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이 무슨 반도체냐”…2년 만에 분위기 반전
● 대만 윈세미컨덕터와 협업…최첨단 반도체 제작 지원
● 웨이퍼를 구획 나눠 함께 제작하는 MPW로 ‘비용↓’
● 글로벌 기업과의 성과 바탕으로 한국형 생산 체계 구축
● 880명 교육·51명 취업…“교육 넘어 취업으로”
● “전남을 화합물반도체 산업의 거점으로 키워가겠다”
전남이 화합물반도체 산업의 거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화합물반도체센터가 국내 최초로 MPW를 도입하는 등 연이어 성과를 내면서 수도권에 집중돼 있던 반도체 연구·제작 무대를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2023년 12월 출범한 화합물반도체센터는 2년 만에 연구·생산·교육을 아우르는 핵심 시설로 자리잡았다. 대만 윈세미컨덕터, 미국 앰코테크놀로지와 키사이트테크놀로지 등 유수의 글로벌 대기업과 협력하며 설계부터 제작, 패키징까지 포괄하는 ‘전주기 반도체 개발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화합물반도체센터가 MPW를 도입하면서 한국에서도 화합물반도체 생산의 길이 넓어졌다. MPW는 한 장의 웨이퍼를 여러 구획으로 나눠, 각기 다른 연구팀과 기업의 설계를 함께 담아 제작하는 방식이다. 웨이퍼를 칸칸이 쪼개 여러 반도체 회로를 함께 배치하는 것이다. 이 경우 여러 팀이 웨이퍼 생산비용을 분담하기에 각자의 비용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덕분에 그동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스타트업이나 대학 연구실, 중소기업도 최신 화합물반도체 칩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할 기회를 얻었다.
MPW를 활용한 성과도 하나둘 쌓이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를 비롯한 15개 대학과 3개 기업이 MPW를 통해 6G 기지국과 차세대 위성 등 최첨단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전력 증폭기용 화합물반도체를 제작했다. 지금까지 화합물반도체센터의 MPW를 통해 나온 시제품만 46건에 이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외 파운드리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만 가능했던 일이 전남을 거점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대학 연구실과 중소기업이 화합물반도체 제작 경험을 쌓게 됐고, 연구 성과가 곧바로 산업현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도 만들어지고 있다.
해외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도 차근차근 현실화하고 있다. 화합물반도체센터가 그간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올해부터 국내 유일 갈륨나이트라이드(GaN·질화갈륨) 화합물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인 웨이비스와 함께 시제품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산업계에서는 이를 기술 자립과 공급망 안정화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평가한다. 화합물반도체센터 관계자는 “해외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해 온 기업과 연구자에게 국내 기업과 손잡을 의향을 물었더니 모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며 “국내 파운드리와의 협력은 단순한 생산 협력을 넘어 안정적인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화합물반도체센터는 세계적 파운드리와 손잡아 연구자의 설계 역량을 끌어올린 뒤, 이를 국내 기업과 연결해 기술을 내재화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실제로 MPW를 통해 ‘설계-제작-검증’ 전 과정을 경험한 인력과 기업이 늘어나면서, 일선 산업현장에서는 “국내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 차세대 전력·통신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관측된다. 한국형 화합물반도체 생산체계가 조금씩 자리 잡아가며, 국내 기업과 연구자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실무 중심의 교육은 취업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화합물반도체센터는 기업 수요를 반영한 채용 연계형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학생이 반도체 기업 취업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 결과 국립목포대, 전남대, 전북대, 강릉원주대, 한국교통대, 대구대, 부산대 등 7개 대학 학생은 물론 전남 지역 고등학생까지 양질의 취업 기회를 얻고 있다. 지금까지 화합물반도체센터를 통해 880명의 반도체 인력이 길러졌고, 이 가운데 51명이 산업현장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브로드컴, 앰코테크놀로지, 무라타 등 글로벌 대기업은 물론 주성엔지니어링·에이프로와 같은 국내 장비 기업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전 센터장은 “지역 청년을 교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반도체 기업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다. 이날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입사를 앞둔 특성화고 학생 20여 명은 화합물반도체센터를 방문해 이틀간 합숙하며 교육을 받았다. 학생들은 인천 송도의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K5 공장을 견학하며 곧 시작될 직장 생활을 미리 체험하는 시간도 가졌다. 신민서(18) 양은 “학교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웨이퍼 후면 연삭(백그라인딩) 등 실제 반도체 공정을 배울 수 있었고, 사업장을 미리 방문할 기회를 얻게 돼 뜻깊었다”고 말했다. 화합물반도체센터가 실시한 만족도 조사에서 교육생의 91%가 “실습과 강의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김민주 화합물반도체센터 선임연구원은 “밀도 있게 교육이 진행되는 만큼 부담이 적지 않지만, 교육생의 반짝이는 눈빛이 무엇보다 큰 보상이 된다”고 말했다.
양성한 반도체 인력이 일할 기업을 지역에 유치하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지금까지 19개 협력기업을 확보했고, 이 가운데 3곳은 화합물반도체센터 내 지점을 설립할 예정이다. 글로벌 기업과의 연계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키사이트테크놀로지는 360억 원 규모의 전자설계자동화 소프트웨어(EDA)를 기증했고, ‘키사이트 ADS 동아시아 교육센터’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글로벌 계측장비 기업 안리쓰는 15억 원 상당의 측정 장비를 기증해 MPW 검증 인프라를 보강했다. 산학·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인재를 길러내고 기업을 불러들이는 선순환구조가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전남에 무슨 반도체냐”는 회의적 시선도 적지 않았지만 2년 만에 지역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국내 최초로 화합물반도체 MPW를 안착시키고 웨이퍼 제작의 국산화에도 성공하면서, 전남이 더는 반도체 변방이 아닌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양성한 반도체산업 인력 가운데 상당수가 반도체 기업에 취업하면서 지역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과 화합물반도체 산업의 시너지도 기대되는 지점이다. 전남은 전력·우주항공·방산 등 화합물반도체의 주요 수요처가 포진해 있다. 나주에서는 한전 등 에너지 기업이 집적된 ‘에너지밸리’가 만들어지며 차세대 전력망과 관련해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한전공대는 차세대 전력망 연구의 핵심 거점으로 활약할 전망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지난 7월 ‘RE100 산업단지 조성계획’과 ‘차세대 전력망 구축 계획’을 발표하며 전남을 중심지로 지목한 배경이다. 고흥에 ‘우주발사체 산업 클러스터’가 조성되고 있는 만큼 향후 위성·발사체 전자부품 수요 역시 커질 전망이다. 화합물반도체는 차세대 전력망, 우주항공 전자부품, 방위산업 장비에서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산업 수요지와 연구개발 거점이 한 지역에 모여 있다는 점에서 전남이 화합물반도체 산업의 테스트베드로 거듭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병성 전남도 신성장산업과장은 “그동안 전남은 반도체 불모지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화합물반도체센터 등의 성과가 하나둘 나타나며 인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며 “앞으로 이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국립목포대 등 지역 대학·연구기관·기업과 적극 협력해 전남을 대한민국 화합물반도체 산업의 거점으로 키워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