 만들었다. 그 정신을 다시 소환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메모리반도체 점유율은 줄어들고, 시스템반도체는 격차가 크다. 이제는 점유율이 아니라 전략기술에서 주도권을 쥐는지 여부가 미래를 결정한다. 화합물반도체에는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차세대 반도체’가 아니라 국방·에너지·AI·양자와 직결된 전략기술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AI 데이터센터, 양자 기술, 재생에너지, 전기차, 우주·국방. 이 모든 길목마다 화합물반도체가 자리한다. 무기 수입만으로 국방을 지킬 수 없듯, 외부 기술 의존이나 특정 공급망에만 기댄다면 산업 패권도 지켜낼 수 없다. 스스로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자립적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만이 지속 가능한 길이다.

반도체는 기업만의 과제가 아니다. 국가전략이며, 국민 모두의 미래다. 특히 청년세대가 세계 무대에서 마음껏 연구하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곧 우리의 힘이다.

30년 전의 불가능에 맞선 우리의 도전은, 최근 세계 정상을 경험하는 순간으로 이어졌다. 이제 K-반도체 2.0의 새로운 서사를 정부와 산업계, 학계와 국민 모두가 다시 함께 써 내려가야 한다.

● 고려대 전기공학과 졸업, 스웨덴 왕립공과대학 재료공학 석사, 전자공학 박사
● 前 미국 MIT 객원연구원, 국립표준기술연구소 연구원
● 現 국제실리콘카바이드학술대회 (ICSCRM 2025) 총괄조직위원장
● 現 고에너지갭 화합물반도체 연구센터장
● 現 한국전기전자학회 수석부회장 (차기 회장, 2026년), 한국전기전자재료학회 부회장
● 現 국가과학기술연구회 글로벌 TOP전략연구단 책임자문위원
● 現 국가전략기술특별위원회 반도체 기술분야 조정위원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경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