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후공정’ 점찍은 SKC, 매각 거듭한 SK엔펄스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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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05. 오전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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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SK그룹 리밸런싱, 계열사 재편의 속사정

● 반도체 전공정 소재 ‘매각 또 매각’…‘후공정’ 전환 가속
● 고부가·고잠재력 시장 집중 목적…재무개선도 병행
● 패키징·테스트 투자 지속…후공정 ‘시너지 꾀하기’
● 마지막 남은 ‘CMP 슬러리’…지배구조 개편 불가피


분할 후 매각일까, 영업양도일까, 아니면 모회사와의 합병일까. SKC가 반도체 소재 사업을 ‘전(前)공정’에서 ‘후(後)공정’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속도를 내면서 자회사 SK엔펄스의 운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SK엔펄스는 최근 몇 년 사이 SK그룹 내 위상이 크게 변화됐다. 2008년 SK그룹에 편입된 이후 CMP(화학적 기계 연마) 패드와 블랭크 마스크 등 신사업을 잇달아 추진하며 그룹의 반도체 소재·부품 사업을 책임져왔으나, 중간 지주사인 SKC가 반도체 소재 사업의 중심축을 후공정(패키징·테스트)으로 옮겼고, 여기에 SK그룹 차원의 리밸런싱(사업 재편) 기조가 맞물려 사업 분할과 매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전공정 소재 ‘매각 또 매각’…‘후공정’ 전환 가속
박원철 SKC 대표이사가 2024년 3월 서울 종로구 본사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SKC
SK엔펄스는 9월 9일 이사회를 열고 블랭크 마스크 사업 부문의 물적 분할을 결정했다. 해당 사업을 별도 법인으로 떼어내 100% 자회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신설 회사의 이름은 루미나마스크(가칭)이며, 12월 1일을 분할기일 삼아 출범한다.

이 분할은 사업 매각을 위한 선행 작업 성격을 갖는다. SK엔펄스 이사회는 이날 ‘분할 신설법인 지분 매각 승인의 건’도 처리했다. 물적 분할로 완전 자회사가 되는 루미나마스크 지분 100%를 중국 기업에 매각하는 내용이 골자다. 즉 해당 사업을 일단 별도 법인으로 분리한 뒤 지분 전량을 매수인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거래구조가 짜인 것이다.

지분을 인수하는 주체는 태양광·반도체 소재 사업을 하는 중국 기업 창저우 퓨전 뉴 머트리얼과 코리아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 상하이다. 이들은 향후 별도의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해당 지분을 인수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거래 금액은 680억 원이다.

양측은 ‘크로스보더 딜(국경 간 거래)’이라는 점을 감안해 매매 계약서를 작성했다. 매수인은 거래 대금을 두 차례에 나눠 지급한다. 기본적으로 중국 당국이 해외직접투자(ODI)에 대해 승인해야 계약금 126억 원을 준다. 잔금 554억 원은 거래 종결일에 치른다. 내년 1월 30일, 혹은 양측 간 합의를 통해 정하는 날이다.

SK엔펄스는 분할 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10월 27일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한다. 하지만 단순히 법적 절차를 지키려는 목적이며, 주총 결과는 사실상 정해졌다. SKC가 SK엔펄스 지분 전량을 보유한 최대주주여서 분할안이 주총 문턱을 넘지 못하는 시나리오는 검토할 필요가 없다. 이번 분할 자체가 사실상 대주주의 뜻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SK엔펄스의 블랭크 마스크 사업 매각은 모회사(SKC)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후공정 소재 강화’ 작업의 일환이다. 반도체는 통상 여덟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다. 흔히 ‘반도체 8대 공정’이라고 불리며, ‘웨이퍼 제조→산화공정→포토(노광)공정→식각공정→증착‧이온주입 공정→금속배선공정→EDS(검사)공정→패키징공정’순이다. 일반적으로 여섯 번째 단계인 금속 배선까지를 전공정으로, 이후 단계인 EDS와 패키징, 테스트를 후공정으로 칭한다. 블랭크 마스크는 세 번째 순서인 노광공정에 사용되는 포토마스크의 핵심 부품이다. 반도체 기술이 발전할수록 미세한 패턴을 형성할 수 있는 고해상도의 포토마스크가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블랭크 마스크가 필수다.

고부가·고 잠재력 시장 집중 목적…재무개선도 병행
블랭크 마스크가 적용된 반도체용 포토마스크. SKC
SKC가 SK엔펄스를 통해 영위하던 반도체 전공정 소재 사업을 하나둘 접고 후공정 중심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건 2023년부터다. 반도체 소재 중에서도 부가가치가 더 높고 성장 잠재력이 뛰어난 사업에 집중하는 게 미래 경쟁력 강화에 보탬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박원철 SKC 대표이사는 지난해 3월 주주총회에서 “SKC는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화학, 반도체 전공정 분야 비핵심 사업 유동화와 반도체 후공정 분야 고부가 사업 투자로 전사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했다”고 설명했다.

비주력 사업을 적극적으로 정리해 재무구조 개선을 꾀하는 SK그룹 차원의 리밸런싱 기조도 영향을 미쳤다. 지주사인 SK㈜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SK의 연결 대상 종속회사는 상반기 기준 634곳으로 집계됐다. 그룹 차원의 리밸런싱 작업이 본격화되기 전인 2023년 말(716곳) 대비 82곳 감소한 규모다. 최태원 SK 회장은 8월 20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열린 이천 포럼에서 “운영개선은 회사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일”이라며 “인공지능(AI) 세상이 왔으나 기초 체력이 없다면 그 위에 쌓아 올린 건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SKC는 전기차 캐즘 장기화로 인한 이차전지 소재(동박) 사업 부진과 화학 산업 불황에 따른 수요 회복 지연이 겹쳐 수년째 유동성 확보가 어려운 상태다. 사실상 돈 나올 구멍이 반도체 소재 사업밖에 없다. 이에 2024년 12월 CMP 패드 사업을 한앤컴퍼니(한앤코)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CMP 패드는 반도체 웨이퍼의 표면을 물리, 화학 반응으로 연마해 평탄하게 만드는 등 반도체 집적도를 높이는 데 쓰이는 제품이다. CMP 패드 생산 및 판매와 관련한 자산과 계약, 부채, 권리, 인력 등 모두에 3410억 원의 가격이 매겨졌다.

당시 블랭크 마스크 사업도 매각이 거론됐으나, 결과적으로 한앤코는 CMP 패드 사업만 양수했다. 사실상 SK엔펄스는 이때부터 블랭크 마스크 사업의 새 주인을 찾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SK엔펄스는 CMP 패드 매각 목적에 대해 “현금 유동성 확보에 따른 재무구조 개선 및 사업구조 재편을 통한 기업가치 제고”라고 밝혔다. 해당 거래는 4월 마무리됐다.

SK엔펄스가 반도체 전공정 사업을 한앤코에 넘긴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약 1년 2개월 전인 2023년 10월 파인 세라믹 사업을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파인 세라믹은 기존 세라믹보다 전기적 특성과 내구성 등을 높인 소재다. SK엔펄스는 알루미나(AL2O3)와 실리콘(Si), 실리콘카바이드(SiC) 등을 기반으로 각종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공정에 필요한 부품을 시장에 공급해 왔다.

거래 금액은 3303억 원으로 최종 결정됐다. SK엔펄스의 파인세라믹 사업 부문 일체와 해외 100% 자회사인 엔펄스 타이완(대만법인), 엔펄스 상하이 인터내셔널 트레이딩(상해법인)까지 모두 포함된 값이다. 당초 3600억 원으로 예정됐지만, 일부 조정을 거치며 300억 원이 줄었다.

SKC는 후공정 사업에 집중하려는 움직임도 병행했다. 2023년 9월 미국 반도체 패키징 분야 스타트업 칩플렛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한 게 대표적이다. 반도체 패키징은 중앙처리장치(CPU)와 D램 등 각기 다른 기능을 하는 칩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후공정으로, 칩세트의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미국 반도체기업 AMD의 사내벤처(CIC)로 출범해 2021년 분사한 칩플렛은 첨단 반도체 기판의 구조 체계(아키텍처) 설계와 기술개발, 대형 고객사와의 네트워크 역량 등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AMD와 세계 1위 반도체 후공정 외주기업인 대만 ASE 등이 주주로 있다.

SKC는 칩플렛의 시리즈B 투자 유치에 참여해 지분 12%를 확보했다. 글로벌 네트워크와 혁신 기술 확보 등 후공정 사업의 글로벌 확장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앞서 2021년 반도체 유리 기판 투자사 앱솔릭스를 설립하고 미국 조지아주에 세계 최초의 반도체 패키징용 유리 기판 공장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리 기판은 반도체 패키징 분야의 판도를 바꿀 차세대 ‘게임 체인저’로 꼽히는 소재다. 최태원 회장은 2024년 7월 미국 앱솔릭스 사업장에 방문해 “앱솔릭스가 생산할 유리 기판은 반도체 제조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고 자신했다.

유리 기판은 보통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기판과 달리 표면이 매끈해 초미세 회로 구현이 가능하고 대용량·고성능 칩을 설치해도 문제가 없다. 단일 장치 안에 많은 칩을 통합시켜 컴퓨팅 성능을 대폭 높일 수 있고, 이는 반도체의 퍼포먼스와 전력 효율, 성능을 개선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SKC에 따르면 유리 기판 사용 시 반도체 속도가 기존 대비 40% 빨라지고 전력 소비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SKC는 현재 글로벌 고객사에 샘플을 공급하고 있는 단계로, 이르면 연내 양산에 돌입할 방침이다.

마지막 남은 ‘CMP 슬러리’…지배구조 개편 불가피
2023년 7월 7일 ISC 주식 매매계약 체결식에서 박원철 SKC 대표이사(오른쪽)와 당시 ISC 최대주주였던 전제모 헬리오스프라이빗에쿼티 대표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SKC
SKC는 2023년 10월 헬리오스프라이빗에쿼티(PE)로부터 반도체 테스트 소켓 기업 ISC 지분 45.03%를 5225억 원에 인수하며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이어 2024년 12월 SK엔펄스에서 후공정 장비·부품 부문을 물적 분할해 ‘아이세미’를 출범시켰고, ISC가 이 회사 주식 전량을 인수하는 방법으로 8월 흡수 합병했다. SKC와 계열사들은 인수·분할·합병을 통해 반도체 후공정 사업의 시너지를 본격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SK엔펄스가 계획대로 내년 초 블랭크 마스크 사업을 중국에 넘기면 회사에는 CMP 슬러리 사업만 남게 된다. CMP 슬러리는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웨이퍼 표면을 평탄화하는 작업에 쓰이는 액체 연마제다. 생성형 AI와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수요 확대를 바탕으로 시장 성장이 예상되지만, SKC는 SK엔펄스의 슬러리 사업 역시 처리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이 사업을 해결해야 수년에 걸쳐 추진해 온 후공정 집중 작업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옵션은 세 가지다. 분할 후 매각과 영업양도, 그리고 모회사인 SKC와의 합병이다. 어떤 방향으로 최종 결정이 나든 지배구조 개편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확정된 바는 없지만, CMP 슬러리는 SK엔펄스에 남은 사실상 마지막 사업인 만큼 법인의 존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향후의 결정은 SKC 차원을 넘어 SK그룹 전체가 추진하는 리밸런싱 전략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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